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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경영/등소평 생애의 마지막 5년-격정과 청정

향기男 피스톨金 2008. 4. 21. 00:53

 

 

등소평 생애의 마지막 5-격정과 청정


  흑룡강신문

 

1997 2 19일 등소평동지가 세상을 떴다. 세월을 빠르기도 하다. 등소평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난지도 어느새 10년이 된다. 중국 개혁 개방의 총 설계사 등소평은 탁월한 지도력 및 과인한 용기와 모략으로 이 국가를 이끌어 전세계를 진동시킨 전대미문의 변혁을 가동했다. 30년간의 개혁과 개혁을 경과하여 지금 중국은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 왔다. 중국이 평화적으로 궐기하여 일어난것은 최근 전세계가 주목하는 사실로 되였다.

 

등소평 동지가 우리를 떠난 이 10년간 개혁은 그가 개척한 방향으로 계속 전진하여 왔고 중국은 아세아주 금융위기를 극복하였으며 특대홍수와 사스 등 일련의 불리한 인소를 이겨왔다. 중국의 경제는 신속하게 발전하였으며 사회는 안정을 유지하였다.

 

10년간 개혁은 관건시기에 진입했다. 어떻게 복잡한 국면에서 계속 개혁을 추진하며 우리가 어떤 개혁을 실행하여 빈부격차를 축소하고 광범한 민중이 개혁성과를 향유할수 있게하며 어떻게 정치체제 개혁을 추진하는가하는 일련의 난제도 중국이 전진하는 앞길에 놓여 있으며 개혁자들이 심사숙고하고 침착하게 대응할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같은 시대 배경에 처한 우리는 이 기회를 더욱 귀중하게 여기게 된다. 등소평리론의 사상과 정수 및 개혁기백과 모략을 다시 그려보는것을 통해 더 지혜롭고 더 강유력하게 개혁을 종심으로 발전시키고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며 현대화 일로에서 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해야 한다.

 

중화민족이 백년간 불굴의 의지로 추구하여 온 부민강국의 부흥의 길은 완전히 기대할만하다. 등소평 동지 서거 10주년을 기념하여 전국 여러 매체에서 보도한 기사중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 5년간의 생활장면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편집자)   

 

80고령에 재 다시 개혁을 호소

 

1992 1 2일 등소평은 인민대회당 118대청에서 ‘계획과 건강’컵 로동지들의 브리지(橋牌) 시합에 참가했다. 이 시합은 등소평이 1984년에 발기하여 조직된것이다. 시합결과 등소평이 관군을 획득했다. 대회에서는 등소평에게 ‘브리지대사’란 칭호를 수여했다.

 

직업 브리지의 6개 기술등급중에서 이 등급은 세번째 등급에 든다. 대청에는 희희락락 즐거움과 쾌락이 넘쳐 흘렀다. 소련 국기가 해체되면서 중국에 가져다 준 음영이 많이 사라졌다. 등소평은 이 때 88살이였으나 신체는 여전히 건강했다.

 

반달이후 그는 남방으로 달리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중국  력사발전은 라선형처럼 변혁의 발구름이 순탄한것만은 아니였다. 진보는 자주 역전에 봉착하게 되였다. 등소평은 이 력사의 매듭을 풀려고 작심했다. 그는 중국 개혁정책을 영구적인것으로 고착시키려고 마음을 잡은것이다. 적어도 백년을 변하지 않도록 하려고 했다.

 

이번 격정이 넘쳐 흐르는 개인 려행은 중국의 ‘활력’을 회복시켰다. 당시 등소평의 강렬한 개혁결심은 사람들의 맘을 가동시켰다. 심수를 떠날때 그는 심수 시민들앞에서 심수시위서기에게 ‘당신들은 다른 곳보다 좀 더 빨리 진행하십시요’라고 부탁했다.

 

이와같은 담론풍격은 등소평 과거의 별명을 련상시키게 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학습할때 변론에 능한그를 두고 동창들은 그에게 ‘기관총’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지난 세기 70년대 그는 ‘강철공사’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러나 정년 휴양한후 그의 강경한 일면을 보지 못했다.

 

당시 보통 민중의 인상과는 달리 등소평은 남방순방의 ‘목표’는 개혁을 가속화하는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개혁을 담보하는것이였다.

 

텔레비전에서 녀자체조를 하는 어린 운동원을 볼때 등소평 자주 ‘침착하고 또 침착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방면에서 그는 아주 걸출한 대표자이다. 개혁론쟁이 가장 격렬하던 1991년 그는 아무런 기색을 보여주지 않았다. 1992년 그는 회색 목태를 목에 감고 려행을 시작했다.

 

등소평의 과거 일화와 마찬가지로 이번 려행도 경쾌한 색채를 띄였다. 심수 선호식물원에서 그는 처음으로 ‘발재수(發財樹)’를 보았다. 그는 그 나무를 보고 “전국인민들이 다 이 나무를 심으면 좋겠소. 전국 인민들이 다 부자로 되게 말이요.”라고 말했다.

 

그는 심수의 고층 건물위에 올라 향항을 바라 보았다. 주해에서 등산할때 경위원은 등소평에게 원래 등산길을 따라 하산할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등소평은 원래 등산길을 선택한것이 아니라 새길을 선택했다. 그는 “나는 되돌아 가는 법이 없소”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경위원의 건의에 대답했다.

 

심수, 주해, 광주와 상해에서 그는 가는 곳마다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해 말했다. 자본주의도 계획경제가 있고 사회주의도 시장경제가 있다는 말을 여러번 강조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된 말은 “중국은 우경에 경각성을 높여야 한다. 그러나 주로 좌경을 방지하는것이다.”는 경구다.

 

이번 려행은 비밀리에 진행햇다. 향항의 매체에서 일정한 보도를 진행하긴 했지만 등소평 본인은 신화사에서 자기의 려행소식을 내는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3월 상순이 되여 중공중앙 정치국에서 련속 이틀간이나 회의를 개최하여 등소평의 남방순찰시의 담화를 학습했다. 개혁개방을 계속할것인가? 계속할뿐만 아니라 이를 다시 제창하고 강화해야 한다는것이 그 기본정신이다..

 

이해 6 9일 국가 주석 강택민이 내부회의 연설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개념을 제출했다. 등소평은 이 개념을 정식으로 사용할것을 동의했으며 그해에 소집하는 중공 14차 대표대회에서 이 개념을 도입할것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14차 당대표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체제’란 제기법을 더 선명히 개혁성을 띈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대치했다.

 

1979년 등소평의 초상이 두번째로 ‘시대’주간 앞페지에 나타났다. 그 잡지는 “인구가 십몇억이나 되는 민족이 아주 짧은 시간에 180도의 대 전향이 있게 된것은 무엇때문인가? 이는 마치 항공모함을 10전짜라 엽전에서 돌리는것과 마찬가지다.”라는 설명문을 달았다.

 

(1979년 등소평의 얼굴 사진이 ‘시대’주간 앞표지에 실렸다. ‘시대’잡지는 “인구가 십몇억을 되는 민족이 아주 짧은 시일내에 180도의 전향이 있게 된것은 무엇때문인가? 마치 항공모함을 십전짜리 엽전에서 돌리는것과 마찬가지다.”라는 문안을 썼다.

 

1992년 등소평의 남방 순찰시의 사진이 또 다시 ‘시대’ 앞표지에 실렸다. 문장은 ‘항공모함’이 13년간에 두번이나 돌고 돌았다고 적었다. 당시 88살인 등소평은 중국을 전면개방과 시장경제의 궤도로 오르도록 결정적으로 추진했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불세출의 령수는 특수한 사명을 완수한 후 점차 력사무대에서 물러났고 조용히 평범하게 인생의 마지막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 새로운 규칙과 질서 역시 점차 정식으로 가동되였다.)

 

“나는 이미 답장을 바쳤다”

 

“한국가의 운명이 한 두사람의 명망에 걸려 있다면 그것은 건강하지 못한것이며 아주 위험한것이다.” 등소평은 1898 6 16일 담화중에 이 말을 했다. 1992년에 위험은 그러나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잡은 키가 ‘제대로 방향’을 잡은것이다.

 

14차 당대표대회을 마칠때 그의 딸 등용이 그를 부축하여 인민대회당으로 와서 대표대회에서 새로 당선된 중앙정치국 위원을 접견했다. 이것은 등소평 일생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공공장소에 나타난 중요한 한차례 행사다. 이로서 그의 “계획’”은 기본상 결속되였다.

 

그는 진정으로 평민백성으로 돌아왔다. ‘남방순찰’시 상해에서 보여준 모습처럼 진정한 평민백성으로 돌아온것이다. 그날은 정월 대보름이였다. 그는 거리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려 했다. 신변 일군이 그에게 상해 제1백화상점을 선택해 주었다. 그는 오방국한테서 10원을 꾸어 손자벌이 되는 맹맹과 양양에게 연필과 고무지우개를 사주었다.

 

그는 평민백성이 되여 매대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물건을 사는것이 아주 재미있다고 말했다. 숙소로 돌아오자  등림이 “오늘 상점에서 무엇을 보앗습니까?”라고 물었다.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후에는 상점에 가지 말아야 하겠다. 괜히 백성들을 요란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라고 대답했다.

 

그해 여름 그는 마지막으로 바다에서 수영했다. 북대하에서 그는 8번이나 바다 물에 들어가 번마다 45분 가령 수영했다. 이 해 8월 중국은 한국과 수교하였다. 중국은 이미 등소평이 주장하는 실사구시의 궤도를 따라 국제 사무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어느 한 정치학 교수는 근대 중국을 총화하면서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등소평?손중산을 포함한 중국 령도인들은 다 중국에서 현대화를 실현하여 외래 제국주의의 공제에서 해방하려 했다.”라고 서술했다. 등소평은 주은래와 함께 ‘네가지 현대화’원칙을 기획하여 중국을 강대한 공업화국가로 건설할것을 추구하여 왔다.

 

그후 개혁개방이후 그는 목표를 조절하여 아주 실제적인 ‘초요사회’를 건설하는것으로 항선을 교정했다. 그는 이미 책임을 다했다. 1993년초 그는 중공의 차기 령도집체에 “중국에 대한 책민문제에 한해 나는 이미 답장을 다 바친 사람이다. 이제부터 당신들이 잘 해야 한다’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미국과 거래하는 책임이 이렇게 새로운 령도자들의 두 어깨에 놓이게 되였다. 중국은 미국을 첫 패권자로 인정하였으며 또한 독재자라고 인정하였다. ‘은하호 사건’은 당시 중미 관계의 관건이였다.

 

미국은 은하호 중국 화물선에 화학무기를 제조하는 원료를 상재했다고 의심하면서 이 원료를 이란에 실어다 준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지도를 받은 사르트 아랍인들이 일주간 782개 짐을 검사하고 난 다음 미국인은 아무런 수확도 거둔것이 없이 화학제품이 없다는 성명에 사인을 하는수밖에 없었다.

 

1993년 중국 국가 주석 강택민이 미국을 방문하여 아세아 태평양경제합작조직회의에 참석하게 되였다. 분석가들은 클린턴이 강택민을 접견할때 쌍방이 기대한것처럼 그렇게 열정적이 되지 못할것이라고 분석했다. 강택민이 클린턴에게 상해에서 제조한 쌕스봉을 선물하면서 자기가 얼후(二胡)를 연주할것이니 함께 2중주를 합주하자고 건의했다.

 

이 제의는 번역의 잘못으로 초래된것이다. 클린턴은 어쩔바를 몰랐다. 그러나 등소평이 1976년에 보여준것처럼 중국 령도자가 세계 제1강국에 암시하여 준것은 분명한것이다. 즉 너무 긴장할것이 없이 음악이나 듣는것이 좋을것이다라는 뜻이다. 후에 소집된 기자 간담회에서 클린턴은 “우리는 이미 대화를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이 시기는 형세가 호전하는 시기이며 또한 별로 순리롭지 못한 시기이기도 했다. 전국의 통화팽창률은 경제가 폭발적인 팽창함과 더불어 22%에 달했다. 부동산투자가 흥성하기 시작하여 대 도시의 총화팽창률은 소도시보다 더 높았다.

 

민생이 국가 정책의 중점으로 되였다. 중국의 령도자들은 부동한 장소에서 여러번이나 같은 속담말을 중복했다. “백성들이 방문을 열면 7가지 생활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백성들은 땔나무, , 기름, 소금, 간장(된장), 식초와 차라는 생필품 7가지를 떠날수 없다.

 

1994 10 1일북경 조어대 국빈관에서 등소평은 수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승용차에서 내린다음 다시 밀차에 앉았다. 그는 국경 불꽃을 관람한 다음 생전에 마지막 공개발표한 사진을 남겼다. 당시 그는 이미 90살 고령이였다. 그의 피부는 나무껍질처럼 투덜투덜해졌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두뇌를 사소한 잡일에 국한되여 있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중국을 개변했다---강택민전’의 작자는 아래와같이 묘사하고 있다. ‘비록 사진에 보이는 등소평은 어딘가 감각이 무디고 로쇄해 보이지만 동사자들과 담화를 나누는것을 보면 그의 두뇌는 아주 명석하고 원견이 있었다.

 

국제 여론도 중국의 새로운 령도층은 ‘과도성’이라고 평가하면서 등소평이 이 불확정성을 제거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평가했다.

 

그 날 밤 등소평은 일생중에서 마지막이 되는 영향력이 아주 큰 문장을 발표했다. 그는 국경 만회에 출석한 박일파에게 위탁하여 축사를 대독하게 했다. 축사중 중앙정치국 성원과 전체 중공 당원에게 “강택민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 주위에 긴밀하게 단합하여 한다”라고 요구했다.

 

그 때로부터 등소평은 공개장소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국가 책임을 새로운 령도층에 인수인계하는 작업이 끝났다,. 그는 마지막 인수인계 작업을 아무런 소문도 내지않고 아주 조용히 완성했다.

 

이것은 마치 그가 프랑스 뢰노공사에서 반공반독하는 어느 오후 자기가 쓰던 공구를 잘 처리한 다음 아무런 소문도 없이 조용히 퇴근하던것과 같았다. 국경 불꽃이 북경의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었다. 등소평은 중국 개혁개방에 새로운 유전자 요소를 주입했다. 차후에 중국에서 발생한 모든 변화에는 그의 영향이 깃들어 있다.

 

생애 마지막의 청정함

 

북경 경산후가의 미량고 골목거리 3호에 검은 벽돌에 회색 기와를 이은 집에 록음이 흘러 넘치는 뜨락이 있다. 이 곳에서 살고 있는 등소평은 국가를 위한 일에 더는 참여하지 않고 만년을 보냈다.

 

신화사 보도중에 이 뜨락은 자연계의 생기가 넘치는 곳이라고 쓰고 있다. “석류과일이 주렁 주렁 달렸고 층층 록음이 맑고 밝은 2층 집을 가리고 있다. 뜨락 복판에 작은 련꽃 못이 있다. 여름의 련꽃이 찬란하게 피였다. 못 중앙의 태호석을 타고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으며 반공에 흐느적이는 나무 가지에는 간혹 메미가 울고 있었다.

 

이 기간 등소평의 신체는 이미 많이 쇄약하게 되였다.

이 해 미래 향항 특별행정구에 관한 문제를 토론하는 예비회의에서 강택민과 동건화가 단독으로 악수했다. 기실 등소평시대에 향항 회귀를 위해 기초를 잘 닦아 놓았다. 1985년 동건화의 ‘동방회외’기업이 곽영동과 중국 정부의 1.2억 달러에 달하는 대출금을 받아 곤경을 타개했다.

 

만년의 등소평은 취침전에 꼭 무협소설을 읽는것으로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의 인상과는 상반되게 평가했다. “무협소설의 가장 좋은 점은 다음에 또 읽을수 있게 쓴것이다. 깊이 생각하고 읽을 필요가 없다.” 이는 등소평이 등용에게 한 무협소설에 관한 평가다.

 

등소평 생애의 마지막 3년간의 내용은 ‘등소평년보’중 8쪽밖에 안된다. 일단 국가를 위해 일을 하지 않기로 한 이상 등소평의 생활은 아주 평범하고 별로 기이한 내용이 없다. 등림은 텔레비전 기록편으로 ‘등소평의 하루’라는 내용을 찍으려고 했는데 몇번이나 겨루어 보았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고 소개했다.

 

등소평의 일상생활이 너무 규칙적이며 평범해서 별로 남길만한 장면이 없었다는것이다. “희극적인 장면을 찾고 아주 재미가 있는 장면을 고르려고 했지만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몇번이나 실험해보았지만 종내 성사하지 못했다”고 이실직고했다.

 

등소평은 그 때 여전히 담배를 피웠다. 그 해 12 22일 페부가 감염되여 중국인민해방군 총의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이듬해 2 7일에 퇴원했다.

 

미국 한 방송공사의 주최자 메크 화래이스가 발견한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담배 려과부분이 담배부분보다 긴 특제 담배를 피웠다. 이전에 저명한 기자 파라치의 취재를 받을때 등소평은 담배를 피웠으며 가래통을 썼다. 파라치는 등소평에 대한 인상이 아주 좋았다. 적지않은 외국 원수들이 그녀의 취재를 받을 때 아주 례모가 바르고 웃음을 띈 모습이였지만 별로 그녀의 호감을 사지 못했다.

 

“그는 아주 ?예하고 심각한 문제도 접수했다.” 천기침이 등소평의 취재정황을 회억하면서 기자에게 들려준 말이다. 원래 규정한데 의하면 취재는 한차례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취재가 끝나자 등소평은 이탈리아의 녀기자가 제출한 문제가 아주 첨예하고 심각하다면서 주동적으로 취재를 한번 더 접수하겠다고 말했다. 파라치는 북경반점에서 취재원고를 정리할때 등소평의 말투를 그대로 살려 수록한 다음 원고를 전송했다.

 

각종 도전적인 문제를 통해  등소평의 관한 더 진실한 기억을 세계에 남겨 주었다. 1970년대 등소평이 미국 대통령 카터와 회담을 결속지을 때 누군가 등소평에게 “우리가 당시 관계 정상화를 추진할때 중국 국내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는가?” 라는 물음을 올렸다.

 

등소평은 “있다”라고 결론부터 대답했다. 카터 등 장내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이 말을 해석하는가 숨을 죽여 기다렸다. 등소평은 약간 숨을 돌린 다음 “중국의 한 개 성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 성은 바로 대만성이다.”라고 꼬리를 달았다.

 

등소평의 일생은 인류의 상식은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것을 증명했다. 례하면 사람들은 해학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생활중에서 매력이 있는 사람이 매력있는 령도자로 될수 있고 평범한 사람은 그가 어떤 요직에 있더라도 그저 평범할뿐이다.

 

1996 12 22일 등소평은  병이 도져 또 다시 행방군총의원에 입원했다. 이 때 그의 생명은 최후의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다 하지 못한 사업은 아직도 많고 많았다. 적은 것은 중국의 축구문제요, 큰것은 정체체제 개혁이다.

 

병원에서 텔레비전 특별제목 ‘등소평’이란 기록편을 보앗다. 해방군총의원의 간호사들은 후에 등소평이 자기에 관한 종목을 볼때 얼굴이 붉어졌다고 피로했다.

 

두 달후 등소평이 서거했다. 등소평 본인이 개인숭배를 제거하는 방면에서 아주 성공한 현 시점에서 사람들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나는것을 평정하게 접수했다. 그해 여름 중국 정부는 향항의 주권을 행사하는것을 회복했다.

 

많은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등소평의 거처에 울창한 록음을 자랑하는 청송과 칡덩굴, 해당화와 앵두의 싱싱함을 잊지 않을것이다. 여기서 위대하면서도 평범한 한 로인이 일생의 마지막 5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리해붕

 

 

 

 

     

Liszt - Hungarian Rhapsody No.2
 Franz liszt (1811~18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