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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투루판 베제클리크(柏孜克里克) 석굴은 아름답게 장식한 집’…문명 파괴의 증언장

향기男 피스톨金 2006. 1. 8. 11:52

 

 중국 투루판 베제클리크(柏孜克里克) 석굴은

 

             아름답게 장식한 집’…

 

             문명 파괴의 증언장


[한겨레]


 

문명 탐사를 다니다 보면 자주 파괴된 유물·유적과 맞닥뜨리게 된다. 풍화나 지진 등에 따른 자연적 파괴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 일부러 자행한 유물 파괴는 반문명적 작태로서 ‘반달리즘’,

 

즉 문명파괴 행위라고 한다. 그런데 파괴자들은 얄궂게도 ‘구제’ ‘보존’ ‘보편적 가치’니 하는 감언이설로 자신들의 범죄를 감싸면서 사죄는커녕 편취해 간 유물들마저도 돌려주지 않으려고 갖은 앙탈을 부린다.

 

유적 분포밀도에서 단연 손꼽히는 투르판은 문명파괴 행위의 처절한 증언장이다. 그 중에서도 베제클리크(柏孜克里克) 석굴은 가장 극명한 현장이다.

 

석굴은 불꽃처럼 산세가 천변만화하는 투르판 외곽의 화염산을 끼고 30분쯤 달려가야 나온다. 산기슭을 가로 질러 무르툭(목두구·木頭溝) 계곡에 이르면 푸르죽죽한 나무로 뒤덮인 계곡 한복판에 물이 흐르고, 멀리 텐산산맥의 만년설이 한눈에 안겨오는 풍경과 만나게 된다.

 

 깎아지른 듯한 협곡의 서쪽 벼랑 중턱에 벌집처럼 뚫린 굴들이 송송히 보이는데, 바로 위구르 어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란 뜻의 베제클리크 석굴이다.

 

 

불상은 온데간데 없고 벽화 속 불상의 눈은 몽땅 도려내어졌다

 

입구 광장에서 계단을 타고 10여m 내려가니 절벽따라 초승달 모양으로 늘어선 석굴들이 나타난다. 지금껏 발굴된 석굴은 83 개로, 그중 벽화가 일부라도 남은 것은 40여 개뿐이다.

 

굴을 만든 때는 6세기 국씨 고창국시대부터 7세기 당·서주시대를 거쳐 13세기 원나라 때까지인데, 전성기는 10세기를 전후한 회골(回##骨+鳥:위구르) 칸국시대다.

석굴은 파라미어와 서하어, 위구르어 등으로 쓰여진 숱한 불경 사본과 여러 시기에 그려진 천불도를 소장한 불교문화의 보고다. 특히 왕가 전속 사원이 된 회골 칸국시대의 공양상과 경변도(經變圖), 보살도 등은 장엄의 극치를 이룬다.

 


불교문화의 보고…장엄의 극치

 

 

석굴은 마니교 연구자들의 이목을 끌기도 한다. 고비사막 북쪽에 살던 위구르인들은 9세기 중엽 고창(투르판)으로 옮겨와서 신봉하던 마니교를 퍼뜨렸는데, 그 생생한 자취가 여기에 남아 있다.

 

석굴에는 위구르어로 쓴 마니교 경전이 보전되어 있고, 삼신광명수(三身光明樹) 같은 마니교 성수가 그려져 있으며, 마니동상(높이 9㎝)도 발견되었다.

 

그밖에 금동불상(높이 37㎝)과 불탑지, 황동대야, 각종 자기그릇, 어린이 놀이 그림(48굴), 밭에서 소먹이는 그림, 악기 연주도, 용의 비상도, 비천도 등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어 당시 종교 생활상과 교류상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어이없게도 이들 유물 대부분은 제자리에 없고,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 박물관에 뿔뿔이 흩어졌다. 엄격히 말하면, 역사의 현장을 증언하기 위해 후세에 남겨진 참유물(遺物)이 아니라, 무연고지로 흘러가 변조된 ‘유물(流物)’이고 편취된 장물(臟物)일 따름이다.

 

 이제 우리가 둘러본 여섯개 굴에서 그 속내평을 한번 드러내 보자.

처음 들어간 17굴부터 만신창이다. 원래 전면에 커다란 불상이 각각 좌우로 3좌씩 있었는데, 온데간데 없고 광배 자리만 남아 있다.

 

천정 벽화도 거의 뜯겨 벽화 속 불상들의 눈은 몽땅 도려내어졌다. 20굴은 회골 칸국시대 공양상으로 유명한 굴이다. 문으로 들어서면 중앙에 정방형의 중당이 있고, 그 주위에 좁은 회랑이 둘러있는데, 그 좌우벽에 서원을 주제로 한 왕이나 왕후, 귀족들의 공양도가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공양상마다 한문이나 위구르어, 산스그리트어로 방제(榜題: 제사받는 사람의 이름)가 쓰여져 있었는데, 지금은 떼어간 자리들만 휑뎅그레 남아 있다. 독일인 폰 르콕이 20세기 초 뜯어가 독일 베를린 박물관에 두었는데, 이 마저도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상당수가 불타버렸다고 한다.

 

회골 칸국의 후기 동굴벽화에 속하는 27굴은 내용상 앞의 20굴과 비슷하다. 역시 르콕의 분탕질에 걸려 텅 비다시피 되어버렸고 소조불상들의 눈도 성한 데가 없다. 게다가 무지한 현지인들이 청소한답시고 물로 알카리성 황토벽을 씻어내리다 벽이 그만 거무튀튀하게 변색되고 말았다.

 

31굴에는 동벽에 배를 타고 피안으로 가는 석가의 본행경도(本行經圖)와 열반경변도, 공양도가, 불단 정면에는 회골 칸의 공양도가, 서벽에는 복식 세밀도가 그려졌으나 지금은 거지반 없어졌다. 남은 부분은 뜯어가지 못하게끔 흙으로 덧칠해놓았다고 하니 심보가 얼마나 고약한가.

 

벽면 곳곳에 송곳으로 긋거나 갈퀴로 긁은 자국이 역력하고, 지금은 4장의 사진만 떼어간 자리에 오도카니 붙었다. 33굴 뒷벽에는 석가의 열반을 애도하는 그림이 있는데, 아랫 부분은 없어지고 윗 부분만 남아 있다. 그림의 좌측에는 보살과 천룡팔부(天龍八部) 등 호법신들이,

 

우측에는 각국에서 온 100명의 왕자들이 도열해 있다. 왕자들의 눈만은 온전히 남았다. 마지막 굴인 39굴에서도 벽 한채를 아예 통째로 떼어갔는가 하면, 제단 속을 파헤치다가 아무 것도 없으니 그냥 되묻은 흔적도 보였다. 둘러보지 않은 나머지 굴들의 상황도 대채로 대동소이하다고 한다.

 

 

파괴 선봉 독일인 르콕과 반달리즘

 

이처럼 베제클리크 석굴은 2중 3중으로 인위적 파괴를 당했다. 그것도 문명을 외치는 현대인들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그 첫 장본인은 르콕을 비롯한 독일인들이다. 1902년부터 1914년 사이에 독일은 네 차례에 걸쳐 ‘탐험대’란 이름의 도굴꾼들을 투르판에 투입했다.

 

첫 탐험대는 베를린 민속학박물관의 인도부 부장 그룬베델을 대장으로 한 3명이었다. 대무기상 크루프의 막대한 재정지원을 받던 그들이 예비조사에 불과했던 첫 탐험에서 46상자나 되는 유물을 챙겨오자 횡재의 꿈은 부풀었다.

 

급기야 황제와 크루프의 후원을 받는 재단이 설립되고 장기 탐험을 주관할 전문위원회도 만들어졌다.


그룬베델의 건강이 악화되자 위원회는 2차 탐험대장에 르콕을 임명한다. 베를린의 부유한 포도주 판매상 아들로 태어난 르콕은 영국과 미국을 전전하다 베를린 동양언어학원에서 아랍어, 페르시아, 산스크리트어 등의 동양어를 배운다.

 

 마흔 두 살 때 처음 민속박물관에 무보수 견습생으로 채용된다. 그러다가 행운의 기회를 잡은 그는 1904년 9월 투르판으로 향한다. 그의 저서 <사막에 묻힌 중국령 동투르키스탄의 유물들>에는 이때의 행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책을 보면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중국 국경 부근에 도착한 그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러시아 영사의 말을 듣고 금화 1만 2천 루블을 넣은 주머니 위에 앉아 라이플 권총을 한손에 든 채 우루무치까지 간다. 약 두달 뒤인 11월18일 투르판의 카라호자에 도착해 약 4달간 머물면서 베제클리크 석굴을 비롯한 유적지들에서 유물 편취에 몰두한다.

 

베제클리크 석굴 밑 강가와 멀리 토욕구 석굴로 들어가는 어귀에 그가 머물었던 집터가 있다. 그는 10년간 하미에서 카슈가르에 이르는 신장 전역을 샅샅이 누비고 다녔다.

 

‘실크로드의 악마들’ 그리고 홍위병

 

 

르콕을 비롯한 2차 탐험대는 103상자분의 유물을 뜯어갔고, 그후 그룬베델이 합류한 1905~7년의 3차 탐험에서는 128상자의 유물을 또 가져갔다. 르콕은 노획한 ‘기적의 전리품’에 대해 후일 양심의 가책도 없이 덤덤히 ‘성공담’을 회상하고 있다.

 

 “오랜 시간 힘들여 작업한 끝에 벽화를 모두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20개월 걸려 그것들은 무사히 베를린에 도착했다. 벽화들은 박물관의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르콕은 극단적인 문명파괴자였다. 애당초 학자도 탐험가도 아닌 그가 무기상의 재욕(財慾)에 놀아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제클리크 석굴에서 벌어진 르콕의 반달리즘적 행태는 앞다퉈 실크로드 곳곳의 유적을 짓뭉개고 유물을 뜯어간 다른 편취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초반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지의 도굴꾼들이 투르판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일원에서 가져간 유물들은 유럽과 미국의 30여 개 박물관에 지금껏 ‘유물(流物)’로 유폐되어 있다. 그 과정은 낯뜨거운 질투와 모해의 연속이었다.

 

영국의 스타인은 늘 경쟁자들을 조소하면서 독일인들은 ‘항상 떼거리로 사냥하러 다닌다’고 비난했다. 독일과 러시아간에는 유적 발굴을 둘러싸고 무력충돌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래서 영국의 피터 홉커크는 저서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이들 탐험가들을 겨냥해 듣기에는 좀 섬뜩하지만, ‘악마들’이라고 일침한다.


석굴의 수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민간신앙에 현혹된 일부 무슬림들은 불상의 눈을 모든 재앙의 근원인 이른바 흉안(凶眼: 아이눈 랏마)으로 착각한 나머지 통째로 도려내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60~70년대 중국땅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던 홍위병의 난동 또한 문명파괴에 대한 단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 무모한 도굴꾼들과 파괴자들에 의해 뜯기고 찢기어 텅빈 헛간처럼 변한 현실 앞에서 울분과 허탈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되돌렸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오타니 컬렉션’

승려 탐험가 오타니 조선총독부 기증
고양보살상 등 투루판 명품만 600여점

 

 

행인지 불행인지 숱하게 털린 투르판 보물들의 상당수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하 중박)에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물려받은 것인데, 보통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한다.

 

스타인·르콕 등과 더불어 20세기 초 실크로드를 답사했던 일본 승려 오타니 고즈이(1876~1948)와 그의 탐험대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3차례 조사 끝에 수집한 유물들 중 일부다. 오타니는 탐험 뒤 재정난에 시달리자 구하라란 상인에게 유물 일부를 팔았고, 구하라가 1916년 이를 다시 총독부에 기증해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 중앙아시아실에 전시중인 투르판 유물들은 오타니 컬렉션 소장품(1500여 점) 가운데 40%로 가장 많다. 베제클리크, 토욕구 등 석굴 벽화 조각들과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부장품·생활유물들이 주종인데,

 

세계적 수준의 컬렉션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9~12세기 투르판을 지배한 위구르인들의 내세관을 엿볼 수 있는 서원화들과 마니교 관련 회화들의 가치는 지대하다.

 

 서원화는 중앙부의 큼직한 과거불 앞에서 위구르족 상인, 왕 등이 미래 성불하겠다는 서약을 바치는 그림인데, 투르판이 중세 동서교역 중심지로 큰 재력을 쌓으며 번영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베제클리크 15굴에서 절취해온 10~12세기 공양보살상의 경우 열다섯 주제 서원화의 조각 그림인데, 가장 아름다운 서역 보살상으로 첫손꼽힌다. 민병훈 학예관은 “안목 높은 학승들이 교리상 중요한 벽화 모티브를 골라 뜯어왔기 때문에 소장 벽화들은 미술사적 의미가 특출한 명품들”이라고 말한다.

 

아스타나 고분 출토품들은 한인 왕조인 국씨 고창국 시대의 유물들로 묘표,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 직조유물 등 다양한 부장품들을 망라한다. 중국·서역 문화가 지역 특색에 맞게 교류·융합된 양상을 대변하는 기준 유물이란 점이 주목된다.

 

 특히 무덤 천정에 붙였던 중국 신화의 창조신 복희와 여와의 삼베 그림은 채색이나 구도 등이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유명하다. 이밖에 카라호자에서 출토된 13~14세기께의 꽃무늬 바구니도 이후 출토사례가 보고되지 않은 희귀품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우리가 박물관에서 수시로 보는 투르판 유물들 또한 반달리즘의 악몽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유물들 대부분은 오타니 탐험대의 3차 조사 주역인 절집 사무라이(무사) 출신의 요시카와가 보물찾기하듯 털어온 것들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실크로드 답사단

취재 임종업 blitz@hani.co.kr,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김경호 jijae@hani.co.kr,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