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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통맥풍수/김대건 신부와 솔뫼·미리내 성지

향기男 피스톨金 2007. 4. 13. 12:11

 

                  대한민국 통맥풍수

 

        /김대건 신부와 솔뫼·미리내 성지


천주교의 솔뫼성지(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5)는 김대건(1822∼1846) 신부가 출생한 곳이고, 미리내성지(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는 그가 군문효수를 당해 절명한 후 묻혀 있는 곳이다. ‘소나무 산’이라는 솔뫼에는 200살이 넘는 재래 적송들이 상큼한 솔바람을 일으키고 있고, ‘은하수 골짜기’란 뜻의 미리내는 계곡이 무척 아름답다. 두 곳 모두 곱디고운 우리말 땅이름이다.
 

김 신부(세례명 안드레아)의 증조부(진후·1814년), 종조부(한현·1816년), 부친(제준·1839년)은 천주교를 믿는다고 차례로 처형당했다. 아흔 아홉칸의 대갓집에 살던 김해 김씨 가문이 몰락하여 폐문지경에 이르렀고 정든 고향에 머물 수조차 없게 되었다.

 

7세때 어머니 고씨(우르술라)를 따라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하였다. 여기서 프랑스 모방 신부를 만나 세례받고 예비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된다.

 

그렇다면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출현한 당진 솔뫼 생가터는 어떤 자리일까. 22년 동안 4명의 고귀한 목숨이 희생됐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가족사다.

 

이른 아침 서울을 떠나 당진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거봉 김혁규(한국풍수지리중앙회장) 선생과 이상호, 심순희, 신현웅(요셉), 심효보씨 등 문하생들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당진 성당의 이춘옥(리디아), 신효철(데레사), 홍경자(루시아), 안영옥씨 등 여성 신자들이 합류하니 간산 순례길이 한층 활기를 띠며 즐거워졌다. 최근 들어 여성 풍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특히 양택 등 실용풍수 쪽으로 주부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미리내성지를 아우르는 길격의 산세.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며 특히 북현무의 위용이 우람장중하다.

 

당진의 면천 두견주와 기지시 줄다리기는 문화재로 지정돼 민속문화의 큰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 이곳에 와 길을 물으면 “저 너머 거짐(거의) 다 와 가유” 하는데 4㎞는 더 가야 한다고 한다.

 

저 멀리 송림이 우거진 곳에 솔뫼성지가 보인다. 사방이 넓은 평야지역인데 김 신부 생가 터만 봉긋이 솟아 있다. 현장에 먼저 도착한 이상호씨가 “축좌미향에 술건(戌乾)득수가 을진(乙辰)파로 빠졌으니 좋은 양택지”라고 설명한다.

 

이씨는 원광대 동양학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며 스승의 학맥을 탄탄하게 이어가고 있다. 거봉이 “평야에 이런 자리가 형성되었다는 건 아주 드문 일”이라고 반색한다. 더구나 전방에는 금원수(錦遠水)가 넓은 들녘을 감싸 돌고 있다.

 

“펀펀한 논과 밭에도 과연 명당이 있을까.” 솔뫼성지 내의 올곧은 소나무 밭을 거닐면서 일행들끼리 주고받는 말이다. 뒤에서 듣던 거봉이 질문으로 받아 “그것이 바로 평지풍수”라며 야외강론을 편다. 특히 끝을 알 수 없는 일망무제 평원지역의 중국에서는 보편화된 풍수다.

 

밭이나 논을 뚫고 지나가는 용맥을 천전협(穿田峽)이라 하는데 대개는 농사짓느라 갈아 엎어 눈에 띄기 어렵다. 그러나 쟁기질과 써레질을 한다 해도 쟁기보습 들어가는 깊이가 일정하므로 반드시 높낮이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기 마련이다.

 

한 치만 높아도 산이요, 한 치만 낮으면 물이라 했다. 이 천수협을 과맥(過脈)과 구분할 줄 아는 안목이 제 몫을 하는 풍수라는 것이다.

 

◇안성 미리내성지 경당 안에 있는 김 신부 묘. 찾는 신자들마다 무덤 가슴 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 새카맣게 변했다.

 

또한 강이나 바다의 물길을 건너는 협맥이 있으니 바로 도수협(渡水峽)이다. 물 가운데의 석량(石梁·돌줄기)으로 이어져 섬으로 치받아 오르는 용맥이다. 강화도 거제도 울릉도 등 모든 섬에는 사방에서 솟아오른 도수협이 반드시 있어 이 맥을 기준으로 도서풍수가 이뤄지는 것이다.

 

토맥은 물이 막아서면 멈추지만 석맥은 산과 바다를 자유자재로 관통한다. 청암(靑岩) 중에도 과골(過骨)이면 최길이라 하여 돌 가운데 동아줄처럼 불끈 솟은 돌뼈(石骨)를 말한다.

 

그러고 보니 김 신부의 동상이 서 있는 후룡맥이 은근히 살아 있다. 아파트가 가로막아 얼핏 보아 넘기기 일쑤겠지만 설명을 듣고 나니 찾아 내겠다. 복원된 생가가 옛 집 좌향 그대로인지는 확인할 길 없지만 서북쪽에서 들어온 물길이 남동(동에서 15도) 쪽으로 빠지며 보이질 않는다.

 

밖에서는 평지 같아 보이던 피정의 집과 김 신부 기념관에도 2∼3m의 얕은 구릉으로 표고가 다르다. 안산과 조산이 멀어 조응이야 빠르다 할 수 없겠지만 사신사도 길격으로 저 멀리서 옹위하고 있다. 평야지대 들판에서도 음택과 양택지를 골라 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현장이다.

 

솔뫼성지를 떠나 안성 미리내성지로 향하는 국도에 먹장구름과 황사바람이 막아 선다. 4월 초순인데도 올봄 날씨는 고약하기 이를 데 없다. 봄볕엔 며느리 내놓고 가을볕에 딸 내보낸다 했는데 얼굴이 구릿빛으로 그을려 가고 있다.

 

◇솔뫼의 김 신부 동상 앞에서 평지풍수에 관해 전해 듣는 간산 순례일행. 왼쪽부터 홍루시아, 안영옥, 이리디아, 신데레사로 당진성당 교우들이며 그 옆이 김혁규 선생이다.

 

이곳 미리내에 오면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김 신부의 참혹한 죽음과 안타까운 묘지 사연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사람이 당하는 불행 앞에 네 종교 내 신자가 무엇일 것인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숨이 막혀올 따름이다.

 

생소한 문물이나 종교가 낯선 땅에 뿌리내리고 정착하려면 습합 과정에서 충돌과 고통은 수반되기 마련이다.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는 데도 이차돈의 순교가 뒤따랐다.

 

병자호란(1637년) 후 중국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9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도 천주학 등 서양문물을 도입해 왔다.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그의 독살설은 너무 앞서갔던 서학과 무관치 않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당시는 군신 간의 상하 관계 지배윤리로 왕조체제가 유지되던 절대왕권 시대다. 이런 상황에 천주학은 계급사회를 부정하고 임금과 백성이 평등하다는 논리였으니 먹혀들었을 리 없다. 천주교 신자 이벽이 지은 ‘천주가사’(1779년)에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삼강오륜을 지켜가는 중에도 천주공경이 으뜸”이라는 내용이 있다.

 

문제는 신해박해(1791년) 신유박해(1801년) 을해박해(1815년) 기해박해(1839년)로 이어지는 천주교 탄압이 권력유지 수단으로 악용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조정권력을 장악한 벽파는 서구문화 수입을 공격하고 천주교를 배척하며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했다. 반면 시파는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묵인하는 자세였으며 세자 죽음을 반대했다.

 

◇김 신부 시신을 수습해 와 미리내에 장사지낸 이 빈첸시오 묘. 스승과 제자(이상호·오른쪽) 간의 대화를 듣고만 있어도 옆 사람에게는 큰 학습이다.

 

이 같은 살얼음판 정국에서 김 안드레아는 1845년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정조시대에 이미 1만명을 넘어선 천주교 신자는 왕실까지 파고들어 뿌리내리는 등 무서운 성장세를 보였다. 그는 이미 내려진 체포령에도 불구하고 전교 비밀항로 개설을 위해 백령도 부근을 답사하다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었다.

 

군문효수-. 고종31년(1894) 폐지되기는 했지만 큰 죄를 범한 죄인의 목을 벤 후 장대에 묶어 매달아 군중들을 경계시켰던 사형법이다. 효수를 당한 죄인은 시신조차 수습 못하게 군졸들이 파수를 지켰다. 김대건 신부는 여섯 번에 걸친 혹독한 고문 끝에 선교부와 신부, 교우들에게 전하는 유서를 남긴 후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이후 김 신부는 철종8년(1857) 교황청에서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고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福者品)에 오른 후 1984년 4월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위에 올랐다.

 

◇103인의 성인위를 봉안한 기념성당. 후면의 하전(下殿)이 장관이며 500만 천주교 신자의 영성귀의처다.

 

김 신부가 죽은 지 40일 후 이민식(빈첸시오·1829∼1921)은 시신을 몰래 파내 등에 지고 야음을 틈탄 1주일의 강행군 끝에 고향 선산인 안성의 이곳에 안장하게 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미리내성지는 조성되며 이후 빈첸시오는 자기 선산을 복자기념지로 기증했다. 1928년 세워진 경당 앞에 대리석으로 조영된 김 신부 묘 가슴 부위는 손때가 새카맣게 묻어 있다. 찾는 교우들마다 눈물 흘리며 그 위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하기 때문이다.

 

앞·뒷산이 목(木)체형으로 후룡맥이 대담하게 살아 내려왔다. 경황이 없다고 함부로 쓴 묘 자리가 아니다. 신좌을향에 해(亥)득수, 오(午)파구니 이만 한 자리도 아무나 얻지 못한다는 거봉의 산국(山局) 설명이다. 특히 북현무가 병풍치듯 안온하게 둘러싸여 따사롭기 그지없다. 경당 옆에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이민식의 묘가 나란히 있다.

 

경당 우측 아래에는 한국가톨릭의 103위 성인을 봉안한 거대한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함부로 범접 못 할 위용과 함께 후면의 하전(下殿)이 장관이다. 하전은 장군이 대궐을 지키는 형국이어서 음택이나 양택에서 최고로 꼽는 산세다.

 

뒤를 돌아보니 미리내성지를 둘러싼 동·서·남·북이 흠결 없이 환포되었다.

500만 가톨릭 신자들의 영성귀의처인 솔뫼와 미리내성지가 그냥 있어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세계일보 2007-04-13 10:33]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임인숙과 스랍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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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속에 남을 즐거운 이시간을 위하여
                                                 따뜻한 가족 들과  마음과 마음에
                                                     기쁨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서로 이쁜 사랑들 나누시며
                                               오손도손 행복한 시간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향기남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