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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봉화 청량산 가는 사색로 ‘퇴계 녀던 길’

향기男 피스톨金 2007. 3. 30. 12:18

 

     봉화청량산 가는 사색로 ‘퇴계 녀던 길’

봄이 등을 떼민다. 좀 걷자고. 공원 벤치에는 햇살이 오글오글 모여 있고, 지렁이가 여기저기 숨구멍을 뚫어놓는 통에 땅은 헐거워졌다. 고운 볕발에 고슬고슬해진 흙길에선 발가락 사이로 봄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것 같다.
 

안동에 ‘퇴계 녀던 길’이 있다. 세상 잡것과 고민으로 가득한 ‘머리통’을 조금 비울 수 있는 사색의 길이다. 봄도 느낄 수 있고, 마음공부도 할 수 있다. 역사와 스토리도 있다.

 

퇴계 녀던 길은 퇴계 이황 선생이 청량산지도보기 가던 길이다. 퇴계는 청량산을 유독 사랑했다. 주자가 무이산을 애찬했듯 퇴계는 청량산을 이상향처럼 여겼던 모양이다. 퇴계는 어려서 청량산 자락에서 숙부로부터 논어를 배웠다. 청량산은 원효와 김생도 수행했다는 곳이다.

 

퇴계 녀던 길은 처음에는 둑길, 나중에는 험하지도 않고 넓지도 않은 숲 좋은 오솔길이다. 오솔길은 숲을 가로지르고, 강변을 옆구리에 낀 채 언덕을 넘어 지줄지줄 이어진다. 소나무, 느티나무 향기가 코 끝을 파고 들고, 머리가 하얗게 센 길섶의 물억새도 정겹다. 돌자갈을 핥고 넘어가는 낙동강 여울소리,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도 듣기 좋다. 이런 길은 약 3㎞ 정도. 당신의 귀에서 MP3를 빼도 좋다.

 

강변 너머에는 깎아지른 벼랑들이 우뚝 솟아있다. 험산구곡을 돌아 흐르는 강물 위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봄햇살이 눈부시다.

 

퇴계의 15대손인 이동은옹(99)은 “퇴계 선생은 청량산을 마음에 두고 많이 다니셨다”며 “근동의 선비들과도 함께 청량산을 찾았다는 시도 남기셨다”고 했다. 퇴계의 영향으로 청량산을 둘러보고 유람기나 시를 남긴 사람은 100여명. 시는 1000여편에 달한다. 청량산은 영남 선비들의 마음 수행 길이었음은 분명하다. 퇴계의 시 한 수 들어보자.

 

‘어느 곳을 가더라도 구름 메(산) 없으리오/ 청량산 육육봉이 경개 더욱 맑노매라/ 읍청정 이 정자에서 날마다 바라보니/ 맑은 기운 하도 하여, 사람 뼈에 사무치네.’

 

퇴계는 ‘유산(遊山)은 독서와 같다’고 했다. 산에 가는 것 자체가 마음 수행, 지식 수행이란 뜻이다.

 

사실 소요와 산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자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줬다.

루소는 ‘나는 걸으면서 명상에 잠길 수 있다. 나의 마음은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고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걸으면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고백했으며, 니체는 ‘심오한 영감, 그 모든 것을 길 위에서 떠올린다’고 했다.

 

칸트매일 오후 5시 그의 고향 퀘니히스베르그의 마을 길을 산책, 마을 사람들이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는 헤겔과 야스퍼스, 막스베버, 괴테가 걸었던 ‘철학자의 길’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당대의 철학자들도 산책을 하면서 의견을 펼쳤기에 소요학파란 이름까지 얻었다. 다산 정약용도 유배지 다산초당에서 강진 백련사까지 오솔길을 걸으며 ‘목민’(牧民)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걷기는 단순한 다리운동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을 깨우쳐 주는 사색의 방법이다.

 

퇴계가 공부했다는 오산당 앞길. 퇴계가 세상을 떠난 뒤 후손과 영남 학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다시 집을 세우고 청량정사란 현판을 내걸었다.

퇴계 녀던 길 끄트머리에 농암종택이 있다. 농암 이현보(1467~1555) 후손이 산다. 농암(聾巖)이란 귀머거리 바위란 뜻이다. 이 집의 종손 이성원씨는 “농암이란 그의 호에는 결국 혼탁한 정치판을 떠나 고향에 돌아와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고 했다.

 

실제로 서른둘 젊은 시절부터 일흔여섯까지 무려 44년을 벼슬살이했던 농암은 중앙 관직을 싫어했는지 주로 외직을 자처했다.

농암의 원래 집터는 안동댐 건설로 물 속에 잠겼다. 후손이 5년 전 도산면 을미재 가송리로 집을 옮겨왔다.

 

퇴계 녀던 길은 현재는 농암종택에서 끊어지지만 과거엔 청량산이 종착지였다. 퇴계는 15세때 청량산에서 숙부인 송재 이우 선생에게 글을 배웠다. 글 공부를 하던 곳이 오산당(현 청량정사)이다. 오산당에서 응진전 가는 길은 숲 좋은 오솔길이다.

 

오산당 길은 퇴계뿐 아니라 원효도 걷던 길이다. 눈 밝은 원효가 절터를 잡았다. 응진전으로 이어지는 길. 깎아지른 벼랑이다. 원효는 왜 천길 벼랑 아래 암자를 세웠을까. 아마도 수행자란 늘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건축가 이일훈도 경기 화성 ‘자비의 침묵 수도원’을 설계할 때 계단에 난간을 없앴다. 수사들이 위험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이일훈은 수도자는 늘 깨어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응진전은 천애절벽에 제비집처럼 붙어 있는 형국이다. 벼랑을 끼고 도는 이 길을 따라가면 김생이 공부했다는 김생굴도 나타나고 절벽을 돌아서면 최치원이 마셨다는 총명수도 있다. 퇴계나 원효, 김생도 이 사색의 길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이 한올 한올씩 뽑아낸 생각으로 화엄사상을 이뤘고, 퇴계학을 완성했을 것이다.

 

올 봄엔 좀 걷자. 생각도 좀 하자. 요즘 세상엔 눈과 귀와 입을 즐겁게 하는 게 너무 많다. DMB TV, MP3, 컴퓨터, 플레이스테이션…. 감각은 기계와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었다. 머리는 무뎌졌다. 뇌세포는 상상의 세계를 쫓아 퍼즐을 맞추고 잇는 것에 둔해졌다.

 

팔을 힘차게 흔들어대는 파워 워킹은 하루 이틀 접어두고, 봄볕 아래 느릿하게 걸어보자. 온 몸의 숨구멍을 열어놓고, 볕좋은 숲길을 밟다보면 한 순간이나마 돈 생각, 집 생각, 승진 생각, 공부 생각도 지울 수 있다.

 

프랑스의 다비드 드 브르통은 ‘걷기예찬’에서 걷기를 ‘삶의 불안과 고뇌를 치료하는 약’이라고 했다. 걷기는 봄날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원효나 퇴계처럼 우주에 뜻을 두지는 못하더라도 하루쯤은 축복 같은 봄날을 머리 속에 담아볼 수 있지 않겠는가.


▶여행가이드

 

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 서안동 IC. 톨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우회전, 35번 국도를 타고 봉화 방면으로 달린다. 안동시내에서 무조건 도산서원 이정표만 보고 달린다. 도산서원(054-856-1073) 주차장을 지나 고갯마루를 넘으면 자그마한 개울이 나온다.

 

우회전하면 퇴계종택. 퇴계종택과 이육사문학관(054-840-6593)을 지나 달리다보면 자그마한 삼거리에 ‘백운지’라는 돌비석이 보인다. 여기서 좌회전해서 내려가면 낙동강. 다리를 넘지 않고 둑방길을 타고 좌회전해서 길이 끊어지는 지점까지 달리면 퇴계 녀던길 이정표가 보인다. 농암종택까지 왕복 2시간 거리.

 

청량산도립공원은 봉화방면을 달리면 나온다. 청량사에 오르기 직전에 산꾼의집 가는 등산로를 타면 된다. 산꾼의집 바로 옆이 오산당이다. 산꾼의집 옆길로 걸으면 응진전 가는 길이 나온다.

 

산꾼의집에서 응진전까지는 15~20분 거리. 아이들과 함께 간다면 유교문화박물관지도보기(054-851-0700)도 들러볼 만하다. 농암종택(054-843-1202), 수애당(054-822-6661), 지례예술촌(054-822-2590) 등 고택에서 숙박할 수 있는 곳이 여럿 있다.

〈안동|글 최병준·사진 이상훈기자〉 [경향신문 2007-03-29 11:39]    


          

 

  
                        Peter Piper - Frank Mil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