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world-OKTA]/월드-옥타 사람들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World-OKTA 상임고문)

향기男 피스톨金 2010. 7. 15. 12:20

 




입양고아에서 미국주 상원위원으로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World-OKTA 상임고문)

기사입력 2010-07-12 11:28 | 최종수정 2010-07-12 13:41



신호범[워싱턴주 상원의원/World-OKTA 상임고문]

 

안녕하세요, 국회보 독자 여러분. 저는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 신호범(미국명 Paull Shin)입니다.
저는 경기도 파주에서 1935년 태어났습니다. 4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마저 집을 떠나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난 1950년까지 서울 거리 뒷골목에서 구걸을 하며 부랑아로 살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저는 공산군을 피해 충남 예산으로 피란을 갔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는 예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 이동하는 미군 트럭주변에서 매일 같이 손을 흔들며 구걸을 했습니다. “헬로! 껌, 껌. 헬로! 초콜릿.” 군인들이 먹을 것을 던지기바라며 저는 매일같이 그렇게 외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제가 먹을 것을 바라며 손을 내민 순간 한 군인이 저를 트럭에 올려 태웠습니다. 일련의 단순한 행동이 제게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마련해준 것입니다.

 

열여덟 살에 미 군의관에게 입양돼 미국으로

미군 막사로 간 저는 장교를 돕는 하우스보이로 일을 했습니다. 군화를 닦고 옷을 빨고 다림질을 하는 등 하우스보이로서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그러던 중, 치과 군의관인레이 폴 박사가 제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제게 친밀감을 보이자 저도 그를 무척 따랐고 그 결과 입양까지 결정이 됐습니다. 그 때 제 나이 열여섯이었습니다. 이후 입양에 필요한 서류 등


 

신호범 의원이 초등학교를 찾아 특강을 하고 있다.

준비작업으로 2년이 흘렀고 열여덟 살이 되어서야 미국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자 양어머니와 3명의 형제들(모두 금발의 백인이었습니다)이 저를 마중 나왔습니다. 그 순간 이 자리가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그들은 친어머니와 형제들처럼 제게 크나큰 애정과 따뜻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가정에서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안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군복이 아닌 민간인의 옷을 입게 됐고, 제 방을 갖게 됐으며, 가족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무엇보다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첫 저녁 식사 후 양아버지는 제게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고, 저는 주저하지 않고 공부가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양아버지는 내일 고등학교에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죄송하지만 한국에서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그가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았느냐”고 다시 물었고, 그 순간 당황한 저는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나이 때문에 번번이 입학 퇴짜, 고졸검정고시로 대학 입학

 

다음날 양아버지와 저는 초등학교에 갔으나 입학을 거절당했습니다.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는 “좋아, 그러면 중학교로 가는 거야!” 라며 중학교에 갔고, 우리는 또 다시 나이가 많아 입학이 안된다는 불허통지를 받았습니다.

 

사정이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고등학교로 향했습니다. 교장이 저를 보더니 “초등학교도, 중학교 다니지 않았는데 어떻게 너를 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겠냐”라며 입학을 거절했습니다. 세 번째 퇴짜에 저는 몹시 실망했고, 마음에 큰 상처받아 그만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러자 교장이 제게 왜 우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제가 미국에 온 이유 중 하나는 교육을 받기 위해서인데 그 꿈이 불가능해져서 그랬다”고 울먹거렸습니다. 그러자 교장은 “정말 그렇게 공부하고 싶냐”며 제게 GED(general equivalency diploma, 고졸학력인증서로우리나라의 검정고시와 비슷함) 프로그램을 알려주며 이 시험에 통과하면 고등학교 졸업학력을 인정받고,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이후 교장인 에반스 여사는 낮 시간 동안 제게 특별 개인교습을 하며 영어, 사회과학, 역사 등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양아버지가 수학과 화학, 물리학을 가르쳤고, 양어머니 역시 저를 매일 학교에 데려다주는 한편 영어공부를 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여러분들의 노력 덕분에 저는 1년 반만에 GED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브리검영 대학에서 대학졸업장을 따고, 피츠버그대(국제관계학)와 워싱턴대(인문학)에서 석사, 그리고 마침내 1977년 워싱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학위 공부를 하는 도중, 저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다음과 같은 경구를 마주쳤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받은 축복을 깨닫고, 봉사로써 그것에 답하는 사람이다.” 저는 미국에서 많은 것을 받았기에 남은 삶을 봉사에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 이후 31년간 계속된 교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교직생활 동안 저는 주지사로부터 통상 이슈에 대한 자문을 받곤 했습니다. 네 명의 주지사에게 자문을 하며, 아시아 국가들과의 통상 확대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리고 지역사회 봉사도 활발하게 했습니다. 학부모회(PTA), 국제무역협회(ITA), 유나이티드 웨이(자선단체), 보이스카우트, YMCA, 로타리클럽 등이 제가 활동했던 단체들입니다. 이외에 세계아동부모협회(WACAP), 홀트, 그리고 제가 공동으로 설립한 KIDS(Korean Identity Development Society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아이들의 미국 생활적응을 돕는 기구)등에서 꾸준히 봉사활동을 펼쳤습니다.

 

훈련병 시절 쓰디쓴 인종 차별 경험

지금껏 말씀드린 제 경험은 미국사회에서 특히 예외적인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미국에는 많은 성공한, 봉사의 삶을 사는 아시안계 이민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미국에서 소수인종으로 살아오며 어려운 점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미국 생활 중 제가 부딪친 가장 단순하고도 중요한 의문점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껏 사람들은 제게 일본인이냐 묻고, 아니라고 말하면 그러면 중국인이냐 라고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당신은 누구냐”는 대답이 되돌아왔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미국인이다”라고 대답했지만, 사람들은 “아뇨, 그것 말고 어디서 왔냐”고 항상 되묻곤 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이 매우 불편했습니다. 미국인이 되려고 수십년 간 아무리 노력해도 제게 소수인종으로서의 딱지가 붙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아시안계, 아니 미국내의 모든 소수인종이 겪는 문제일 것입니다. 비참한 상황에서 한국을 떠났기 때문에 저는 미국인이 되고자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미국인’이 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그 예로 저는 한 교회에 다녔는데 주위를 보니 제가 유일한 동양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은 친절했지만 저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미국인이 되고자 집착했던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후회스럽기도 합니다.

그렇게 방황하던 중 몇 가지 경험을 통해 운 좋게도 저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확인하게 됐습니다. 저는 1958년 미 육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독일에 파견되기 전 텍사스 포트후드 에서 신병교육을 받았는데, 막사에서 매일 ‘지아이 그럽(일명‘짬밥’)’을 먹다보니 저를 비롯한 훈련병들은 그만 질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몇몇 동기들과 주말을 이용해 시내로 나가 ‘사제 음식’을 먹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훌륭한 식당을 찾기 위해 버스를 타고 템플이라는도시로 갔고, 훌륭한 식당을 찾아냈습니다. 화려한 샹들리에에 흰 테이블보,그리고 유니폼을 입은 웨이터가 서빙을 하는, 한 눈에 보기에도 매우 고급식당처럼 보였습니다.

 

 
 
세계한인정치인협의회에 참석한 한인 동료 정치인과 함께

 

동료들과 함께 막 식당에 들어서려는 순간 “백인전용”이라는 팻말을 보았습니다. 어찌 할 바 몰라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퇴짜에 대한 공포심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동기들이 “괜찮아 폴, 너는 우리 일행이고 군인이잖아”라며 저를 안심시켰고 식당으로 이끌었습니다.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저를 본 주인이 갑자기 달려와 여기서 뭐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저를 쑥 뽑아 들더니 플로어로 밀쳐냈습니다. 몹시 흥분한 그는 무척 화를 냈고, 식당문을 발로 차 문을 열어 저를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쳐 몸도 아팠지만, 차별과 퇴짜라는 더 깊은 내면의 슬픔에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그날 밤 베개가 흠뻑 젖을 정도로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디에 속한 것인가? 또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정치 영역에서의 봉사 결심 뒤 주 하원의원 출마제가 이 비극적인 경험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은 거절의 공포를 긍정적인 확신으로 바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정적인 상황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응을 부정적
으로 할지 긍정적으로 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저는 문제를해결하고, 역경의 한 가운데에서조차 자신의 위치를 개선하는 그런 긍정적 인생관을 배웠습니다. 군대에서 저는 명예와 헌신, 형제애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 환경과 주변 사람들에 대해 편안한 감정을 느끼게 됐습니다. 물론 여전히 인종문제 때문에 차별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무지개를 찾아 미국에 왔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저의 새 가족만큼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사회는 미국인이 되려는 저의 의지를 끊임없이 시험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정체성과 참된 자아를 찾아야만 했고, 저의 뿌리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한국의 언어와 역사, 문화를 공부하면서 저의 독특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것을 현재 저의 상황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렇게 하며 저는 제 자신과 화해를 하고, 미국사회에서 저의 역할을 이해했습니다. 저를 불편해하는 백인들에게 먼저 우정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자기 연민이라는 것은 파괴적인 힘이며, 자신을 믿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가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정체성을 확립한 후 저는 수많은 축복을 준 이나라에 보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적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치분야에서 봉사하는 게 주류사회로 통합되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느꼈습니다.
1992년, 저는 워싱턴주 의회에 출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의 상대는 4선의 현직의원으로 95% 이상이 백인인 이 지역에서 저명한 인사였습니다. 제가 출마를 선언하자 친구들과 지인, 그리고 언론에서는 제 꿈이 불가능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봉사를 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와 열망이 있었습니다. 출마를 결심한 뒤 저는 매일 지역구의 가정을 방문해 제가 입양아 출신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미국에서 너무 많은 기회와 축복을 받았고, 이제는 제가 받은것을 돌려줘야 할 때라고 호소했습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은 친절하고 공손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저를 찍겠다고 했지만 저는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드디어 개표가 됐고, 놀랍게도 저는 11% 포인트차로 이겼습니다. 저는 선거운동을 하며 놀랄만한 계시를 경험했습니다. 피부색 때문에 공직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는 제가 미국인에게 완벽히 받아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92년 승리는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가진 두려움은 단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신발 4켤레가 닳도록 가가호호 방문, 주 상원의원 당선

선거 운동 기간 중 저는 저의 방문으로 혼자 있는 것을 방해 받은 듯한 한 노신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동양인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면 어때?”라며 제 인종에 대해 경멸적인 단어를 사용해가며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매우 상처를 받았으나 미소를 띠며 감정을 숨겼습니다. 저는 그에게 저와 제 아내, 아이들에 대해 말하고, 제가 30년 이상 이곳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있음을 말하며 저의 존재를 정당화하려 노력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제가 오기 전, 당신의 선조 때부터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라는 것을 설명했고, 만일 당신이 먼저 떠난다면 저도 당신을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그는 멋쩍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분노는 천천히 가라앉았고, 부정적인 교감은 긍정적인 경험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저를 찍겠다고 말했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저의 선거홍보물을 자기 집 마당에 걸어놓는 것을 허용했습니다.이제 그는 저의 가장 열성적인 지지자 중 한 명입니다.

 
 
국회를 찾은 신호범 상원의원이 박희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안내를 받고 있다.

 

1998년 저는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출마했습니다. 저의 상대는 26년 된 노련한 정치인이었고 이는 또다시 불가능한 도전으로 여겨졌습니다. 일단 출마를 결정하고 난 뒤 저는 매일 9시간씩 9개월간 4켤레의 신발이 닳도록 지역구 가가호호를 방문했습니다. 2만8천 가구를 방문해 제가 필사적으로 상원에서 일할 것임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종에 관계없이 그 누구라도 올바른 정신과 결심이 있다면 그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재외 한국인의 권리 증진 위해 한국 국회가 더 지원해야 미국에 있는 한국 동포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을 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뿌리를 찾으러, 어떤 사람들은 구직을 위해,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가정과 친지 방
문을 위해 한국에 가곤합니다. 저는 비록 미국에 입양되었지만 제 뿌리와 유산에 대해 깊은 관심이있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였습니다. 한국으로 가 저를 버린 아버지를 찾아보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쓰디쓴 기
분이었지만 아버지를 만나 눈물의 대화를 나누며 아버지를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한때 잊혀졌던 관계를 새롭게 복원했습니다.

 

저는 친아버지가 재혼을 해 4명의 이복형제와 1명의 이복남매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친아버지의 가족들을 미국으로 초청했고,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제가 저의 유산을 찾으려는 욕구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유산과 가정, 그리고 다른 기회를 찾으려 자신이 태어난 곳에 찾아가는 사람들을 제가 지지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대한민국국회가 다른 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이를 증진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국회가 자신의 꿈을 이뤄가려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정책을 만들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의 진심어린 꿈을 성취하게 하는 긍정적인 생각과 확신의 힘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습니다.

해외 한국인들의 권리와 복지 향상을 위해 대한민국국회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대한민국국회가 재외 한국인이 자신의 꿈을 추구하고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 안에서 기여하는데 도움을 주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자료출처 : 국회보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