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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젊은 엘리트 新 화교가 몰려온다

향기男 피스톨金 2007. 11. 26. 10:29

 
 
중국의 젊은 엘리트 新 화교가 몰려온다
 
 
 
국내 40만 가운데 순수 한족만 10만명으로 舊화교 5배
전문직 종사자·대기업 엘리트·사업가 등 각계서 활약

▲ 신한은행 마틴펑 과장 /photo 정정현 조선영상미디어기자

‘신 화교(新 華僑)’.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국내에 들어와 새롭게 뿌리를 내린 중국인으로, 지난 120년 동안 이 땅에서 살아온 대만 국적의 ‘구 화교’와는 다르다. 이들 신 화교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점차 세력을 넓히고 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수는 해마다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한·중 수교 이전 195명에 불과했던 중국인은(조선족을 포함한 중국 국적 등록 외국인) 10년 만에 8만4500여명에 이르렀다. 2004년에는 20만명, 2006년에는 30만명을 넘어섰고 10월 현재 39만4800여명으로 40만명 고지를 넘보고 있다.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최경식 정보분석과장은 “이들 중 한족이 10만8800여명으로 전체의 28%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반면 1970년대 한때 3만명을 웃돌던 대만 출신들은 꾸준히 줄어들어 현재는 2만2100여명에 그치고 있다. 조선족을 제외하고 따져도 순수 중국인 신 화교가 대만 출신 구 화교의 5배에 이른다는 얘기다.


신·구 화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난다. 대만 국적의 구 화교가 결혼, 귀화를 통해 국내에 영구적인 생활 기반을 잡고 살아간다면, 중국 본토 국적의 이들 신 화교는 장기 체류(long term sojourn)의 성격을 띤다. 구 화교의 경우 본국과의 네트워크가 단절됐다면 신 화교들은 본국의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동시에 국내에도 확고한 기반을 잡는 ‘멀티플 베이스(multiple base) 전략’을 추진한다. 건국대 양필승 교수(중국현대사)는 “신 화교를 구분 짓는 핵심 개념은 이들이 한·중 양국에 갖고 있는 동시적 기반”이라면서 “이들을 뉴 에스닉 차이니즈 그룹(new ethnic Chinese group)으로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활동 분야에서도 구 화교가 요식업이나 소규모 무역업에 종사했다면 신 화교는 높은 학력 수준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대기업이나 변호사·연구직 등 전문 분야, 중소기업 경영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최근 급증하는 중국인 유학생은 잠재적인 신 화교로 꼽힌다. 오늘의 한국을 살아가는 신 화교를 들여다본다.


대기업 엘리트
 신한은행·SK텔레콤…“한국의 모든 것 흡수하겠다”


서울 중구 태평로 신한은행 건물 5층 금융공학센터. 각종 정보를 쏟아내는 6개의 모니터를 마틴 펑(馮沿鵬·28) 과장이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지난 9월 4일 입사한 그는 IB(investment banking) 그룹 소속으로 스트럭처링(structuring)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개인·기업고객용 금융상품을 개발하고 파이낸싱과 운용까지 챙기는 일이다. 펑 과장은 4명의 팀원과 함께 곧 모집할 예정인 주가지수연동 예금상품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중국 랴오닝성 선양 출신의 펑 과장은 초·중·고교 때 1년씩 월반을 거듭해 15세에 베이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수재다. 4년 뒤에는 당시 최연소 졸업생으로 화제를 모았다. 중국 국영 이동통신 기업인 다탕(Datang)텔레콤의 연구원으로 3년여 근무했고, 모토로라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등 외국계 기업의 사업개발 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다. 한국과는 2006년 8월 서울대 글로벌 MBA 1기로 입학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그는 “MBA 과정을 통해 얻은 한국에서의 네트워크를 충분히 활용하겠다”면서 신한은행에 둥지를 틀었다.

여러 기업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펑 과장은 “신한은행이 강조하는 창조적 혁신(creative innovation)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국경의 의미는 더욱 약해질 것입니다. 한국 경제가 더욱 성장하려면 지금보다 한층 국제화·세계화돼야 합니다. 지금 중국 경제는 세계의 시장으로 거듭나며 가능성을 한껏 높이고 있지요. 저는 한국 경제의 성장 가능성도 함께 믿습니다.” 목표를 묻자 그는 “워런 버핏과 같은 투자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15년 후 한국에 머무를 가능성에 대해 그는 “70%”라고 했다. 그렇다면 30년 후에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as long as possible)”이라는 답이 나왔다. 펑 과장은 한국어 실력을 보충하기 위해 매주 3차례 연세대 한국어학당을 찾는다. “한국 기업과 한국인, 한국 문화에 대해 배울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중·한 두 나라를 잇는 가교가 되겠습니다.”

▲ SK에너지의 한동(왼쪽).왕환씨 photo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기자
2006년 7월 SK텔레콤에 입사한 첸핑(陳平·24)씨는 베이징대 영문과 출신이다. 그는 마케팅전략실의 매니저로 현재 국내 이동통신 시장을 분석하는 일을 맡고 있다. “중국 국내 기업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과감히 한국 기업을 선택했다”는 첸핑씨는 “앞으로 폭발적인 잠재력을 지닌 중국 이동통신을 위해 나의 공간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동통신 분야에서 한국은 세계 최강입니다. 중국에 접목시킬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한국행은 내 인생의 매력적인 선택이었고 후회는 없습니다.” 그의 계획은 2년 정도 한국과 한국의 이동통신에 대해 충분히 배운 뒤 베이징의 SK텔레콤 차이나로 자리를 옮기는 것. “어디서 일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가 아닙니까. 언제든 한국에 올 수 있고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지난 4월 SK에너지에 입사한 한동(韓冬·27)씨는 SK의 글로벌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입사한 케이스다. 중국사업추진팀 사원으로 SK가 중국 우한에서 추진하는 석유화학 부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랴오닝성 단둥 출신의 한씨는 베이징 중의대를 졸업했지만 “안정된 삶보다 도전과 변화의 인생을 선택하겠다”며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중의대 재학 시절 한국인 유학생을 상대로 어학 과외 교습을 하며 알게 된 한국이 그의 인생 제2막의 무대가 된 것이다.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통상학 석사학위를 받은 한씨는 “최소 5년 동안, 그 이상 한국에 머물며 한국의 모든 것을 흡수하겠다”고 말했다. 20년 뒤에도 한국에 있을 가능성을 묻자 “50%는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ERP경영팀의 왕환(王歡·28)씨는 상하이 푸단(復旦)대 경영학 석사 출신이다. 상하이 IBM에서 1년여 근무하다 한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남편은 한국인이다. 왕씨는 “여성이 사회를 통해 자신의 잠재력을 펼치는 면에서 한국은 아직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승진 기회와 급여 등에서 남녀 간 차이를 두지 않는 중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성이 개인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기에 한국은 중국만큼 공평한 것 같지 않습니다.”
 
▲ 법무법인(유)태평양의 지용천 변호사

전문직
 로펌 진출 잇따라… 조선족 출신 많아
“급여 많고 안정적, 후배에게도 권해”


전문성을 바탕으로 국내에 진출한 ‘신 화교’도 적지 않다. 법무법인(유) 태평양의 기업법무부 중국팀에는 4명의 중국 변호사가 활동하고 있다. 법률 분야는 특히 조선족 출신의 진출이 두드러진 분야이기도 하다. 지용천(池湧泉·35) 변호사는 지린성 출신으로 베이징대 사범대 역사학과와 중국정법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고려대 법대 대학원에서 국제법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는 호주 시드니대 로스쿨로 유학을 떠나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인턴 생활을 했다. 당시 맺은 인연으로 태평양에 입사해 현재 한·중 양국 간 해외 투자에 관한 중국 법률서비스를 컨설팅하고 있다.

기업 인수·합병과 부동산 금융, 외국인 직접투자(FDI)와 노동법 관련 업무가 그의 담당. 내년에는 중국 사무소로 파견될 예정이다. 지 변호사는 한·중 간 문화차이, 언어장벽, 중국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 등 세 가지를 불편한 점으로 꼽았다. 그의 아내는 한국인이다. 그는 “앞으로 20년 뒤 한국에서 생활할 가능성은 50% 정도 되지 않을까요”라고 했다.

 

한편 “중국 현지의 교육 시스템과 교육 수준이 한국에 못지않다고 생각한다”면서 “자녀들은 향후 중국에서 교육을 받게 할 것”이라고도 했다.” 기업법무부 중국팀에는 지 변호사 외에도 김승봉(金勝峰·31) 변호사(지린성, 상하이 푸단대 법대·서울대 법대 대학원), 홍송봉(洪松峰·30) 변호사(헤이룽장성, 베이징대 법대), 이광성(李光星·30) 변호사(지린성, 중국정법대·고려대 법대)도 활동하고 있다.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의 VD(visual display)사업부 주커(30) 책임은 한국 생활이 4년을 넘어간다. 2004년 8월 삼성전자에 입사해 디지털 TV의 하드웨어 플랫폼을 개발하는 일을 맡고 있다. 허난성 출신으로 상하이 푸단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주커 책임은 수원 영통동에서 아내와 40개월 된 딸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중국에서 IBM이나 인텔 등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같은 과 동기들에 비해 급여 수준이 20~30%는 나은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중국에 있는 후배들에게 한국행을 적극 추천하는 이유도 높은 급여 수준과 안정적 생활 환경에 있다. 주커 책임은 “확실히 5년 동안은 한국에 있을 계획”이라면서 “여건만 보장된다면 평생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20년 뒤에도 한국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을 묻자 “적어도 50%는 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귀화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딸이 성장해 한국 남자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묻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아쉬운 점으로 자녀들의 교육 환경을 꼽았다. 국제 학교를 보내기에는 경제적 부담이 적지 않고, 대만 출신의 구 화교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화교학교에 보내기도 껄끄러운 점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주커 책임은 병원에서의 의사 소통이 쉽지 않아 애를 먹은 경우가 꽤 있었다고 덧붙였다. 

 

▲ CTS 중국여행사 리진펑 사장 photo 김승완 조선영상미디어기자
사업가
 중국여행사·신문사 등 경영
“투자확대 위한 제도 개선 필요”

한국에 진출해 기업을 경영하며 뿌리내린 신 화교도 적지 않다. 서울 중구 남산동 중국영사관 인근에서 CTS 중국여행사를 운영하는 리진펑(李金鳳·52) 사장은 한·중 수교 이후 한국에 진출한 ‘1세대’ 신 화교다. 1994년 입국했으니 한국 생활이 벌써 14년째다. 헤이룽장성 하얼빈 출신으로 옌볜대 조선어학부를 다녀 한국어 실력이 유창하다.

헤이룽장성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17년 동안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입국 2년째인 1995년 CTS 중국여행사를 설립했고 비자 대행, 한국인의 중국투자 인증 업무대행, 관광 알선 등 업무를 맡고 있다. 남편은 하얼빈에서 여행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리 사장은 “한·중 교류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라면서 “두 나라의 경제·문화 교류를 돕는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재력을 갖춘 중국 사람들의 한국 투자가 쉽지 않다는 점이 걸림돌인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투자금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중국의 인건비 때문에 한국에서 제조업을 하기엔 부담이 크죠. 서비스 업종에서 중국인들의 진출과 투자를 확대하기 위해 제도 개선의 필요성이 적지 않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9살이던 아들이 지금은 한국외대 2학년에 다닐 정도로 성장했다. 아들은 화교학교에 잠깐 다녔지만 하얼빈에서 중·고교를 마쳤다. 이 사장은 “아들이 한국 여자와 결혼하겠다면 말릴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조명권(曹明權·40)씨는 중국어와 한국어로 격주간 발행되는 16매 짜리 신문 ‘신화보(新華報)’의 발행인이다. 2005년 창간돼 발행부수는 5만부 정도. 법무·노동 관련 소식과 근로 현장에서의 목소리, 중국 신화통신사의 중국 관련 기사를 발췌해서 싣는다. 구로구 구로3동 2호선 대림역 근처에 있는 사무실에는 오성홍기와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상근 직원이 5명으로 최근에는 여행업, 출판과 통·번역 업무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한화신문그룹 이사장, 서울화인화교평화통일촉진회 회장, 서울중국교민협회 수석부회장, 한중상무촉진교류협회 감사장 등 다양한 직함이 있었다. 조 사장은 중국 지린성 투먼시 출신으로 중앙당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옌볜 철도국 선전부에서 보도담당으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2001년 입국해 중국 신문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2003년 한국에 귀화한 조 사장은 중국계 금속회사에서 통역을 담당하는 아내와 초등학교 3학년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재한 중국인들이 느끼는 불편함은 아직도 많습니다. 우선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생활이 불편하고, 외국인등록증의 갱신 조건이 까다로워 큰 부담이 됩니다. 소규모 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오자마자 큰 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은 일 아닙니까. 한국에 투자하려는 의지를 제대로 확인하고, 일단 확인한 뒤에는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한국 정부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조 사장은 신문을 통해 ‘투표 권리를 찾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지방선거에서 투표권을 얻을 정도로 우리를 보는 시각과 대우가 달라지고 있다”면서 “재한 중국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데는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유학생
 수교 첫해 17명에서 3만1100명으로
“가능성 높은 한국에 인생 걸겠다”



중국인 유학생들은 ‘잠재적 신 화교’로 꼽힌다. 최근 10여년 동안 중국인 유학생의 수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한·중 수교 첫해 17명이던 중국 유학생(조선족 포함)은 1999년 1000명을 넘어섰고, 2005년 1만명을 돌파한 뒤 현재 3만1100여명에 이르고 있다.

서울대 언어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의 우칭펀(吳淸芬·28)씨는 2002년 입국했다. 저장성 출신으로 중국 대륙을 강타한 한류(韓流) 열풍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고 했다. 서울대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를 배웠고, 중앙대 영문과에 편입해 졸업한 뒤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우씨는 2남 1녀 중 장녀로, 2명의 남동생도 모두 한국에 와서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두 살 아래의 큰 동생은 중국에서 컴퓨터를 전공하다 2004년 한국에 왔다.

 

 중대 경영학과 마지막 학기로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 작은 동생은 지난 6월 대학을 졸업(기계공학)한 뒤 단국대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우씨는 “중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고학력자의 취업이 쉽지 않은 형편”이라면서 “가능성이 높은 한국에 인생을 걸겠다”고 했다. “처음 입국했을 때 이명박 시장이 선거운동을 한창 벌일 때였습니다. 선거란 것이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는 과정도 봤지요.” 한국의 역동성을 직접 확인한 계기라는 것이다. 우씨의 두 살 연상의 남자 친구도 한국의 가능성을 보고 입국한 유학생이다.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반으로 ‘한·중 비즈니스 CEO’를 꿈꾸는 청년이다. “결혼하게 된다면 한국에서 살 겁니다. 한국에서 맺은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는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자산입니다. 중국대사관에서 주최하는 모임, 한국에서 취업에 성공한 사람들의 모임 등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화교·화인·화예
화교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현재 중국 정부는 화인(華人·ethnic Chinese)과 화교(華僑·Chinese sojourners)로 나누고 있다. 화인은 부계(父系)주의 관점에서 부계의 조상이 중국 민족이지만 현지의 국적을 취득해 중국 국적을 지니지 않는 집단을 가리킨다. 화교는 중국의 국적을 그대로 유지한 집단. 화예(華裔)는 화인 중에서 자신을 현지 교민 사회의 일원으로 인식하지는 않지만, 문화적으로는 자신들의 부계 조상이 중국으로부터 건너왔다고 생각하는 집단을 말한다.

 

[인터뷰 | 건국대 사학과 양필승 교수]
신 화교는 이민자가 아니라 장기 체류자
한·중에 동시적 기반 갖추도록 지원해야


‘국내 화교 연구의 1인자’로 꼽히는 양 교수는 경기고, 고려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UCLA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9년부터 경기도 고양시의 서울차이나타운개발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현재 중국 칭다오에서 코리안 타운을 추진하고 있다.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 한국 화교 경제의 어제와 오늘’(삼성경제연구소·2004)을 출간했다.


‘신 화교’의 개념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신 화교는 한·중 수교를 전후해 새롭게 한국에 뿌리내린 사람을 말한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구 학자들이 사용했던 신 화교의 정의를 사용했다. 하지만 최근 수정의 필요성이 커졌다. 정주(定住)에서 장기 체류자로 개념 자체를 바꿔야 한다. 이들은 세계화 시대에 발맞춰 한·중 양국에 동시적 기반을 갖는 그룹을 말한다.”


‘신 화교’는 왜 나타났는가. “과거의 이민자들은 도피성 이민이 많았다. 안전망(safety net), 혹은 피난처·은신처(shelter)를 찾아 떠난 것이었다. 쉽게 말해 문화혁명과 같은 정치적 격변이 다시 일어나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신 화교는 국적을 포기하거나 한국으로 귀화할 이유가 없어졌다. 2000년 이전에는 중국인들도 자기 나라가 이렇게 발전할 줄 몰랐을 것이다. 2003~2004년을 기점으로 나타난 급속한 경제성장은 나 역시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중국은 이제 세계의 시장이 됐다. 세계화와 초고속 성장으로 중국 안에서의 기회 자체가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그들이 그런 기회를 굳이 버릴 이유가 없어졌다. 가능성의 정도를 면밀히 파악해 더 유리한 쪽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동시적 기반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신 화교’를 통해 한·중 양국이 함께 발전하기 위한 선행 조건은 무엇인가. “중국인들이 안정적으로 장기 체류할 수 있도록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엘리트급 고급 인력이 유입된다. 장기 비자를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투자와 취업의 편의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래야 가족이 함께 오게 된다. 한·중 어느 한쪽으로의 선택을 강요하는 양자택일 방식이 돼선 안 된다.

 

그들이 중국의 기반을 포기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시적 목적의 체류가 아니라 사업적 기반을 갖추고 가족과 함께 체류하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자. 해법은 비자를 갱신하는 방법에 있다. 신규 발급에서는 개방적이지만 갱신할 때는 엄격하게 하자는 것이다.”


교육·의료 문제를 지적하는 재한 중국인들이 적지 않은데. “최근 상사 주재원들을 보면 예전의 단독 부임에서 가족을 동반하는 경우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신 화교가 가장 큰 문제로 꼽는 것이 바로 교육 문제다. 보통 대만계가 주류를 이루는 화교학교에는 보내기가 쉽지 않다. 국제학교는 비용 부담 때문에 선뜻 아이들을 보내기 어렵다.

 

상사 주재원들의 경우에도 급여 수준에서 경제적으로 부담이 된다. 중국어 교육을 매우 중시하는 신 화교에게 중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국제학교는 현실적 대안이 되기 어렵다. 방법은 있다. 한국어·중국어·영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자. 한국인과 중국 학생들이 함께 다니도록 하되, 학비는 현재 사립학교의 수준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의사소통의 부담 없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의료시설도 아직 많이 부족하다.”


언어 문제도 지적되는데. “화교가 다수인 싱가포르는 최근 ‘중국 표준어 말하기 캠페인(Speak Mandarin Campaign)’을 펼치고 있다. 나아가 만다린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정부 요직 진출을 제한하거나 일부 대학에서는 입시에서 불이익을 주는 등 제한을 가하고 있다. 참고해야 할 대목이다. 아직까지 한국은 동남아시아 국가보다 신 화교를 유인하는 데 있어 비교 우위에 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