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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세계영화기행,러브레터

향기男 피스톨金 2006. 2. 6. 10:00

 

             이동진의 세계영화기행

 

                      러브레터


새하얀 눈덮인 학교, 히로코 닮은 여학생들이 까르르 웃으며 도망간다
풋사랑 같은 첫사랑 그 상처가 가장 깊다
 

[조선일보]

그런 눈(雪)은 처음이었다. 홋카이도의 삿포로를 떠난 밤기차가 오타루(小木尊)를 향해 달리는 동안, 눈은 세상의 질료(質料)였고 환경이었으며 리듬이었다.

 

비명 대신 기적소리를 남기며 눈의 나라로 빨려 들어간 기차가 소실점을 향해 두 줄 철로를 외로이 탈 때, 철길 좌우로 생겨나는 눈보라가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던 현실감을 지웠다.

 

수직으로 쏟아지는 눈과 수평으로 펼쳐지는 눈이 호수처럼 고인 눈과 만나는 하얀 밤은 몽롱했다.

110년 되었다는 전통 여관에 묵었더니 아침 8시에 주인 여자가 들어와 이불을 갠 뒤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한다. 방 한가운데에 차린 정갈한 식사를 하고 ‘러브 레터’의 촬영지인 오타루 시내를 걸었다.


 

눈과 물이 어울려 너무나 아름다운 운하 주변을 산책하다 영화 속에 나왔던 유리 공방(工房)의 전망대에 올랐더니 비망록에 한국 관광객들이 적어놓은 구절이 적잖이 보였다.

 

“△△와 ◇◇가 처음 떠난 여행. 너무 좋다. 여기 오길 잘했어요”라고 쓴 남자의 메모 밑에 여자가 짧게 한 줄 덧붙였다. “△△씨, 사랑해요.” 사랑의 추억은 사라져도, 사랑의 흔적은 불멸한다.

오전의 오타루 우체국은 분주했다. 우체국 앞 사거리에서 편지를 부친 뒤 자전거를 타고 떠나려던 후지이 이쓰키(女)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릴 듣고 고개를 돌린다.

 

부른 사람은 등반 사고로 죽은 애인 후지이 이쓰키(男)를 잊지 못해 그가 중학 시절 살았던 이곳까지 찾아온 히로코였다. 방금 스쳐지나간 사람이 동급생이었던 이쓰키(男)에 대한 추억을 자신에게 편지로 일일이 알려줬던 동명이인 이쓰키(女)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파 속에서 이쓰키(女)는 히로코를 알아보지 못한다.

‘러브 레터’에선 그렇게 환상인 듯 현실인 듯 모호한 장면들이 많았다. 눈 세상인 오타루에서 찍은 그 영화에선 그렇게 해도 괜찮았다. 겨울은 ‘환(幻)’의 계절이니까.

 

새로 내리는 눈이 이미 내린 눈 위에 켜켜이 몸을 부리며 일종의 나이테를 이루는 곳에선 삶이 좀더 꿈처럼 느껴질 테니까. 사람의 키를 훌쩍 넘겨 쌓인 눈 사이로 낸 좁은 길 위를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차를 타고 동남쪽으로 10여분 가자 아사리(朝理) 중학교가 나왔다. 극중 두 명의 이쓰키가 다녔던 학교였다. 40대 일본어 교사 이타바시 도우루씨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작은 교사(校舍) 곳곳을 둘러봤다.


 


촬영 장소였다는 2학년 B반에 들어가 이쓰키(男)의 교실 뒤쪽 의자에 앉아보니 내가 지나온 10대 시절과 영화 속 학교 생활이 연이어 떠오르며 겹쳐졌다.

 

정문 쪽으로 되돌아갈 때 다른 교사와 마주치자 영어로 대화하느라 이제껏 과묵했던 이타바시씨가 새삼 신기한 듯 들뜬 일본어로 외쳤다. “러브 레터 때문에 한국에서 찾아온 기자야.”

현관에서 여학생들을 만났다.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까르르 웃으며 도망간다. 3학년 농구부원이라는데 생각보다 작았다. 어른에게 아이는 언제나 어려 보인다.

 

그러나 그 어린 아이들도 ‘러브 레터’에서처럼 그들만의 진지한 사랑을 앓는다. 풋사랑이라고 웃어넘기지 말 것. 첫 상처가 가장 깊다.

오타루와 삿포로 중간쯤에 있는 제니바코 역 부근엔 극중 이쓰키(女)가 살았던 집이 있다. 사전에 여러 차례 전화했지만 연결되지 않아 주소만 들고 택시를 탔다.

 

때마침 쏟아지는 폭설 속에서 헤매다가 간신히 근처에 도착했지만 엄청난 눈 때문에 차가 집 앞까지 갈 수 없어 200여 미터를 걸었다.

 

언덕 아래 골목 끝 그 집은 한눈에 극중 장면들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작품 속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고 정적 속 함박눈만 쌓여갔다. 눈(雪)은 눈(眼)으로 확인할 수 있는 침묵이었다.

히로코가 눈 속에서 누워 있던 첫 장면을 찍은 덴구산(天狗山)은 단체로 스키장에 온 초등학생들로 붐볐다. 스노보드를 든 사람들에 섞여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올랐다.

 

저 멀리 눈 덮인 시가지 전체와 바다를 눈 멀도록 내려다보자니 한 해의 시작과 끝이 모두 들어 있는 겨울은 ‘환(環)’의 계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계를 없애며 세상을 침묵에 잠기게 하는 몽환적인 눈 속에선 시작도 끝도 결국 서로 꼬리를 물고 끝없이 도는 시간의 환 위 작은 점에 지나지 않았다.

스키장에서 내려가는 케이블카에 타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러브 레터’는 이미 세상을 떠난 한 남자와의 사랑을 떠올리는 두 여자의 추억을 다룬 영화였다.

 

그리스 신화에서 시간의 신은 하늘의 신과 땅의 신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타루의 겨울, 하늘과 땅 사이엔 온통 새하얀 눈이 시간을 덮고 있었다. 퍼붓는 눈 속에서 열정도 그리움도 꿈도 현실도 모두 아득하게만 여겨졌다.


케이블카가 덜컹 움직였다. 다시 세상으로 내려가야 할 시간이었다. 숨을 참은 채 죽은 듯 눈 속에 한참 누웠다가 간신히 숨을 토하며 일어나 산을 허위허위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히로코처럼.

 

(오타루,일본=이동진기자 djlee.chosun.com)


조선일보 2006-02-0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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