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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캠프 데이비드의 韓人특공대, MB도 알았을까

향기男 피스톨金 2008. 4. 27. 00:06

 
캠프 데이비드의 韓人특공대, MB도 알았을까
이승만 박사와 美OSS 한인 유학생 9명 선발
캠프 데이비드에서 항일 특수훈련 시켜
 

▲ 1950년 10월 16일자 타임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표지 인물로 등장했다. / 조선일보 DB
'존경하는 부시 대통령, 저는 먼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6년 전, 그러니까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4월 지금은 캠프 데이비드로 불리는 바로 이곳에서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미국의 청년들과 함께 특공대 훈련을 받으며 피땀을 흘렸던 한국 청년들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당시 미국의 전략정보국(OSS)과 재미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는 극비리에 대일(對日)전쟁에 투입할 한인 특공대를 육성하기로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에 따라 미국에 유학 중이던 한국 학생 12명이 1차로 선발돼 그중 9명이 바로 이곳에서 수개월씩 생사를 넘나드는 특수훈련을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지금도 많은 한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를 비롯해 훗날 나라 건설을 위해 크게 기여했던 장기영 이순용 장석윤 정운수 김길준 현승염 황득일 등의 청년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미국이 보여준 희생과 배려에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리며 동시에 부시 대통령과 미국민들도 자유와 독립을 강력히 바랐던 한국의 자랑스러운 청년들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지난 20일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캠프 데이비드에 초청을 받은
이명박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함께 가진 기자회견에서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더라면…. 이 연설은 가상이지만 그 내용은 픽션이 아니라 100% 사실이다. 미국과 엇박자를 내기로 한 지도자라면 모르지만 전략적 동반자를 꿈꾸는 한국의 지도자라면 한미 우호의 밑거름이 된 9인의 청년을 잊어서는 안 된다.

OSS는 훗날 CIA로 개편되며, 원래 루스벨트의 지시에 따라 국가안보와 관련된 정보수집과 분석을 전담하기 위해 1941년 7월에 설립된 정보조정국(COI·Coordinator of Information)이 이듬해 6월 13일 특수 군사작전 업무도 할 수 있도록 확대개편된 조직이다. 이승만은 COI의 핵심직책을 맡고 있던 육군 정보참모부 소속 굿펠로 우대령과 깊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굿펠로우는 OSS부국장으로 승진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과 굿펠로우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것이다.

이승만은 OSS 참여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내려 했고 굿펠로우는 미국 내 한인 청년을 훈련시켜 대일(對日)공작을 펴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7월경 두 사람은 20~44세 한인 50명을 선발키로 했다. 10명은 무선통신 훈련, 10명은 해상전술 훈련, 30명은 주요 작전 조직훈련을 받은 다음
중국 한국 등에 배치돼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50명의 명단을 OSS에 통보했고 그중 12명이 선발됐으며 다시 그중 9명이 '모처'에서 특수훈련을 받았다. 그 '모처'가 바로 지금의 캠프 데이비드였다.

그러나 국내외적인 요인들로 인해 이승만과 OSS의 '합작사업'은 성공적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승만의 임정 승인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부담스러운 요구였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포항공대 고정휴 교수는 "이승만이 임정 승인과 같은 정치적 요구는 일단 유보하고 대일전쟁에서 한인 무장조직의 효용성을 충분히 입증한 다음 단계적으로 미국의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냈다면 장기적으로 임정에 대한 승인 획득도 가능하지 않았을까"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캠프 데이비드 땅속에, 66년 전 학업도 포기한 채 조국 독립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졌던 한국 청년들의 고귀한 피와 땀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한우 기자 hwlee@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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