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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포크롭카" 언덕서 고선지의 포효 들리는 듯

향기男 피스톨金 2006. 1. 20. 12:14

 

             카자흐스탄 탈라스,

 

"포크롭카" 언덕서 고선지의 포효 들리는 듯


[한겨레]

국경 초소에서 동남쪽 7㎞, 격전장이던 탈라스강변의 평원 지하에 적어도 200여기 무덤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카자흐스탄 대초원을 가로질러 이곳 잠부르를 찾은 것은 저 유명한 탈라스 전쟁의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고구려 유민의 후예인 명장 고선지는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11년간(740~751)

 

다섯 차례의 서역원정을 단행했다. 그 중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멀리 석국(石國: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수도인 타슈켄트 일원)에 대한 원정이다. 특히 다섯 번째 원정 때, 당군과 석국·이슬람 연합군간에 벌어진 전쟁을 흔히 ‘탈라스 전쟁’이라고 한다. 탈라스라는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전쟁터가 어딘가’ 논란

 

이 전쟁은 세계 전쟁사, 문명교류사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사에도 길이 남을 역사적 장거였다. 동서양 학계에서도 일련의 연구가 진행되어 그 면모가 개략적이나마 드러나기는 했으나, 아직도 여러 측면에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전쟁터가 도대체 어딘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막연하게 역사상의 구(舊) 탈라스라고 지목하지만, 그 탈라스가 오늘날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인지를 놓고도 탈라스성이니, 탈라스평원이니, 탈라스강이니 하는 등의 주장이 엇갈린다.


한가닥 실마리라도 찾았으면 하는 기대에 어제의 여독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찍 잠에서 깼다. 오늘 일정도 만만찮아 서둘러야 했다. 아침 7시 반 잠부르 호텔을 떠나 시원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남쪽으로 약 30분간 20km쯤을 달렸다. 다음 목표인 키르기스스탄으로 들어가는 국경 초소가 나타났다. 아침인데도 국경은 몹시 붐빈다.

 

과객 대부분은 보따리 장수들이나, 친척 방문자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즉석에서 입국비자를 내주어 국경 통과 과정은 무사했다. 알마티부터 길라잡이를 해준 현지 안내원은 키르기스스탄 여행사가 파견한 22살의 아르쳄이다.

 

 대학 영어과를 갓 나와 여행사 가이드로 일하는 그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젊은이다. 우리가 탈라스 전쟁의 현장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지역 전문가 나르보토예브를 안내자로 초청했다.

 

천만 뜻밖이다. 그는 여행사의 이름으로 전통모자인 ‘칼팍’(돔 모양의 흰색 펠트모자)을 선물하기도 했다.

일행이 국경 초소에서 5분 거리인 한 유르트(이동식 텐트)모양의 커피숍 마당에 이르렀을 때다. 50대 후반의 주인 아킬베크가 한사코 우리를 집안에 초대했다.

 

가끔 엄지손가락을 내밀면서 2002년 한·일 월드컵 등에 관한 이야기를 신나게 한다. 부인과 딸을 불러다가 시큼한 ‘크므스(마유주)’와 홍차를 내오면서 친절하게 대접했다. 헤어지면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좋은 추억을 되새겨준다.

 

이윽고 나르보토예브가 왔다. 탈라스의 ‘마나스박물관’ 학예연구관을 10여년 지낸 40대 중반 역사학자다. 방문 목적을 귀담아 듣고는 자신만만하게 안내에 응했다. 그의 자신감에서 무언가 길조를 예감했다.

 

탈라스는 원래 강 이름이다. 톈산산맥 남쪽 지맥인 탈라스 연산(連山)에서 발원해 무쥰산맥에 이르러 복류(伏流: 땅 속으로 스며서 흐르는 물)로 변한다. 길이 230km에 이르는 탈라스 강은 기원전 2세기 ‘도뢰수(都賴水)’란 이름으로 한적에 나타난다.

 

강 일대는 사카족과 월지, 강거, 흉노 등 유목 민족들의 활동 무대였다가, 6세기 말엽 서돌궐 치하에 들어갔다. 이 무렵 비잔틴 제국은 서돌궐과 화약을 맺기 위해 제마르코스를 사절로 파견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탈라스는 서방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아랍 문헌에도 탈라스에 관한 기록이 있다.

 

당나라 때는 ‘달라사’ 등의 이름으로 중국 통치판도 안에 들어가면서 한적에도 관련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628년 구법여행을 위해 인도로 가면서 이곳에 들렀던 승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 탈라스성 둘레는 8~9리에 달하고, 성안에는 여러 나라 호상(胡商)들이 뒤섞여 살며, 토질은 밀, 포도를 심는 데 적당하다는 내용을 적었다.

 

또 날씨는 춥고 바람이 많이 분다는 기록도 덧붙여 놓았다.

탈라스는 지리적으로 초원로와 오아시스로의 접지점에 자리잡아 역대 교역이 번성했다. 751년 7월 역사적인 탈라스 전쟁이 벌어진 뒤 그 위명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9세기 말 사만조가 이 고도를 공략하면서 주민들은 이슬람에 대거 귀의했다. 10세기 이후엔 카라한과 카라키타이의 관할 아래 있으면서 전성기를 누리다 13세기 몽골 점령군에게 파괴된다. 주로 러시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많은 유적들은 탈라스의 이런 역사적 궤적을 여실히 증명한다.

 


한적의 기록과 출토된 유물 등을 참고해 러시아 동양학자 바르톨트는 1904년 탈라스강변에 위치한 당시 인구 2만의 작은 도시 ‘올리아타(奧立阿塔)’를 구탈라스에 비정했다.

 

러시아 10월 혁명 뒤엔 옛 소련 당국이 카자흐족 대시인 잠부르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잠부르’라고 개명해 오늘날에까지 이른다.

 요컨대, 고대 중앙아시아사와 동서교류사에 등장하는 탈라스는 탈라스강 중류에 있는 지금의 카자흐스탄 잠부르가 되는 셈이다.

 

 

옛 탈라스 ‘잠부르’는 분명 아니다

 

그런데 일부 연구자들은 이 옛 탈라스(카자흐어로는 ‘타라즈’)와 탈라스강 상류에 있는, 현 키르기스스탄의 탈라스(키르기즈어)를 혼동시하고 있다. 다행히 이런 혼란은 현지 답사에서 시비를 가려낼 수 있었다. 나르보토예브의 안내를 받으며 동남 방향으로 40km쯤 가니 탈라스강 왼쪽으로 아담한 소도시 탈라스가 나타난다.

 

인구 5만명(주변까지 약 20만명)의 이 도시는 20세기 초에 건설되었다. 어디를 봐도 고적은 눈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이 도시가 1200여년 전 전쟁의 현장일 수는 없다. 잠부르와 키르기스스탄의 탈라스는 서로 다른 도시인 것이다.

남은 문제는 구체적인 전투의 현장이 어딘가 하는 것이다.

 

문헌기록, 지세로 보아 오늘날 잠부르, 즉 구탈라스가 옛 전장 같지는 않고, 어딘가 다른 곳일 성싶다는 의혹이 내내 머리 속을 맴돌았었다. 때문에 이 지역 출신 사학자의 안내는 필자를 솔깃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바르톨드와 베른슈탐, 압잠손 같은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키르기스스탄 국경 초소에서 동남쪽으로 7km 떨어진 탈라스강 오른쪽의 포크롭카 마을 주위 언덕이 탈라스 격전지라면서 현장을 안내했다. 그의 증언과 제시한 관련 문헌의 기록들, 지형지물, 유물 등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거의 일치해 포크롭카설은 상당한 수긍이 간다.

 

 

고구려 후예로서 기념비라도 세워야

 


이 마을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탈라스강의 물길 폭은 18m(본래는 20~30m)가량 된다. 좌우 강안이 넓어 군사가 배수진을 치기에 유리하다. 이에 비해 27km 북상해서 구탈라스를 지나는 이 강의 폭은 10m쯤밖에 안되며 강안도 퍽 좁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강안을 따라 아득히 펼쳐진 드넓은 언덕 평원이 수만 대군들끼리 부딪히는 회전의 현장으로는 적격한 지형이라는 점이었다.

이곳은 당시 당나라 치하 페르가나 분지의 서쪽 끝이었으므로 대군을 더 이상 서진시킨다는 것은 전략적 무리수였을 것이다.

 

사막, 산간 전투에 익숙했던 당군으로는 원정 중 처음 큰 강을 건너 수륙전을 벌여야 하는 전술상 부담도 있었다. 고선지는 이런 지형적·전략적 특성 때문에 평원에서 5일간 속전속결식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격전장이던 평원 지하에 적어도 200여기의 무덤이 있을 것이란 추정이 나온다.

 

실제로 허허벌판 군데군데에 무덤을 방불케 하는 흙무지들이 눈에 띈다. 재정문제로 발굴이 어려우니 한국쪽의 동참이 요망된다고 나르보토예브는 주문했다. 언젠가 유물이 발굴되면 1300년간 탈라스 전쟁이 숨겨놓았던 여러 비밀들의 단서가 잡힐 것이다.

 

이곳을 떠나 수도 비시켁으로 가는 고산길은 내내 탈라스강 물줄기와 나란히 했다. 해발 3330m의 오토멕 고개에서 멀리 탈라스연산의 최고봉을 주시하다 실오리 같은 반사체를 목격했다. 강의 발원지라고 한다. 탈라스강은 숱한 역사의 사연을 싣고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포크롭카 평원 한가운데 서서 아득히 뻗어간 톈산산맥의 묏부리들을 바라보노라니, 당나라 시선 두보가 <고도호총마행>(高都護총馬行)이란 7언시에서 읊었듯, 맹장 고선지가 번개보다 빠르다는 무적 한혈마를 타고 묏부리들을 단숨에 넘어 탈라스 혈전의 전장에서 장검 뽑아들고 7만 대군을 발호했을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일세를 풍미한 장군의 위적을 기리는 전적비 하나쯤 세워놓는 것이 우리 후예들이 감당할 몫이 아니겠는가. 탈라스 전쟁터의 현장 확인은 가장 의미심장한 실크로드 재발견 가운데 하나였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사진 이종근 기자

 

 

탈라스 전쟁은

 

서구에 종이를 전파한 계기가 된 탈라스 대전투는 천보 10년인 751년 7월말 닷새동안 벌어졌다.

 

아랍 이슬람 문명과 중국 문명이 서역 패권을 걸고 맞붙었던 이 운명의 대회전은 애초 고선지의 대담한 기습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3만 대군을 거느린 채 안서도호부가 있던 신장성 쿠처 부근에서 곧장 북상해 텐산산맥을 넘고 지맥인 알탄 산 기슭의 탈라스 평원까지 약 800리길을 주파했다.

 

적진의 길목 안을 치고 들어가는 이 전법은 4년 전인 747년 해발 4000여m에 달하는 파미르 다르호트 고개(탄구령)를 넘어 토번(티베트)군 아성이던 소발률국을 기습했던 전례를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 야심만만한 작전은 탈라스 평원에 도착한 지 닷새만에 대패전으로 끝난다. 당군의 일부였던 서역민족 케르룩·발한나 인들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키면서 거꾸로 아랍 군의 협공을 당해 궤멸한 것이다.

아랍 역사가 이븐 알 아시르는 <연대기>에서 당군 5만이 전사했고, 2만명이 포로가 됐다고 적었다.

 

 

중국 대 아랍·이슬람 문명의 대회전


대패한 고선지의 당군 포로들 종이 전파

 

익히 알려진대로, 사마르칸드로 끌려간 포로들 중 일부 장인들이 서방에 제지술을 퍼뜨린 주역이 되었음은 압바스 왕조의 동방총독 아부 무슬림의 증언으로 역사에 남게됐다.

 

중국인 두우의 사서인 <통전>에서도 귀환 포로 두환의 기록인 <경행기>일부를 빌어 당군 포로들이 비단 짜기, 금은 세공 기법 등을 아랍권에서 처음 시작했다고 적었다.

 

<자치통감><당서> 등의 중국 사서들을 보면 탈라스 전쟁은 다분히 외교 분쟁의 뒤치다꺼리 산물이었다. 발발 원인부터가 당 현종의 외교 실책에서 비롯됐다. 전해 단행된 고선지의 석국(타슈켄트) 정벌에서 사로잡은 석국 왕을 현종이 눈치없이 목을 베어 처형해버렸고, 분노한 서역 조공국들은 압바스 왕조와 굳건한 반당 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고선지는 이 반당 연합군이 신장성의 당나라 거점인 안서사군을 치러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재빨리 아랍군 본거지 부근인 탈라스로 치고 들어가 선수를 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민첩한 기동전 전략은 정보전에서의 패배로 빛이 바랬다. 이븐 살리히 휘하의 아랍 연합군은 고선지 군의 이동 통로를 손바닥 보듯 파악하고, 탈라스강 너머에 30만 대군을 옮겨 대비하고 있었다. 후대 사가들은 같은 계통 민족인 석국 왕을 참살한 데 앙심을 품은 케르룩·발라한인들이 아랍군과 내통해 군사 관련 정보를 미리 건네준 것으로 추정한다.

 

탈라스 강가 건너편 알라타우 산맥 기슭에서 닷새동안 적정을 살피던 사라센 연합군은 케르룩·발한인들의 반란을 신호로, 물밀듯 강을 건넜다. 당군이 주둔했던 포크롭카 마을 뒤편의 수백만평 구릉으로 짓쳐 들어간 연합군은 반군과 함께 당군을 알탄산 골짜기로 몰아넣으며 유린했다. 전세는 하루만에 판가름났다.

 

산더미 같은 병사들의 주검을 남긴 채 고선지는 부하 이사업 등과 백석령을 통해 허겁지겁 퇴각했다.

 

<신당서>‘이사업’전에는 “험한 백석령에서 꼬챙이에 꿴 생선처럼 늘어선 적의 보병과 기병들을 몽둥이로 마구 때려 죽이며 길을 터 귀환했다”고 당시의 참상을 기록해놓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이라는 손자 병법의 금언을 극명하게 보여준 반면교사가 바로 탈라스 전쟁이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실크로드 답사단

 

취재 임종업 blitz@hani.co.kr,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김경호 jijae@hani.co.kr,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한겨레 2006-01-17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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