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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만의 해후(邂逅). 다시 찾아간 남이섬은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물갈이한 어항에 새로 풀어놓은 물고기처럼 선연한 빛을 발했다. 하늘을 덮을 듯 우거진 메타세콰이어 숲길로 열대어의 비늘 같은 햇볕이 스며들었다.
한류 열풍의 진원지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배는 정해진 운항시간이 없다. 아침 7시30분에서 밤 9시30분까지 수시로 섬을 오간다. 그럴 만한 게 뱃길이 고작 5분 거리라 따로 시간을 정해놓는 일이 무의미하다.
선착장 출입구에서 외국인 승선 기록을 들춰보았다. 대만, 일본 관광객이 주류이고, 드문드문 필리핀, 말레이시아, 베트남 국적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한류 열풍의 원류를 찾아온 순례객들이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TV드라마 '겨울연가'의 준상과 유진이 걸었던 숲길을 되밟으며 감흥에 젖었다. 드라마가 촬영된 곳에 세워진 푯말과 배우들의 브로마이드를 마주할 때마다 들뜬 표정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모국어가 다르고 사랑의 방식도 다른 이들을 수천㎞ 떨어진 곳으로부터 불러들인 힘은 무엇일까? 극적인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매력, 아니면 남이섬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영상 덕분이었을까. 이유가 무엇이건 남이섬을 찾은 이들은 행복감으로 충만했다.
자연과 문화의 두물머리
반달 모양의 남이섬은 춘천시 남산면에 속하지만 진입로는 경기 가평을 끼고 돌아간다. 둘레가 4km에 달하는 사유지로 청평댐 완공 이전에는 홍수가 날 때만 섬으로 변했다고 한다. 섬 전체가 온통 모래밭과 땅콩 밭이었다고. 그러던 것이 1960년대 중반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수재(守齋) 민병도 선생이 섬을 통째로 사들이면서 종합휴양지로 변모했다.
시대를 앞서간 선견지명인지, 아니면 개인적 취향인지 모르지만 수재는 섬을 사들이자마자 길을 내고 나무와 잔디를 심었다. 멀리 수원 서울대 농대까지 찾아가 메타세콰이어 묘목을 구해왔다.
반세기 동안 3대를 이어오며 공을 들인 남이섬 숲길은 배에서 내리면 시작되는 잣나무길과 메타세콰이어길, 은행나무길, 자작나무길로 무성해졌다.
전국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수려함 때문에 이미 오래 전부터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유명세를 얻었다. 물론 유명세로 인한 대가도 치러야했다. 원시림 같던 자연이 남이섬을 아끼고 사랑한다며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무수한 상처를 입었다.
남이섬은 환경운동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강우현 사장을 영입한 후 문화예술과 자연생태공간으로 거듭났다. 강 사장은 우선 톱날에 잘려나간 나무와 허물어진 강둑과 짓밟힌 야생화를 돌보았다.
인위적인 냄새가 안 나게끔 숲을 재정비했다. 자라나는 나무에 걸리면 간판과 시설물을 옮겼다. 약도 더 이상 뿌리지 않았다. 갑자기 늘어난 벌레 때문에 손님들의 항의가 일었지만 원칙을 지켰다. 얼마 후 벌레가 늘어나자 새가 모였고, 새들의 분비물을 거름으로 해 야생화와 풀이 번성해졌다.
자연과 숨바꼭질하듯 2~3년의 순환을 거치자 숲은 완연한 본래의 제 모습을 회복했다. '늙고 병든 촌부가 새벽녘 부스스 일어나 툇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쳐다보는 듯' 초점을 잃어버렸던 남이섬에 생기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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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지요금과 소음이 극성을 부리던 행락지 분위기도 사라졌다. 강
사장은 국적 불명의 어지러운 간판과 섬 곳곳에 걸려 있던 현수막을 걷어내고 문화와 운치가 넘치는 공간으로 섬을 탈바꿈시켰다. 수십 년 간 묻기만
해온 쓰레기도 모두 파냈다. 과거의 원죄를 씻는 마음으로 들어낸 쓰레기가 1t 트럭 40대 분량이었다.
소음과 쓰레기가 사라진 자리엔 다양한 문화행사와 전시관이 들어섰다. 어린이에게는 꿈과 희망을, 연인에게는 사랑과 추억을, 예술인에게는 창작의 터전을 마련해주는 각종 이벤트와 시설이 선보였다. 다목적 문화공간 안데르센홀, 섬을 재정비하면서 나온 폐자재를 재활용한 레종갤러리, 유니세프 활동을 홍보하는 유니세프홀, YMCA생명터, 남이문화센터, 노래박물관 등이 문을 열었다.
타조와 달리기 시합
남이섬 선착장 나루에 내려 1㎞ 남짓한 잣나무길을 걷다보면 난데없이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하늘에서 갑자기 어른 주먹만한 잣송이가 떨어져 내린다. 범인은 청설모다.
다람쥐과에 속하는데 그 수가 많아 남이섬의 터줏대감 노릇을 한다. 귀여워 보이는 생김새와는 달리 성질이 고약해 관광객이 떨어진 잣이라도 집을라치면 발치까지 내려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다. 물론 위해를 줄 정도는 아니다.
청설모가 말해주듯 사람과 동물의 공존은 남이섬의 특색이다. 토끼, 오리, 타조, 사슴 등 동물 식구들이 울타리를 벗어나 자유롭게 섬에 노닌다. 몸집이 큰 타조와 사슴은 한번 만져보려는 아이들의 등쌀에 못 이겨 하루에도 몇 번이나 애꿎은 달리기 시합을 하곤 한다.
동물들이 제멋대로 섬을 헤집고 다니지만 관리소측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긴다는 의도이다. 수년 전 섬에서 죽은 원숭이의 묘비에 적힌 글귀를 보면 이해가 빠르다. 나무묘비엔 '생명은 모두에게 하나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031-582-5118, www.namisum.com
사진/김주형 기자(kjhpress@yna.co.kr),
글/장성배 기자(u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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