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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살아남은 자만이 지날 수 있는 서역개통의 문

향기男 피스톨金 2006. 2. 9. 12:21

 

 

         둔황,살아남은 자만이 지날 수 있는

 

                     서역개통의 문


[한겨레]

둔황을 오아시스 육로의 인후(목구멍)라고 하면, 서역행 길목을 지키는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은 마치 인후에서 갈라지는 식도와 기도의 여닫이 같은 곳이다.

 

이를테면, 옥문관은 투루판을 지나 톈산산맥을 따라 중앙아시아로 뻗는 오아시스 육로의 북도쪽 관문이고 양관은 타클라마칸 사막 언저리에서 쿤룬산맥을 따라 인도 방면으로 이어지는 남도쪽 관문이다.

 

우리 답사길은 북도를 따르는 길이므로 옥문관은 첫 관문인 셈이다.

 

막고굴을 둘러본 뒤 둔황에서 서북쪽으로 90㎞ 떨어진 옥문관으로 직행했다. 반쯤만 포장되고 나머지는 모래, 자갈이 섞인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이어서 1시간 반이나 걸렸다.

 

길가에 앙상하게 가시 돋친 낙타풀만 눈에 띈다. ‘옥문관 관리소’란 팻말 붙은 허름한 흙벽돌집 앞에 차가 멎자,

 

말몰이꾼 네댓명이 몰려와 저마다 자기 말 타고 유적지까지 가라고 법석인다. 원래 유적지는 밟아보는 데 묘미가 있는 터라 ‘말타고 꽃구경’할 수는 없었다.

 

 

우리네 혜초 스님도 백룡퇴에서 살아남아 이 문을 거쳐 갔을 것이다

 

관리소 맞은편에 20평 남짓한 ‘옥문관 박물관’이 있다. 옥문관 인근에서 발견된 죽간(글씨를 쓴 대나무 조각), 비단, 마지, 나무빗 등 유물들을 볼 수 있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옥문관 터임을 입증하는 몇몇 죽간이다.

 

통관증에 해당하는 ‘과소부’(過所符)라고 쓴 죽간이 이채롭다. 박물관을 나온 우리는 사립문 비슷한 문을 열어젖히고 800미터쯤 걸어갔다.

 

지금 남은 관문의 크기는 동서 24m, 남북 26m, 높이 9.7m로 부지면적은 약 630㎡다. 역대 장성의 관문치고는 작은 편이다. 그래서 ‘소방반성’(小方盤城), 즉 네모난 작은 성문이란 속명을 붙였다.

 

북면과 서면에 문이 하나씩 나 있다. 북문은 서북쪽으로 가는 오아시스 육로의 북도로, 서문은 서남쪽으로 뻗은 남도로 출발하는 문이다.

 

원래 옥문관은 ‘옥이 들어오는 문’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옥은, 고대에는 연옥을, 근대에는 경옥을 말한다. 고대 연옥의 주산지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변에 있는 남도의 요지 ‘화기’(호탄)였다.

 

중국은 일찍이 은·주 시대부터 온화함, 투명함, 순수함, 강직함, 공정함의 다섯 덕을 갖췄다는 이 보석을 화기로부터 수입했다.

 

그 수입로의 지킴 구실을 한 곳이 바로 옥문관이다. 당시 월지인들이 옥 교역을 전담했다 해서 ‘옥의 민족’이라고 했으며, 화기를 시발로 하여 옥을 교역한 길을 ‘옥의 길’이라고도 불렀다.

 

사실상 그 길은 오아시스 육로의 남도에 해당한다. 고서에 옥을 가리켜 ‘화씨벽(和氏璧)’이라 한 것은 ‘화씨’, 즉 화기 사람들(월지인)이 캐내는 옥이란 뜻에서 유래했다.

 

 

은주시대부터 ‘옥이 들어오던 문’

 

고대 중국의 사서나 시집, 인도 구법승 등의 여행 기록에는 옥문관에 관한 내용들이 유난히 많다. 위상이 그만큼 높았다는 증거다.

 

기원전 2세기 전한 한무제는 장안 서쪽의 하서회랑을 공략하고 주천군을 설치하면서 가장 서쪽의 변방요새에 ‘옥문관도위’를 설치했다. 그때부터 이 관을 넘는 것을 ‘출새(出塞)’라고 했다.

 

변방을 벗어나 다른 나라로 가거나, 외적을 정벌하러 나간다는 뜻이다. 위진남북조 시대까지만 해도 옥문관은 ‘군영이 즐비하고 거마가 폭주’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수·당대에 이르러 원정 나간 님에게 전하는 ‘따뜻한 봄바람마저도 넘지 못하는 황막한 관문’(春風不度玉門關)으로 변해버렸다.

 

 

더욱이 옥문관을 지나면 ‘악마의 늪’이라는 죽음의 사막 ‘백룡퇴(白龍堆)’가 펼쳐졌다. 400년 인도를 향해 떠난 동진의 고승 법현은 이곳을 지나면서 느낀 바를 〈불국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새도, 달리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망망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 수 없고, 오직 언제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준다.”

 

이 백룡퇴가 얼마나 험악한 곳이었으면 우리 판소리의 ‘열녀춘향수절가’ 중에도 이런 대목이 나올까. 그네를 뛰며 노니는 춘향을 보고 이도령은 마음이 울적하고 정신이 아찔해 “단봉궐 하직하고 백룡퇴 간 연후에 독류청총하였으니 왕소군도 올 리 없고…”라고 중얼거린다.

 

뜻인즉, 중국 전한 때 궁궐을 하직하고 흉노 선우에게 시집간 효원제의 궁녀 왕소군이 외로운 무덤일 수밖에 없는 백룡퇴로 갔으니 돌아올 리 만무한데, 어디서 그녀 같은 절색이 나타났을까라고 춘향의 미색에 놀란다.

 

아무튼 선현들은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악마의 늪’에서 서역 개통이라는 월척을 낚았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우리네 혜초 스님도 들어 있다.

 

오아시스 육로의 북도를 따라 귀로에 오른 스님은 분명 백룡퇴에서 살아남아 옥문관을 거쳐 둔황에 들렀다가 장안으로 발길을 옮겼을 것이다. 그 모습이 지금 막 저 사막 지평선에서 사라져가는 신기루처럼 아련하다.

 


사방에 울타리를 쳐 관문 안에 들어갈 수는 없다. 지형을 좀 살피고 싶어 얼마 떨어진 언덕 위에 서서 사방을 조망했다. 우선 서북쪽으로 5㎞쯤 떨어진 당곡수에 있는 한대 장성이 한눈에 안겨온다.

 

보통 장성 관문은 성곽에 붙어 있는데, 이 옥문관만은 성곽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어 그 진실성이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지형상 부득이했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이 ‘한장성(漢長城)’은 2100여 년 전인 기원전 2세기 초 축조한 것으로서 명대에 산해관에서 가욕관까지 개축된 만리장성보다 무려 1500년 앞서 지은 것이다. 그래서 이 한장성이야말로 만리장성의 원형이라고 한다.

 

그 이름도 진대에는 장성, 한대에는 새원(塞垣), 명대에는 변장(邊墻) 등으로 다르게 불렸거니와 그 축조방법도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둔황 동쪽 안서로부터 서쪽의 로프노르(뤄부포) 호수 부근까지 150여 ㎞에 이르는 ‘둔황장성’은, 당시 서호 일대에 무성한 각종 수초와 모래자갈을 1:4 비율로 엇바꾸어 가면서 쌓는 방법을 썼다.

 

이 한장성의 기단 너비는 3m, 높이는 2.6m나 된다. 아직도 2천년 넘긴 유적답지 않게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판소리 ‘춘향가’에도 나오는 죽음의 늪

 

옥문관 주위로 눈길을 돌리니 걸리는 것은 온통 봉화대뿐이다. 80여 개의 크고 작은 봉화대가 관문을 에워싸고 서 있다. 봉화대 가까이에는 예외없이 움푹 파인 곳이 드러나는데, 봉화용 나무를 수북이 쌓아뒀던 곳이라고 한다.

 

중국의 전쟁사를 살펴보면 봉화제도가 대단히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봉화는 규모에 따라 가장 큰 것은 장(障), 다음은 정(亭), 수(燧) 순이고 가장 작은 것은 봉(烽)이라 한다.

 

그리고 적정에 따라 봉화용 나무 규모도 달랐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죽간 기록에 의하면 적이 50~500명일 때는 나무 한 섶을, 500~1000명일 때는 두 섶을, 3000명 이상일 때는 3~4섶을,

 

만명 이상일 때는 5섶을 태우기로 되어 있었다.

만리장성의 서쪽 끄트머리인 한장성 너머에는 로프노르호로 흘러들어가는 소륵하(疏勒河)가 흰 실오리처럼 늘어서 있다.

 

20년 전만 해도 물이 차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고갈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강바닥에 앙금으로 남은 염분이 햇빛에 반사되어 희게 보인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옥문관 땅도 마찬가지다. 이곳도 소륵하 지류에 의해 형성된 소택지였으나 지금은 완전히 말라버려 희끄무레한 소금기만 번뜩인다.

 

오늘날 황막하기 그지없는 땅이지만, 그 옛날 이곳에는 삶이 약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아름다운 전설들이 전해 오고 있다.

 

권단(權旦)이란 마음 착한 목동이 어느날 옥문관 서남쪽 남대호란 큰 연못에서 옥처럼 아름다운 세 미녀가 무자맥질하는 것을 발견한다. 권단을 본 큰 두 자매는 두 마리 백학이 되어 홀연히 하늘로 날아올랐으나,

 

 막내는 그만 권단에게 날개옷을 빼앗겨 날아오르지 못하고 그와 성혼해 백일을 보낸다. 옥황상제는 엄명으로 막내딸을 불러들인다.

 

모두의 화를 면하기 위해 권단이 감춰둔 날개옷을 꺼내주자 선녀는 피눈물을 흘리며 작별한다. 그 피눈물로 남대호는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실의에 빠진 권단은 속세를 떠나 삭발하고 절에 들어간다.

 

그후 가끔 백학 한 마리가 호반을 배회하며 슬피 울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연못을 옥녀천(玉女泉)이라 부르며 그 애틋한 사연을 전해오고 있다. 우리네 금강산 팔선녀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숱한 전설과 사연 새기며 다시 둔황으로

 

 

지금은 보잘것없는 유적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숱한 이야기 서린 옥문관을 떠난 것은 석양이 뉘엿거릴 무렵이었다. 이것저것 듣고 본 것들을 되새기다 보니 되돌아오는 길은 무료하지 않았다.

 

둔황 시가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 오른편 모래언덕가에 둔황의 고풍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이 보인다.

 

1987년 중-일 합작으로 일본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둔황〉을 영화로 찍을 때 지은 ‘둔황고성’이란 세트장이다. 송대 둔황 성곽과 거리를 재현한 세트장으로 둔황 영상물을 찍을 때면 단골로 등장하며 관광명소로도 인기가 있다고 한다.

 

원래 역사에는 재현이란 없는 법, 그 환각에 빠지기 쉬운 재현의 진정성을 유념해야 한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가장 오래된 오아시스로 남도는 잊혀지고 북도 성황

 

 

실크로드 역사를 접할 때 헷갈리기 쉬운 부분 가운데 하나가 남북도의 개념이다. 톈산 남북도, 서역 남북도, 안서 남북도 등 다양한 남북도가 한나라 이후 옛 사서에 수시로 등장하는 까닭이다.

 

 

서역 남북도는 기원전 1세기 장건이 개척한 가장 오래된 오아시스로다. 중국 실크로드 영역의 대부분인 신장성 타림 분지를 위아래로 관통한다.

 

이 남북도가 타림 분지 북쪽 톈산산맥 남쪽 기슭의 길인 톈산 남로에 모두 포함된다. 톈산 북로는 서역 북도의 길목인 둔황 북쪽의 하미나 투루판에서 다시 북상해 톈산산맥 북쪽 기슭을 거쳐 중앙아시아 카자흐 초원으로 빠지는 길이다.

 

〈한서〉 ‘서역전’을 보면 서역 남북도는 둔황 서쪽의 옥문관·양관을 지나 갈라졌다. 남도는 누란 왕국이 있던 선선을 거쳐 타림 분지 남쪽 둘레를 따라 서행하며 타림 분지의 서남쪽 소도시 사차(야르칸드)에 이른 뒤 총령(파미르 고원)을 넘어 안식국(파르티아:이란)으로 빠진다.

 

북도 역시 옥문관·양관에서 투루판으로 간 뒤 톈산산맥 기슭을 따라 카라샤르, 쿠처, 악쑤, 카슈가르 등의 오아시스 도시로 서행하다 총령을 넘어 중앙아시아의 강거(사마르칸트)로 향한다.

 

티끌 섞인 열풍이 몰아치는 옥문관에서 1000여 년 전 구법승과 대상들은 망망대해 같은 사막을 바라보며 남북으로 흩어졌던 셈이다.

 

서역 남북도는 후대에 희비가 엇갈렸다. 남도는 천축(북인도)으로 빠지는 구법 순례 길목인데다 중국 황실이 애지중지한 옥의 도시 호탄을 중간에 끼고 있어 일찍부터 각광받았다.

 

비단무역도 겸하면서 남도 주변에는 1~5세기 누란, 미란 등의 소왕국들이 번영했다. 20세기 초 스타인, 헤딘 등이 발굴한 요트칸, 단단위릭, 체르첸 유적들의 그리스·로마식 벽화와 공예품·직물, 카로슈티 고문서들은 옛 영화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급속한 사막화와 이민족 침입으로 소왕국들은 7세기 초 몰락하고 남도는 잊혀진 길이 되고 만다.

 

반면 북도는 사막 횡단 거리가 짧아 갈수록 통행이 늘어났다. 1세기 한나라 군대가 둔황 북서쪽 거점 이오(하미)를 점령한 뒤에는 둔황에서 이오로 북상해 서북쪽 투루판에 이르는 새 북도가 개척된다.

 

이에 따라 남북도의 분기점도 둔황 동쪽 안서로 옮겨가고, 옥문관도 출입이 뜸해지게 되었다. 방치된 남도 지역은 이후 토번(티베트)이 차지해 중국 서역 지배의 숨통인 하서회랑을 위협하는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노형석 기자

 


<한겨레> 실크로드 답사단

취재 임종업 blitz@hani.co.kr,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김경호 jijae@hani.co.kr,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한겨레 2006-01-17 04:48]    

 

 

 

                  즐거운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