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world-OKTA]/월드-옥타 사람들

옥타사람들/ 韓-臺灣 오가며 민간외교관으로 노블리스 황희재회장

향기男 피스톨金 2008. 6. 16. 16:15
 
[인터뷰] 韓-臺灣 오가며 비지니스와 민간외교관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쥬실천하는 황희재 지회장
 



韓-臺灣 오가며 비지니스와 민가외교관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쥬실천

 

마잉주 정부 실용주의 꼼꼼히 살펴야

 

삶의 과정은 흔히 '길' 에 비유된다.그리고 길을 걸을 때 선택이 필요하듯, 인생에도 다양한 선택의 길이
연속된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처럼 노란숲속의 두 갈래 길에서 한 길을 남겨두고 나머지 한길에 승부를
던지다 보니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달려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대만 타이베이에 본사를 두고 있는
유허국제유한공사 황희재 대표의 인생길이자 단면이다.

지난달 이천에서 열린 월드옥타(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대표자 회의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그를 서초동 개인사무실에서 만났다.



박철의 기자 tie2109@naver.com


황희재 사장은 "오는 5월 대만의 마잉주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동안 쌓아놓은 한 대만간 거래선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 고 경고하고 "이에 대한 정부 및 업계의 대책이 세워져야 한다" 고 강조했다.
마잉주 총통이 철저한 실용주의자이며 현재 중국 본토와도 유연한 경제정책을 펼치겠다고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잉주가 표방한 실용주의란 한국과의 거래에서 실익이 없다면 언제든지 거래선을 중국으로 바꾸겠다는 의도가 내포돼 있다. 지난 92년 한 대만간 국교가 단절되면서도 교역규모면에서 꾸준하게 성장한 것은 한국정부가 대만을 포기했지만 기업인들이 이삭줍기라도 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비즈니스를 한 결과이며 이제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지난 86년 혈혈단신 대만으로 건너가 20여년 만에 300억 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등 자수성가의 기반을 마련한 그는 현재 월드옥타 대만지회장과 재향군인회 지회장을 맡아 개인 비즈니스와 함께 민간외교 사절로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중국이나 대만시장 진출을 위해 그는 "세계어느 시장에서도 비지니스의 기본은 신의와 정직이지만 때로는 끈질긴 싸움을 하기도 한다" 며"중국이 유대인 다음으로 상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치열한 생존경쟁의 한 단면을 소개했다.



단돈200만원으로 대만에서 올린 기적

 

그러나 그는 "최종적으로는 마진이 없어도 전폭적으로 양보를 하는데 이를 잘 넘기면 Long-run을 할 수 있다"며 "자칫 감정으로 협상을 하다가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만사람들은 소박하고 내실을 중시하기 때문에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며 인내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국 사람들이 외모나 외형에 치우치는 선입관을 갖는 것과는 비교가 되는 대목이다.

황 사장은 국립 안동대학에서 한문학을 전공하고 ROTC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후 제약회사에 와 금성사에 입사를 하지만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한다. 소위 학벌 좋은 SKY들 앞에 주눅이 들어가면서 냉엄한 사회 현실 앞에 자신의 부가가치를 새로이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로에 선다. 장교로 제대하면서 모아둔 퇴직금 200만원을 들고 중문학을 공부하겠다며 무작정 대만행을 결행한 그는 사립 명문동오대학(東吳大學)에 입학함으로써 낯선 이국생활의 첫 관문을 시작한다.

대만을 떠나기 전 그는 국방부와 군에서 맺어진 인맥들을 수습한 끝에 대만의 한국대사관에 국방무관(國防武官)을 찾아가 어렵사리 경비직에 취직, 소위 주경야독(晝耕夜讀)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88년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국내 각 기업 마다 중국어 능력자의 수요가 상종가를 치는 시기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그는 귀국길에 올라 고합그룹에 공채로 입사한다. 하나의 선택은 다른 하나의 포기를 의미한다. 흔히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뒷날 다시 선택하지 않을 일을 하게 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선택이 어떤인생을 결과 지을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적인 사고방식이 성공의 열쇠

 

짧은 기간이지만 대만에서 공부한데다가 장교출신이라는 점이 합격의 배경이 된다. 장치혁 회장의 비서를 하면서 중국 업무를 맡았다. 당시 장치혁 회장은 국내에서 SK에 이어 두 번째로 중국 정부로부터 사업허가를 끌어내 중국시장에 대한 안목을 그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장본인이다. 장 회장을 지근거리에 보좌(補佐)하면서 그는 장사꾼으로서의 기질과 안목을 배운다.
황사장은 "장치혁 회장을 만나 흐르는 물 같은 유연성과 포용력을, 부모로부터 긍정적 사고방식을,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체득하게 된 것 같다"며 항상 자신의 성장 배경에 대해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고 한다.

물은 매사 상황을 받아들이고 변화를 추구한다. 동그란 컵에 들어가면 동그랗게, 세모 사발에 들어가면 세모꼴로, 물은 모든 상황을 일단 받아들인다. 세상의 변화를 거부하기보다 이를 수용하면서 스스로 적합하 모습을 취하듯이...

황 사장은 "어려서 크게 질곡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스스로 신문배달을 하다가 친척에게 들켜 혼난 적이 있다"며 "스스로 일어서서 내자신을 키우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한때 가세가 기울어진 탓도 있었지만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장차 장사꾼으로서의 소질과 의지를 엿보여 지는 대목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재벌 총수 비서자리를 박차고 나온 황사장은
"대만에 가서 공부를 좀 더 하고 돌아오겠다" 는 말로 사직서를 내고 대만으로 다시 훌쩍 떠난다. 본격적인 비즈니스인생을 걸었다.

대만IPA시장 점유율 절반 차지

 

그는 비지니스에 있어 소위 '관계'를 통한 소통을 신봉한다. 자신이 개척한 길이지만 ROTC출신이라는 이유로 무턱대고 대사관을 찾아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일이며 총수를 보좌하면서 맺은 인맥이 그의 사업에 전환점을 마련해 준다.
당초에는 고합에서 고작 2년 남짓 어개너머로 배운 국내 원단을 대만에 수출을 하지만 한국 제품의 경쟁력이 점차 떨어지게 되는 시점에 서울에서 아웃소싱까지 하자는 제안으로 그의 영역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시장으로 확대된다.

대만이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단섬유, 니트 등 원단을 NIKE, REEBOK의 중국, 서울, 인도네시아 등의 현지 공장에 공급하는 소위 제 3국 무역방식을 통해 사업의 기초를 강화한다.여기에더 고합에서 맺은 인연을 토대로 폴리에스테르 관련제품의 첨가제로 들어가는 IPA를 대만의 섬유회사들에게 공급하게 되면서 그의 사업은 탄력을 받게 된다.

당시 IPA는 일본의 AGIC이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던터에 고합이 이 제품을 개발하여 황 사장에게 딜러를 맡긴 것.
현재 대만의 석유화학 회사에 고합의 제품이 AGIC과 동등한 조건으로 시장을 반분할 정도로 이 분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만의 Far-Eastern Group 그룹과 Eternal Group 그룹 등 20여개 공장이 그의 거래선이다. 현재 원단과 케미칼제품 비중이 각각 절반정도. 그의 거래선들은 거의 10년이 넘도록 지속된다.

비결에 대해 황 사장은 "대만은 철저하게 산업구조가 분업화돼 있는 시스템으로 미들맨의 역활을 인정하는 사회구조다"며 자신의 능력보다 사회시스템 덕분이라며 겸손해 했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무엇보다 철저한 시장조사를 통한 정보공유를 우선한다. 그는 또한 현지문화에 대한 사소한 식견과 관습도 놓치지 않는다.


대만여성과 결혼을 한 것도 대만의 문화를 익히는데 한몫 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현지 봉제공장을 일년에 4~5 차례 방문 하는데 사후 관리보다 사전 서비스를 더 중시한다"며 "사전에 현지에 가서 입고된 제품의 상태를 같이 확인해 주고, 식사도 하면서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 비즈니스에 더 유리하다"는 경험담을 소개했다. 사고가 터지고 나서 사후에 수습하려면 우선 경제적인 손실이 더 크다는 장사꾼으로서의 기질을 보였다.


 



봉사 후원은 또 다른 나의 길

그는 자신의 삶을 산길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내안에 정해진 산이 에베레스트산이 되었건, 백두산이 되었건, 혹은 사무실 근처의 우면산이건 정상에 오르는 과정은 동일하다"며 "중요한 것은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자신의 의지와 열정으로 정상에 오른 순간, 정상에 올라본 사람들만 이 서로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관계와 진보된 새로운 목표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예술의 전당 앞에 자신의 소유인 6층 규모의 신수미하(新秀美廈)라는 건물 명칭의 내력을 알아봤다.
어린시절 부친이 '수미사'라는 양복점을 경영하다가 4남매를 서울로 유학 보내면서 가세가 기울어진 아픔을 부친은 돌아가셨지만 모친에게나마 위안을 드리고 싶어서라는 짤막한 설명이다.
그의 모친은 현재 78세. 적지 않는 나이임에도 자식에게 짐이 된다며 한사코 그의 고향 안동에서 지내고 있다.
그런 모친에게  "어떻게 지내냐"며 안부전화를 드리면 "독거노인 자우너봉사하러 다닌다"는 말에 황 사장은 "어머님이 독거노인이지 않느냐"고 농담을 던지면서도 내심 고맙고 장한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것도 하루 4km 이상을 걸어 다니시는 것이 자식으로서 불안하기는 하지만, 이웃 노인들과 자원봉사하시는 어머님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고 설명했다.

한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기업인으로 삶을 살다가 문득 인생길을 뒤돌아보면서 뭔가 가치 있는 일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던 어느 날, 우연히 그는 매달 적지 않는 돈이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발견한다. 그의 아내가 자신도 모르게 월드비전에 후원을 하고 있었다. 타인을 배려하고 봉사하는 어머니의 정성과 아내의 작은 후원이 결국 자신과 가족을
위한 길이라며 만족해하며 이들에게 마음속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자신이 대만과 한국을 오가며 여러 단체에서 희생과 봉사로 그 빚을 갚아나가고 있는 셈이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나머지 길이 바로 자신이 가지 못한 대신 그의 가족으로부터 시작되는 배려의 길이 아닐까?



<자료출처 : 월간 프레지던트 2008년 5월호>

 
 
 
 

                  Quelques Larmes De Pluie - Dal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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