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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불·모래·바람…그 어떤 세력도 장벽을 넘지 못했다

향기男 피스톨金 2006. 2. 9. 12:27

 

             투루판,   불·모래·바람…

 

       그 어떤 세력도 장벽을 넘지 못했다


[한겨레]

둔황에서 쿠처까지는 기차를 타고 답사하기로 했다. 때문에 둔황 시가에서 차로 두시간쯤 북쪽으로 밤길을 달려 리우위앤 역에 도착했다.

 

신장으로 통하는 유일한 철도 길목이어서 관광객과 행인들로 붐빈다. 표는 예매했지만 출발을 5분 앞두고도 앉을 자리를 배정받지 못했다. 현지 안내원 꿍즈청이 안달복달하며 뛰어 다녀 겨우 좌석을 구했다.

 

그러나 북새통 속에 출발한 기차에서 그는 내리지 못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17시간 남짓한 강행군을 해온 터라 일행 모두 파김치였고, 스물네살 젊음으로 버텨오던 꿍즈청의 눈자위도 움푹 패어 들어갔다.

 

그가 하미역에서 내려 되돌아갈 때까지 세시간 동안 이야기를 계속했다. 순박하고 호기심 많은 젊은이다. 새벽 2시 반, 손을 저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눈 앞에 선하다.

 

 

한여름 낮 평균 50도, 지열 합쳐 83도까지 올라간 적도 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둔황에서 이오(伊吾:하미)를 거쳐 고창(투루판)에 이르는 ‘신도(新道)’로 후한때 개척한 것이다. 차창 밖이 어두운데다 꿍즈청과 이야기하는 바람에 험난하기로 이름난 ‘막하연적’(莫賀延#石+責:고비사막의 일부)을 살피지 못하고 지나쳐버렸다.

 

일찍이 현장법사는 ‘인적은 물론, 날짐승도 없는 황막한 천지’라면서 이 곳을 지난 소회를 밝히고 있다. 밤에 요사한 도깨비불이 별처럼 환하고 낮에는 모래바람이 소나기처럼 퍼붓는데,

 

닷새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고 입과 배가 말라붙어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고 그는 털어놓고 있다. 여윈 말에 몸을 싣고 가다 모래 위에 엎드려 관음을 염한 덕에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기차로 휙휙 지나가는 오늘날 나그네들에게는 꿈 같은 이야기다.

 


아침 7시 투루판 역에 도착했다. 돌궐어로 ‘풍요로운 곳’이라는 뜻의 투루판은 사방이 높은 산들로 에워싸인 동서 120㎞, 남북 60㎞의 사막 속 분지 오아시스다.

 

해발 800m의 기차역에서 시내 호텔에 이르는 길은 내내 내리막 길을 가는 기분이다. 투루판 중심부는 해면보다 60m나 낮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투루판 총면적 5만㎢ 중에서 80%인 4만㎢는 해면보다 낮다.

 

가장 낮은 곳은 한가운데의 아이딩호(艾丁湖)인데, 수면이 해발 -154m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사해(-392m) 에 버금간다. ‘아이딩’은 위구르어로 ‘달빛’이란 뜻이므로 일명 ‘월광호(月光湖)’라고도 한다.

 

 

바다보다 낮은 사막분지 속 오아시스

 

 

며칠간 열사에 시달렸지만, 이곳의 불볕 더위에 비하면 약과다. 산들로 에워싸인데다 고도마저 낮으니 태양 열이 주위로 발산되지 않는다.

 

 한여름 낮 기온은 보통 50도를 밑돌며 지열까지 합쳐 최고 83.3도까지 올라간 기록이 있다. 연평균 강우량은 16.6㎜밖에 안되는데, 증발량은 3천㎜나 되니 사막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딩호 총면적은 1949~1958년, 불과 10년사이에 7분의 1로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반면 만년설 뒤덮인 주변 고산지대는 차기 때문에 봄에는 강풍이 불어닥친다. 한마디로,

 

이곳 지형지세는 고온, 건조, 강풍의 세 가지 특징으로 집약된다. 그래서 자고로 화주(火洲:불의 땅), 사주(沙洲:모래의 땅), 풍주(風洲:바람의 땅)라고 불려 왔다.

 

불과 모래와 바람은 이곳을 문명의 용광로로 만들었다. 불, 즉 고온은 포도나 면화 같은 특산물 산지로 이름을 떨치게 했고, 모래, 즉 건조한 기후는 카레즈 같은 전무후무한 관개시설을 발달시키고 유물 보존을 가능케 했다.

 

바람, 즉 기류 또한 문명 소통을 가져오고 오늘날 에너지원까지 제공한다. 이 3박자 선율을 타고 투루판의 유구한 역사는 흘러왔고, 그 흐름 속에서 다양한 문화가 합류하는 독창적 문화를 창출해 교류사에 발자취를 남겼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전역에 178개소의 유적지가 널려 평균 280㎢ 당 하나가 있는 셈이다. 이러한 유적 분포밀도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투루판 박물관에 전시된 코뿔소 화석, 춘추전국시대 미라 등은 이 곳의 유구한 역사 문화를 말해준다.

 

7천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산 흔적이 있으며, 3천년 전부터 정착 농경이 시작되었다. 원래 토착민들은 텐산 산맥 북쪽에서 유목하다 남하한 이란계 차사인(車師人)으로 전한 시대(기원전 3~기원후 1세기)에 야르호(교하고성)를 도읍 삼아 차사전국을 세웠다.

 

그후 한나라와 흉노가 번갈아 통치하다 5세기 중엽 북량이 지방정권을 세운다. 그러다가 한족 출신의 국씨(麴氏) 고창국이 들어서 640년 당에 멸망될 때까지 140여 년간 통치한다.

 

9세기 중엽부터는 북쪽 초원에서 남하한 위구르족이 차지했으며, 13세기 초 몽골군에게 점령되어 차카타이 칸국의 지배를 받았다. 17세기 중엽부터 청나라가 설치한 중가르부에 속했다가 1881년 신장성이 신설되자 행정구역으로 독립했다.

 

기복무상한 역사 속에서 투루판은 혈통을 달리하는 다민족 지역으로 변했다. 오늘날 50만 인구 중에서 위구르족과 회족, 한족이 주류를 이루나, 비율은 변화 중이다.

 

1949년부터 2004년까지 55년 사이 위구르족은 90%에서 70%로, 회족은 9.6%에서 7.6%로 줄어든 반면 한족은 1%에서 22%로 급증했다. 그밖에 여러 소수민족도 공존한다.


문화적 다양성의 폭이 더욱 넓은데, 그 중심에 종교가 있다. 고대에는 주류인 불교에 유교나 마니교,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등의 동서 종교가 합류되었다면, 중세부터는 이슬람교 일색이다.

 

시내 서쪽으로 10㎞쯤 떨어진 ‘버들잎 모양’의 교하고성은 2천년 전 차사전국의 수도로 남북 80m, 동서 40m에 달하는 불교 사원구역이 있다. 중앙탑 중심으로 승방, 소탑들이 배치된 양식은 인도의 사라나르 불적이나 나란다 탑군 등에서 보이는 초기 인도 양식이다.

 

교하고성 동쪽 40㎞ 지점에 있는 국씨 고창국의 도읍터 고창고성의 궁전 부근 절터에서도 인도식 복발탑(覆鉢塔:탑 노반 위에 바리때를 엎어놓은 것처럼 둥근 탑)이나 방형탑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모두 인도에 원류를 둔 불교의 동전을 말해주는 유적 유물들이다.

 

 

유적 178곳…세계 최고의 분포 밀도

 

시 중심에서 동쪽으로 60㎞쯤 가면 수바스강을 낀 ‘토욕구’란 계곡이 나타나는데, 그 동서 양쪽에 94개의 동굴이 올망졸망 뚫려있다. 3세기 만들어진 이 동굴군은 1879년 발견되었으나,

 

지난해 10월에야 처음 공식 개방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불교와 마니교의 공존이다. 흔히 마니교 동굴이라고 하는 42동을 보면, 원래 불교의 관상(觀想)을 위한 굴로서 지금도 동서벽에는 이와 관련한 벽화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후일 마니교가 들어오면서 중앙벽에는 나무가지마다 금박장식을 한 ‘생명의 나무’ 49개를 비롯해 온통 마니교 관련 그림들이 들어차게 되었다. 이 굴에서는 마니교 경전도 발견되었다.

 

고창국과 당나라 때 무덤떼인 아스타나 고분군에서는 무덤 456기가 발굴되었다. 거기서 총 1만근이 넘는 2700여 건의 문서가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 300여 건은 토카라어나 소그드어, 위구르어로 씌어진 불교와 마니교, 경교 등 종교 문서다.

 

 216호분 묘실 정면에는 유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풀이한 6첩 병풍이 그려져 있다. 그중 4첩은 성인도로서 왼쪽부터 앞가슴이나 등에 ‘옥인(玉人)’, ‘금인(金人)’, ‘석인(石人)’, ‘목인(木人)’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공자묘의 네 성인을 말하는 것으로 흰 옷 입은 옥인은 청렴결백을, 입을 삼중으로 막은 금인은 언행신중을, 석인은 돌처럼 결심이 굳어 흔들리지 않는 결심부동을, 목인은 거짓이 없이 바르고 곧은 무위정직(無僞正直)을 뜻한다.

 

 



이슬람교는 8세기 전반 카슈가르를 비롯한 신장 서부지역에 전파되었고, 10세기 이 지역에 출현한 카라한 왕조가 이슬람교를 수용함에 따라 13세기 초 투루판까지 전파된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투르판을 포함한 전 신장지역에서 이슬람교가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면서 다른 종교들은 자취를 감춘다. 시가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우람한 소공탑은 그 상징물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첫 투루판 군왕이 된 애민호자(額敏和卓)를 기리기 위해 아들 술라이만이 1777년 은 7천 냥을 털어 높이 37미터, 밑지름 10m의 흙벽돌탑과 사원을 세웠다. 신장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고 한다.

 

 

서방종교도 중국문명도 멈춘 경계선

 

 

한편, 성터·고분벽화에서도 이질 문명들의 융합상을 찾아볼 수 있다. 교하고성의 장묘구역에서는 괴수가 호랑이 목을 물어뜯는 북방 유목문화의 공예 문양인 동물투쟁도, 서역 교류를 시사하는 채도가 나왔다.

 

토욕구와 베제클리크 천불동 벽화에는 서방의 비천상 모습이 뚜렷이 보이며, 중국 신화에 인류 시조로 전하는 ‘복희여와도’가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다.

 

여러 역사적 사실들로 미루어 마니교나 경교 등 서방 종교는 투르판의 고산 장벽을 넘지 못한 채 동전을 멈췄다.

 

중국 왕조가 직접 통치한 최서방 지역으로서 유교를 비롯한 중화문명도 이곳을 넘어 본격적인 서전은 하지 못했다.

 

북방 유목문화도 대체로 이곳을 남전(南傳)의 경계선으로 삼는다. 이는 뜨거운 분지인 투루판이 주위 여러 문명들을 받아들여 녹이고 응고시키면서 특유의 지역 문화를 만들어냈음을 말해주고 있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기원전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서역패권 쟁탈의 피비린내 질펀

투루판과 전란의 역사

 

 

오늘날 투루판은 둔황과 더불어 반드시 거쳐가는 실크로드 투어의 꽃이다. 하지만 문명교류의 십자로였던 이 오아시스 고도의 역사적 뒤안길에는 전란과 학살이 유난히 잦았던 분쟁 지대의 그늘이 늘 서려있었다.

 

하서회랑의 서쪽 끝 둔황이 서역 문물을 걸러 중국 땅에 쏟아놓는 병목이었다면 서역 타림 분지 위쪽의 투루판은 텐산 산맥을 낀 텐산 북로와 남로가 갈라지는 분기점에 놓였다.

 

때문에 텐산 남북로로 들어온 서역 이민족 문화와 서쪽으로 뻗어가려는 중국의 문화가 한 자리에 질펀하게 부려져 서로 부대끼고 나서야 융화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숙명을 안고 있었다.

 

 

사서의 기록들을 보면 중근대까지 투르판이 평화롭게 번영하던 시기는 4~7세기 남북조 시대 들어선 한족 왕조인 고창국 시절에 불과했다. 기원전부터 타림 분지를 호령하던 흉노족과 한 왕조 사이에 서역 패권을 둘러싼 격전이 이곳에서 숱하게 벌어졌고,

 

당대 이후에는 토번(티베트)과 위구르인, 탕구트인, 몽골·이슬람 세력 사이의 복잡한 민족 전쟁이 거듭되었다. 당나라는 640년 고창국을 멸망시킨 뒤 서역 전진기지로 투루판 교하고성에 초대 도호부를 설치해 100여 년간 통치했지만,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 패배로 서역 경영 체제가 붕괴되자 재차 혼란에 빠져든다.

 

이 틈을 타 8~10세기 하서회랑과 타림 분지를 누볐던 위구르·토번인들은 투루판의 이란계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13세기 이후엔 몽골군이 교하고성, 고창고성 같은 고도를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후대의 명나라 또한 둔황 동쪽의 관문인 가욕관 요새를 보루 삼아 급속히 밀려온 무슬림들과 투루판과 인근 하미 일대에서 피비린내 나는 땅뺏기 싸움을 거듭했다.

 

청나라 건륭제가 18세기 투르판을 정복하면서 정세가 안정되는 듯 했으나 19세기 들어 독립을 꾀하는 토착 위구르인의 유혈 반란이 수시로 일어났다. 20세기초에는 잽싸게 이곳에 들어온 중국 소군벌들 사이의 야만적인 혈투와 주민 학살이 50년대 초 중국 인민해방군의 접수 때까지 계속됐다.

 

세계 최대 최고의 흙성이라는 교하고성 한 귀퉁이에서 흉노 침입 당시 학살당했다는 아이들의 떼무덤을 보면서 이곳의 어두운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실크로드 답사단

취재 임종업 blitz@hani.co.kr,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김경호 jijae@hani.co.kr,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한겨레 2006-01-17 04:48]    

 

 

                 즐거운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