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Travel)이야기들/재밋는 중국여행

자꾸 보살 대갈, 보살 눈깔, 이래 안 합니까?

향기男 피스톨金 2007. 1. 10. 12:41

 

 자꾸 보살 대갈, 보살 눈깔, 이래 안 합니까?"

                                       그리운 둔황

둔황(敦煌). 찬란한 사막의 횃불.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에 둘러싸여 완연한 사막의 복판에 놓인 이 오아시스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 삼위산에서 바라본 둔황 전경. 모래 사막들 뒤로 넓게 펼쳐진 녹지가 보인다.
ⓒ2007 오창학
한무제의 한서사군 이후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내어 흉노의 남하를 막고 대상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기구인 서역도호부가 생기면서 자연스레 동서 교류의 전진기지 된 곳.

옛이름 사주(沙州)의 의미처럼 모래에 둘러싸인 채 고비사막의 뜨거운 바람을 견뎌내는 이곳은 대상들과 수도승, 외국의 사절들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실크로드 여행에서 중요한 장소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누란왕국으로 나아가거나 톈산산맥 남쪽 기슭으로 가기 전 숨을 고르던 곳이다. 우리도 막하연적 사막을 건너 투루판으로 가기 전 침착한 숨을 고르며 며칠을 머물게 될 것이다.

▲ 멀리 보이는 삼위산과 명사산의 전경. 4세기경 모가오굴을 처음 굴착한 악준은 저 사이에서 나오는 빛을 보았다 한다.
ⓒ2007 오창학
차를 몰아 모가오굴(莫高窟)을 향해 나아간다. 시내를 벗어나 조금만 외곽으로 나서면 금세 이곳이 사막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강수량 40mm, 증발량 1300mm라는 수치가 아니어도 둔황의 바삭바삭한 느낌은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곳은 천상 모래의 땅이다.

둔황 동남쪽으로 20㎞가량을 이동하니 전방 왼편에 삼위산, 오른편에 명사산이 나타난다. 4세기경 삼위산과 명사산 사이에서 나오는 빛줄기를 보고 처음 막고굴 석굴을 조성했다는 악준(樂俊)은 이쯤 거리에서 빛을 느꼈으리라.

자연 속의 대화랑 모가오굴

▲ 모가오굴 앞에서 선 파라곤(좌)과 백구(우).
ⓒ2007 오창학
모가오굴은 4세기 이래 밍사산 절벽 1.6㎞를 따라 조성한 석굴군이다. 474개의 석굴 안에 4천기가 넘는 소상과 연면적 4만5천㎡가 넘는 벽화가 소장되어 있다. 1미터 폭으로 나열했을 때 45㎞에 달하는 대화랑이 저 굴 속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 4500만 제곱미터의 벽화가 있는 자연 화랑.
ⓒ2007 박재익
내게 이 절벽이 의미 있는 이유는 인류사에 찬란히 빛나는 예술작품으로 가득해서, 20세기를 찬란하게 한 둔황학의 문적들이 발굴된 곳이어서라기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기도처로써, 거주민과 실크로드를 오갔던 수많은 사람의 흔적이 오롯이 배인 곳이어서다.

한족 아버지와 티벳 여인 사이에 태어나 정신적 물질적 충족을 위해 어려서 사미계를 받은 한 여인, 면세 혜택을 노리고 사찰에 땅을 담보 잡힌 채 농사를 짓던 지주의 이야기, 민방위 소집 후 무기반납을 안 했다가 감옥에서 갇힌 아들을 위해 땅을 팔던 늙은 과부의 이야기. 모가오굴엔 이런 민초들의 이야기가 아롱져 있다.

그리고 먼 길을 달려온 한국인으로서 갖는 또 한 가지의 애정이라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축약본이 발견된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혜초 스님이 바닷길로 인도에 들어가 순례하고 육로로 귀국할 때 거쳐간 장소임은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 모가오굴 입구.
ⓒ2007 박재익
외국인은 해당 언어 해설자 비용을 추가해 따로 표를 끊는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동안 우리 일행 6명 외에 기차로 여행 중인 중년부부 한 쌍이 같이했다. 은연 중 단체관광이 아닌 기차를 이용한 '자유로운' 여행을 강조하는 남편분께 살며시 미소로 답했다. 후훗… 우리가 한국에서부터 차를 달려 이곳에 닿은 사람들임을 아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 주실까?

우리 앞에 나타난 남자 해설자는 영락없이 '날아라 썬더보드'의 등장인물 중 하나와 꼭 닮았다. 그런데 그의 한국어 발음이 힘겹다. 베이징에서 1년간 한국어를 익혔다는 그의 발음을 이해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곧 포기해버렸다.

왜 이런 유명유적지 한국어 해설자가 조선족 교포가 아니라 한족일까에 대해 우리끼리 말들이 오갔다. 소수민족의 연구 성과를 등한시하는 중국의 풍토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중지를 모았는데, 조선족인 철봉씨의 말은 조금 다르다. 아마 돈이 되질 않아서 조선족 해설원이 이곳을 꺼렸을 것이라 했다. 철봉씨도 돈 때문에 초등학교 교원을 그만두고 관광안내원의 길로 나섰던 만큼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절기 울리 맛고오굴 상징입니다. 살진 직고 일리로 오십시오우."

해설자는 저만치 떨어진 96굴의 9층 누각을 가리킨다. 굴에 들어서기 전 모든 촬영기기는 반드시 맡기고 들어가야 하므로 먼저 기념사진을 찍어두고 오라는 말이다. 누가 작렬하는 둔황 여름 햇살 아래 반복되는 구간을 걷고 싶겠는가만은 인간적인 이해와는 별개로 뒷입맛은 쓰다.

문화재에 관한 몇 가지 단상

▲ 막고굴의 상징 북대불전 9층누각.
ⓒ2007 오창학
둔황 막고굴의 상징 '북대불전'은 9층의 탑형식인데 누각 뒤로 높이 35m의 대불이 세워져 있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석불이었는데 세계 2, 3번째인 아프카니스탄 바미안 석굴의 동대불(45m), 서대불(38m)이 탈레반 정권에 의해 파괴되었으니 이제 세계에서 두 번째 큰 석불로 등극한 셈이다.

역사라는 게 참 묘해서 불과 40여 년 전에 문화재에 대해 탈레반보다 더한 짓을 감행했던 중국이 이제 와 '문화'와 '문화재'를 거론하며 세계에 실크로드 유적의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 정비된 막고굴의 굴들. 저 안에 촬영도구를 소지한 채 입장할 수 없다.
ⓒ2007 박재익
많은 굴 중 우리에게 허용된 굴은 10여 개뿐이다. 120위안어치 구경치곤 너무 소략하다 싶었지만 참관할 수 있는 굴의 양에는 집착하지 않았다. 어차피 비전문가적 입장에서 어둠 속 전등에 의지한 관람이 얼마만큼 감동을 줄지는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인으로서 혜초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장경동이 있는 17호굴과 신라승탑에 대한 지도가 있다는 61굴, 조우관을 쓴 해동인의 그림이 있는 237굴, 332굴. 그리고 고구려의 쌍영총 수렵도와 유사한 수렵도가 있는 249굴만은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그게 통했는지 중 17, 237, 249굴이 포함되어 있다.

16, 17호굴이 1층에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17굴은 16굴의 '곁방'이다. 1900년 어느 봄날 16굴을 수리하던 도사 왕원록(王圓籙)이 모래로 막은 벽을 허물기 전까지 사방 3m의 방을 가득 채운 고문서들은 1000년 세월을 먼지로 존재해 왔다.

그러다 왕 도사가 고문헌들을 발견해 보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구 열강의 탐험대가 접근했고 은화 몇 닢에 자료들을 사들여 보낼 수 있는 만큼 본국으로 보내게 된다.

17호굴을 보니 한 장의 사진이 떠오른다.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가 이 굴에서 촛불 하나에 의지해 쪼그리고 앉아 2만여 권이나 되는 고문서를 3주 만에 독파하던 때의 사진. 책에 열중하는 그의 사진을(동료사진작가 누에트가 찍음) 처음 접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다. 13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그가 하루 1000건의 문서를 검색하고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문헌들을 분류할 때 발견한 것이 바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다.

17호굴 근처의 박물관에선 영국 탐험가 스타인과 프랑스의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 러시아 고고학자 올덴부르그, 미국의 고고학자 워너 등 흔히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 불리는 열강 탐험대의 문화재 탈취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해설원도 이곳에선 비난의 어조가 더욱 높아진다.

후안무치. 본시 제왕은 부끄러움이 없다더니 이 나라도 '제왕'의 기질이 있어서 그런가? 왕 도사의 문헌발견 보고에도 운반비용의 문제를 들어 방치했던, 그러다가 결국 열강이 다 뜯어나고 남은 자료나마 가져갈 때 쓸만한 자료들을 관리들이 앞다투어 가로챘던 이 나라가 열강의 약탈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낯이 두껍든 과거의 잘못이 어떠했든 지금 정신을 차리고 원주인이 문화재의 반환을 원한다면 돌려주어야 한다. 당시 문화재 반출의 목적이 보존을 위해서였든 연구를 위해서였든 이제 원래 주인이 문화재를 보존할 능력과 의지가 있다면 마땅히 돌려주어야 한다.

"우린 그런 민족 아닙니다"

서울에도 여기 둔황의 유물이 있다는 해설자의 말에 임시동행한 그 중년 한 분이 그런다.

"우리가 훔친 게 아녜요. 우린 그런 민족 아닙니다."

맞다 우리는 도둑이 아니다. 당시 그럴 여력도 없었다. 그렇다면 도둑질한 장물은 가지고 있어도 되는가?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의 탐험대가 세 차례에 걸쳐 둔황과 실크로드의 다른 지역에서 챙긴 문화재 중 1/3에 달하는 분량이 조선총독부로 넘어오게 되었고, 해방을 통해 고스란히 우리 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벽화 60여점을 포함해 1700여 점의 크고 작은 유물이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내력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에 약탈당한 외규장각 도서는 반환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1993년 고속철도 사업의 미끼로 미테랑이 의궤 한 권을 들고와 '고맙게'도 '영구대여'해 준 것을 빼고는 아무런 진전이 없다. 정작 그 프랑스는 2차 대전 당시 빼앗긴 모네의 그림을 1994년 독일로부터 돌려받는 것을 필두로 나머지 27점의 작품도 모조리 되찾아 자기네 약탈문화재의 완전한 회복을 꾀하고 있다.

굳이 외규장각 도서 이외에도 7만 점이 넘는 해외 반출 문화재의 조속한 반환을 위해서는 우리부터 적법하지 않은 절차로 얻게 된 실크로드의 유물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한다. 우리마저 우리가 욕해 마지않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행태를 뻔뻔하게 본받을 순 없지 않은가.

▲ 석굴.
ⓒ2007 박재익
문화재의 '약탈'과 '반환'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생각하니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얽히더니 다시 석굴의 회화들을 접하는 순간 명정한 마음으로 돌아온다.

259굴의 4세기 보살상은 높은 코와 치마양식으로 볼 때 중국인이 아니고 이슬람식 천정(중앙아시아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게 이채롭다. 흙으로 만든 대들보와 서까래가 있는데 단순히 중국인을 위한 장식적 의미이다. 둔황이 인종과 문화의 경계를 지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해설자는 보살의 미소를 '모나리자의 미소'에 견주어 설명한다. 이제껏 중국의 곳곳을 돌아 여기에 이르기까지 웃는 모양은 모두 '모나리자', 반나체의 여인상은 '비너스'에 견주어 설명들은 탓에 식상한 느낌이다. 그의 한국어를 알아듣기가 어려워 무시하고 지나친 탓에 잘못 들었는데 굴을 나오면서 철봉씨가 그런다.

"그란데 저 친구 누한테 한국말을 배왔는지 모르겠어요(철봉씨는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왜요?"
"자꾸 보살 대갈, 보살 눈깔, 이래 안 합니까?"

하하하. 많이 웃었다. 기회 봐서 말을 해 주어야 할 텐데.

삶과 생활의 공간 모가오굴

237굴의 '유마경변상도(維摩經變相圖)'. 각국의 사신들이 유마거사에게 설법을 청하는 모습을 묘사한 벽화에 조우관을 쓴 해동 왕자의 모습이 보인다.

"실라 완자님이 조일 잘 생기셨솝니다."

한족 해설자가 조우관을 쓴 인물을 전등으로 가리키며 농담을 한다. 해동의 왕자가 중화의 땅에 사신으로 와 조아리는 모습에 대한 우리 팀의 평가는 '실크로드 교역사의 한 축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대의 아픈 그늘을 상기시키는 것이다'로 다시 엇갈렸지만 저 그림이 사실도라기 보다는 일종의 관념도며 상상화이리라는 점엔 의견을 모았다.

428굴. 인도 비천상이나 불상을 보다가 벽 하단에 그려진 천 명의 공양주 그림에 눈이 멎었다. 이름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지워진 상태. 와락 반가움이 인다. 이 순간 굴이 죽은 회화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있는 공간으로 돌아온다.

96굴에서 본 '도독부인 아무개가 일심보양(一心保襄)하다'와 148굴 '당 대종(大宗) 11년(775) 이대빈 상인 시주'라는 글귀와 연관해 미소 짓게 한다. 신앙도 예술도 결국은 삶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곳은 민초들의 염원이 묻어있는 생활의 장소다.

▲ 둔황의 상징 비천상.
ⓒ2007 박재익
모가오굴을 나오는데 '비천상(飛天像)'이 서 있다. 북대불 9층 누각이 막고굴의 상징이라면 둔황지역 석굴 벽화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비천상은 둔황의 상징이다. 천가신(天歌神) 건달바와 천악신(天樂神) 긴나라가 합쳐져서 남녀 구분이 없고 둘 사이 기능이 통합된 존재. 구름의 도움은 받되 구름에 의지하지 않으며 바람에 하늘거리는 옷과 채색 허리띠에 의지하여 하늘을 난다.

본뜻은 서역의 비천과 중국의 선녀, 불교의 천인(天人)과 도교의 우인(羽人)의 특성이 융합된 상으로 지어졌겠으나 이제 비천의 모습은 완연히 중국 향을 머금고 있다. 여러 민족이 경합을 벌였던 이 터전도 이젠 모두의 땅은 아니다.

 [오마이뉴스 2007-01-09 07:42]    

 [오마이뉴스 오창학 기자]

 

 
첫날처럼 - Comme au premier jour - Andre Gag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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