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Travel)이야기들/재밋는 유럽여행

도시전체가 살아있는 건축물

향기男 피스톨金 2005. 11. 28. 12:35

도시 전체가 살아 있는 건축박물관'

 

 

 


절제의 美學과 근대성 보여준 루스 하웃에서
현대건축의 대명사 '코플 힘멜블라우' 작품까지
각양각색 아파트
쓰레기소각장도 거대한 예술작품

영국 DK사가 펴낸 288쪽짜리 빈 여행안내서의 표지에는 뮤지엄, 오페라, 궁전과 함께 ‘건축물’이 나온다. 또 빈 시가 만든 안내 브로셔에는 아예 ‘아키텍투르(Architektur)’가 따로 있다. 음악과 미술의 도시로 알려진 빈은 사실은 건축의 도시이기도 하다.

빈 건축기행은 빈의 한복판 호프부르크 왕궁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600년 이상 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힘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 호프부르크 왕궁이다. 10개의 건물로 이뤄진 왕궁은 고딕, 르네상스, 로마네스크, 바로크 그리고 19세기 말의 역사주의까지 다양한 양식을 보여준다. 이 건물들은 지금은 박물관, 미술관 등으로 쓰인다.

빈을 ‘건축의 도시’로 느끼려면 먼저 합스부르크 제국의 궁전들을 눈에 익혀야 한다. 헬덴광장에서 화려한 장식의 궁전을 감상하며 왕궁을 벗어나면 자그마한 원형 광장이 나타난다. 미카엘 광장이다. 이곳에는 주변의 건물군과 전혀 다른 건축물이 서있다. 루스 하우스다. 아돌프 루스(Adolf Loos·1870~1933)가 1911년에 완공한 주상복합건물인 루스 하우스는 “20세기 건축의 역사를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듣는다.

빈공대 출신의 건축가 아돌프 루스는 미국에서 3년간 기능주의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아돌프 루스가 호프부르크 왕궁의 코앞에 어떤 장식도 거부한 건물을 세웠을 때 여론은 들끓었다. ‘눈썹 없는 건물’ ‘맨홀 뚜껑 같은 건물’ 등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밋밋한 주상복합건물은 화려한 장식을 좋아한 왕세자 프란츠 페르디난드를 분노케 했을 뿐 아니라 과거의 양식에 익숙해 있던 빈 사람에게도 충격을 던졌다.

나는 루스 하우스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러다 눈을 돌려 호프부르크 왕궁과 그 주변 건물을 바라보았다. 순간 방금 전까지 내가 감탄해 마지않던 그 찬란한 장식의 건물들이 돌연 값싸고 천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창문과 지붕의 요란한 장식은 돌연 소란스러움으로 변했다. 대륙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섬이 된다는 것, 즉 고립을 자초한다는 게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고 고통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위대한 예술의 창조는 주류(主流)에 역류하고 유행(流行)에 역행할 때만이 비로소 가능하다는 진리를 루스 하우스는 말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빈 도심에서는 더 이상 아돌프 루스의 작품을 만날 수가 없다. 시내에 땅을 갖고 있던 귀족과 전통적인 부자들은 주류에 반기를 든 아돌프 루스를 싫어했고 그에게 더 이상 건축설계를 의뢰하지 않았다. 아돌프 루스의 건축은 빈 교외에 자리잡은 신흥 부자들이 선호했다.

루스 하우스는 침묵과 절제의 아름다움을 대변한다. ‘치장이 지나치면 아름다움은 소멸되고 만다’는 평범한 진리와 선각자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나는 미카엘 광장에서 오감으로 체득했다. “아돌프 루스는 미카엘 광장에 건축을 세운 것이 아니라 철학을 세웠다”고 말한 당대의 지성 칼 크라우스는 옳았다.

 

시내 곳곳에 오토 바그너 작품

아돌프 루스와 함께 20세기 건축을 선도한 이는 오토 바그너(Otto Wagner·1841~1918)였다. 그는 아돌프 루스의 스승이다. 그는 역사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하는 건축가다. 그의 작품들은 시내에 박물관, 도나우 운하, 셋집, 저택, 은행, 역사(驛舍), 학교 등으로 남아 있다. 도심 기워크 커흐 광장에 서있는 우체국 은행은 오토 와그너의 작품 중 아름다움과 기능성 두 가지 면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으로 평가받는다.

우체국 은행 건물 정면의 다섯 개의 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공공건물의 경우 대개 정문이 하나다. 그 건물에 들어가는 시민은 종종 기가 죽곤 한다. 그런데 오토 바그너는 1906년에 시민들이 다섯 개의 문으로 동시에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게 만들었다. 1906년이면 여전히 봉건주의 잔재가 완강하게 남아있을 때다. 그런데 오토 바그너는 우체국 은행에서 ‘정문은 하나’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정문을 다섯 개로 만들었다. 건축평론가들은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라고 평가한다. 놀라운 진보적 사고가 아닐 수 없다. 현재는 다섯 개의 출입구 중 세 개만 쓰고 있었지만 내부에서 보니 출입구 다섯 개가 갖는 의미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유럽 분리파 운동의 중심지

19세기 말 ‘세기말의 위기’에 직면한 유럽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는 아르 누보, 네덜란드에서는 유겐트스틸,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분리파(Secession:세세션)가 각각 일어났다. ‘그 시대에 그 예술을, 그 예술에 그 자유를’을 모토로 내건 분리파 운동은 빈이 중심지가 된다. 20세기 초의 빈은 지성이 폭발하는 시대였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극작가 칼 크라우스 등이 빈에서 활동하며 그들의 시대를 열었다.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건축가 오토 바그너, 아돌프 루스는 혁명적인 새로운 예술 스타일을 창조했다.

1898년 빈 중심가에 조셉 마리아 올브리흐가 설계한 분리파 빌딩이 들어섰다. 분리파 빌딩은 돔에 황금색 세공양식을 입혔다고 해서 ‘황금색 양배추 빌딩’으로도 불린다. 분리파 빌딩에서 1902년 빈 분리파 운동의 회장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연작벽화 ‘베토벤 프리체’가 전시되었다. 빈 분리파 운동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빈 분리파는 근대적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귀족적인 장식 취미를 밑바닥에 깔고 참신한 디자인에 의하여 과거로부터 분리하려고 했다. 즉 디자인의 모티브를 그리스·로마 신화가 아닌 자연에서 찾고자 했다. 해바라기 문양, 황금 잎사귀 문양 등이 당시 유행한 오토 바그너의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빈 분리파는 무장식주의를 제창한 루스의 공격을 받고 10여년 만에 그 수명을 다하게 된다.

오토 바그너는 교외에 여러 채의 빌라를 설계했는데, 그 중 빈 숲 초입에 있는 빌라 두 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원시림이 우거진 빈 숲으로 가는 길이 휴텔버그가(街)다. 이정표에 ‘오토 바그너 빌라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따로 붙어있으니 놓치기도 힘들다. 빌라는 이정표에서 1㎞ 정도 거리에 있다.

첫 번째 만나는 빌라는 1888년에 세워졌다. 현재는 개인박물관으로 쓰이는 이 빌라는 역사주의와는 다른 장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빌라를 지나 20여m 걸으면 또다른 바그너의 빌라를 만난다. 1913년에 세워진 빌라다. 벽면 장식을 극도로 절제했다. 불과 20여m 거리를 걸으며 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넘어가는 시기에 위대한 건축가의 사유와 철학을 한눈에 읽을 수 있었다.

이제 1920~1930년대 건축을 만나보자.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칼 막스 호프’를 만나기 위해 시내 중심가에서 지하철 U4를 타고 하일리겐슈타트역으로 향했다. U4의 종점이 하일리겐슈타트역이다. 빈의 블루칼라 계층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 건축가 칼 엔은 1930년 공동주택 ‘칼 막스 호프’를 세웠다. 칼 엔은 오토 바그너의 제자다. ‘칼 막스 호프’는 역사를 나오자마자 정면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어 자칫 지나치기 쉽다.

1920~1934년의 빈은 사회주의 사상이 만연해 있었다. 비록 보수적 가톨릭이 지배권력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사회주의 사상은 시가지 구석구석에 퍼져들어갔다. 이 시기를 가리켜 ‘레드 빈’으로 부른다. 이 공동주택은 1919년 이후 15년간 빈에 인구가 6만3000명이상 늘어나자 이들을 위해 도시주택개발 정책에 따라 지어졌다. 7층짜리 아파트 아래로 아치형 통로가 있는데 이곳에 ‘칼 막스 호프’의 슬픈 역사를 독일어로 간단하게 기록해두었다. ‘1938~1939년 사이에 이곳에 살았던 66가구가 나치에 의해 끌려가 홀로코스트(대학살)에 희생이 되었다.’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직후 나치는 유대계 사회주의자를 소탕했고 ‘칼 막스 호프’에서 최대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오스트리아는 2차대전 종전과 함께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공동점령하에 있다가 1955년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한다. 빈의 건축은 재건기(1945~1969)를 거쳐 1970~1980년대로 진입하게 된다.

귄터 도메닉이 설계한 화호리튼가(街)의 오스트리아은행 지점 건물을 찾아나섰다. 지하철 U1을 타고 케플러역에 내리면 바로 오스트리아은행 지점 건물이 나타났다. 1979년에 완공된 이 귄터 도메닉의 작품은 마치 갑각류가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출입구는 갑각류의 입과 같다. 귄터 도메닉의 작품으로 인해 변두리의 평범한 화호리튼가는 이목을 집중시켰고 건물 앞은 자연스럽게 만남의 장소로 자리잡았다.

빈 건축의 전성기작 ‘우노 시티’

1970~1980년대는 빈 건축이 예술적 창의성을 활짝 꽃피운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일명 ‘우노시티(Uno City)’라고 불리는 빈 인터내셔널 센터가 도나우강 연변에 슈타베르의 설계로 완공된 게 1979년이었다. 우노 시티는 강과 하늘과 기막히게 어우러져 평화로운 한 폭의 풍경화 같다. 우노 시티에는 유엔기관을 유치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현재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유엔공업개발기구(UNIDO), 팔레스타인 난민기구, 석유수출국기구(OPEC), 마약위원회, 국제인권문제연구소, 국제상법거래위원회 등이 입주해있다. 우노시티 건설로 빈은 뉴욕, 제네바에 이어 ‘제3의 유엔도시’로 부상했다. 우노시티에 많은 유엔기구가 들어온 것은 10억달러의 건축비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정부가 정책적으로 임대료를 거의 받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안내 브로셔가 아니더라도 빈 관광안내 책자에 반드시 등장하는 건물이 화가 겸 건축가 프리덴스리히 훈데르트바서의 ‘훈데르트바서 공동주택’이다. 훈데르트바서 공동주택은 도심 한복판에 있어 찾기가 쉽다. 동네 어귀에는 친절하게 그 곳으로 가는 안내판이 블록마다 붙어있다.

훈데르트바서가 아파트를 지은 곳은 뤼벤가와 케겔가가 만나는 모서리의 비좁은 골목길이다. 이른 아침 ‘훈데르트바서 아파트’ 앞에 섰다. 울긋불긋한 색상, 삐뚤빼뚤한 선, 집집마다 다른 창문과 발코니, 지붕에 조성된 숲, 양파 모양의 돔 등을 보면서 건물을 이렇게도 지을 수가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파트에서는 직선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고보니 공동주택의 가가호호가 반드시 직선일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훈데르트바서는 1985년 ‘현대건축에는 영혼이 실종되었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에 충격을 가하기 위해 이 아파트를 설계했다. 이 아파트 앞의 인도조차 평평하지 않다. 포석(鋪石)이 기둥을 따라 마치 봉분처럼 융기되어 있다. 훈데르트바서의 아파트는 처음 건설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주요한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그러는 사이 이 건물은 빈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은 빈 시가지 여러 곳에 있다. 미술관과 문화공간으로 사용하는 쿤스트하우스, 쓰레기소각장 슈피겔라우 등이 대표적이다. 빈 국제공항에 늦은 밤에 도착하면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아름다운 구조물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 보는 사람은 무슨 놀이공원의 탑이 아닐까 궁금하게 생각한다. 훈데르트바서가 설계한 쓰레기소각장 슈피겔라우다. 이 쓰레기소각장은 낮에 보면 건물의 용도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기발하게 설계되어 있다. 건축의 도시 빈에 오면 쓰레기소각장도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MQ의 현대미술관도 예술

빈 도심에 있는 뮤지엄쿼티에르(MQ)도 발길을 오랫동안 머물게 하는 곳이다. 레오폴드 미술관과 현대미술관도 빈이 자랑하는 건축물이다. 레오폴드 미술관에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한 아르 누보 계열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뮤지엄쿼티에르는 1990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2001년에 완공되었다. 빈건축센터도 MQ안에 있다. 세계적인 건축·디자인연구소 ‘코프 힘멜블라우’의 작품도 빈에 있다. ‘코프 힘멜블라우’는 빈공대 출신의 오스트리아 건축가 볼프 D 프릭스가 1968년도에 설립했다. ‘코프 힘멜블라우’는 1998년 독일 드레스덴에 세운 우파(Ufa)영화센터로 유명하다. 쓰러질 듯 비스듬하게 서 있는 우파영화센터.

빈에서 지하철 U3를 타고 시머링 방향으로 가다 가소메타역에서 내리면 ‘코프 힘멜블라우’를 만날 수 있다. 역사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기울어진 건물이 나타난다. 가소메타 아파트단지다. 이 건물은 그 옆의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을 향해 기울어져 올라가다가 옥상 부근에서 창공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 있다. 올드와 첨단의 절묘한 조화. ‘코프 힘멜블라우’는 장 누벨 등과 컨소시엄으로 2001년 이 건물을 지었다.

유명 건축물이 아니더라도 빈 시내에는 변두리의 평범한 아파트조차도 똑같은 게 하나도 없다. 세계적 호텔 체인인 인터컨티넨탈호텔도 이곳에 오면 모양과 기능에서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빈 시가지를 걸으면 머리가 맑아진다. 도시의 명예를 지키려는 건축가와 건축주의 위의(威儀)와 교양이 건축물에 배어있기 때문이리라.

=글·사진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 (mapl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