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들/포 토 에세이

봄 바다, 봄 바람 그리고 황홀한 노을

향기男 피스톨金 2006. 3. 1. 20:08

 

     봄 바다, 봄 바람 그리고 황홀한 노을
 
▲ 잎새 하나 없이 겨울 매서운 바람을 이겨낸 까치집이 기특했다.
ⓒ2006 양지혜
짙어지는 봄기운 탓인지 오후 햇살은 포근하기만 하다. 겨울의 우울한 기억들을 지워보려는 힘겨움이 닫힌 공간에서의 불안정한 안착을 못 견디게 했다. 차라리 망각의 저편으로 밀어버릴 힘을 새로운 추억으로 채워내는 것이 암울한 잿빛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한 이탈이 된다고 믿고 싶었다.

작정 없이 길을 나섰다.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이 마음에 고요를 깃들게 했다. 무심히 달리던 길이 낯설어지고, 어설픈 길눈 탓을 하며 차를 세우고 스쳐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그저 해를 따라온 곳, 예정치 않았지만 당진을 지난 국도변이었다. 잠시 닿아야 할 목적지를 찾다 보니 늦은 오후 부푼 햇살이 걸려있는 저수지 한편에 시선에 걸린다. 봄볕이 스친 탓인지 물결이 부드럽다.

▲ 봄볕이 스친 물빛은 일렁임조차 조용했다.
ⓒ2006 양지혜
인적이 없어서일까. 산그늘이 언뜻 내려서고 있을 뿐 함께 녹아든 풍경은 정적 속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물가 마른풀 위에 스치는 볕이 유난히 따사로워 마주 선 나의 가슴까지 온기가 전해온다. 긴 겨울 물기 없이 말라버린 수초대공에 하마 봄의 푸릇함이 잔인한 겨울 기억의 위로가 되어주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고불고불 이어지던 길은 이미 산그늘 속으로 숨어 버렸다. 물 위의 고요함과 함께 산밑 동네에는 평화가 가득했다. 저무는 해를 따라가는 길, 당진 왜목리로 들어섰다.

▲ 나른한 모습으로 마냥 봄햇살을 즐기는 작은 배 하나.
ⓒ2006 양지혜
2차선 비좁은 도로를 벗어나 작은 언덕을 넘자 바다의 푸른 물 이랑이 내려다보였다. 잠잠한 바다. 바다를 발견한 아이의 마음은 설렘을 견디지 못하고 바다로 달려가 있었다. 그러나 평상의 느지막한 오후는 포구 속 사람들의 삶도 바다도 침전된 것인 양 적막하기만 했다.

그래도 푸른 바닷물은 어느덧 가슴에 스며들어 가라앉았던 심사를 돋워 댔다. 그리고 아직은 뽀얗게 남은 햇살이 적적한 포구의 시름을 살포시 어루만진다. 그랬다. 바다든 사람이든 만남의 기쁨은 감춰짐이 없었다.

▲ 끝인듯 오르면 다시 또 올라야 하는 바다위 언덕을 향한 길.
ⓒ2006 양지혜
여윈 햇살이 걸음을 채근하며 해넘이를 볼 언덕길로 등을 밀었다. 잦아 스러지는 노을을 찾아가는 한적한 나무계단이 이어진 산길을 오른다. 생각보다 가파름에 허덕이면서도 어렴풋하게 들리는 산새소리에 무거워지는 걸음을 맡겨 본다.

오솔길 양옆에는 시린 겨울의 바닷바람 속에서도 푸름을 잃지 않은 소나무들이 바람을 가득 피워내며 수런수런 자신들만의 언어를 내뿜는다. 총총히 앞서 오르는 아이와 동행자의 뒷모습이 선뜻 눈에 밟힌다. 저렇듯 뒷모습은 타인에게만 열린 자신의 또 다른 표정이란 생각에 오르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나의 뒷모습.

▲ 해넘이 언덕을 지키는 것은 바람과 노을이 전부다.
ⓒ2006 양지혜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닿았다. 내 가뿐 숨결만큼이나 바람의 울렁임이 더 없이 거세지더니 눈앞에 환하게 바다를 펼쳐 놓았다. 바람이 바람을 못 견디게 불어대는 산마루의 풍경에서는 그저 정적만이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감싸고 있었다. 이 언덕 위에 서면 왜목리의 고요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밀려들던 햇살의 눈부심마저 잦아 들며 시간은 바람결을 따라 너울거린다. 해 그림자가 길어지면 어둠은 발아래부터 피어오른다. 그리고 여위어가는 햇살이 전하는 혼신의 황홀함만이 나의 눈높이에 맞춰진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人生은 항시 멀리
구름 뒤로 숨고

꿈결에도 아련한
피와 고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괴로운 짐승이로다.

... 생략

언젠가 한번은
손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이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조지훈님의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중

▲ 쉼 없이 터져 나오는 하얀 뜨거움이 붉은 노을빛속으로 스며 들었다.
ⓒ2006 양지혜
마루 오른쪽은 당진 화력 발전소다. 이름처럼 곧 뜨거움이 쏟아져 내릴 듯 하얀 연기를 쉼 없이 뿜어낸다. 붉어지는 하늘과 검게 침몰하는 땅과 그 사이를 솟구쳐 오르는 구토 같은 연기의 행진. 어스름한 해 그림자가 연기 속에서 잠시 멈칫거림을 했다. 눈앞을 막아선 강고한 철탑이 붉은 하늘과 흰 연기 속에서 녹아내릴 듯 위태했다.

▲ 빈 들도 하늘도 모두가 황금빛으로 채워졌다.
ⓒ2006 양지혜
바다를 등지고 마주 선 빈 들판은 눈부신 황금색이 되었다. 아직은 겨울의 창백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들판에 비친 햇살은 아무런 방해도 없는 황금빛 고요를 채워냈다. 빛이 내려지는 들판의 적막함과 외로움조차도 먼 곳에서 바라보면 저렇게 눈물겹도록 정겹다. 어느덧 세상은 바람과 노을만으로 가득 차 버렸다. 땅거미가 짙어졌다.

나와 아이 그리고 동행자도 머나먼 노을 언저리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낯설고 서투르게 세상의 첫 저녁을 맞듯. 그러나 함께 했기에 적적하지 않았던, 그리고 보석 같은 하늘빛 속에 잠겼던 아름답고 소중한 감동은 오랫동안 모두의 추억 속에 잉걸 불로 타오르게 될 것이다.

▲ 어둠은 낮은 곳부터 흐른다. 언덕 아래는 불이 밝혀지고….
ⓒ2006 양지혜
하루를 지우는 마지막 햇살이 붉은 해일처럼 번져나간다. 어둠은 물처럼 낮은 데부터 고인다. 그래서인가 어슴푸레 남은 노을밑의 희미하고 아득하던 첩첩의 산 그림자는 이미 지워졌다. 돌아가야 한다. 아득한 어둠으로부터 포실한 바람 한줄기가 얼굴을 스쳤다.

슬그머니 설렘이 일고 내 마음은 봄 한가운데로 덜컥, 들어서 버렸다. 풋풋한 기운을 안은 채 기다림이 있는 언덕 아래를 향해 돌아서는 길, 미처 떨어뜨려 지지 않은 '미련'이란 조각 하나가 마른 잎사귀처럼 가볍게 발밑으로 떨어졌다. 어둠을 비켜나기 위한 서두름 탓에 오름의 시간보다 빠르게 바다로 귀향했다.

▲ 어둠이 오자 살아나는 포구는 왜목리의 또 다른 설렘이었다.
ⓒ2006 양지혜
어느새 밝혔는지 모를 불빛들이 포구가 다시 생명을 가졌음을 전했다. 어둠이 햇살을 지우듯 밤은 포구의 고요를 지워내기 시작했다. 술렁임이 아닌 적당한 흔들림. 밤기운이 물씬한 모래사장을 아이와 나란히 걸었다. 햇살의 잔해 속에 푸른 바다가 아득히 잠기고 있었고, 그 사이로 사라지고 흩어져 가는 하루가 시간의 엷은 뒷자락을 스쳐 가볍게 흘러갔다.

▲ 투명한 햇살 가득한 봄바다를 꿈꿨다.
ⓒ2006 양지혜
돌아서고 싶지 않다는 공허한 유혹. 언제부터인지 저 앞발치로 나선 아이의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는 아집에 가벼운 웃음을 머금는다. 바다와바람과 노을과 흔들리는 불빛 속 당진 왜목리 해넘이 마을의 매혹적인 기억은 오랫동안 아쉬움과 짙은 그리움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달려가 어둠속에서 붙잡은 아이의 손이 따뜻했다. 내일 아침은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쏟아지는 봄햇살 조각을 주워야겠다.

 
[오마이뉴스 2006-02-28 10:35]    
[오마이뉴스 양지혜 기자]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다지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