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Travel)이야기들/재밋는 러시아몽골

발하쉬를 떠나 카작의 수도인 아스타나로

향기男 피스톨金 2006. 2. 13. 10:13

 

 

  발하쉬를 떠나 카작의 수도인 아스타나로

 
▲ 발하쉬 호수.
ⓒ2006 김준희
발하쉬 시에서 조금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아파트와 나무 사이로 멀리 발하쉬 호수가 보인다. 도시에서 바라본 그 파란 호수는 푸른 하늘과 겹쳐져서 수평선까지 뻗어 있다. 맑은 날 오전에 햇살을 받아서 하얗게 반짝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조용한 바다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도시에서 10분만 걸어서 호수가로 내려가면 그 모습은 멀리서 보았던 것과는 딴판이다. 도시와 가까운 곳에 있는 호수 주변에는 깨진 병과 정체불명의 고철 덩어리와 쓰레기가 널려있다. 그리고 한쪽에 있는 공장에서 뿜어내는 연기가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고 있다.

이 호수는 크기로 볼 때 유라시아 대륙의 어디에 내놓더라도 손색이 없는 큰 호수다. 하지만 다른 커다란 호수들, 바이칼이나 이식쿨 만큼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고 관광지로 개발되지도 않았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호수의 주변이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는 온통 황무지라서 그럴 수도 있고, 공장의 매연으로 오염되어서 일 수도 있을 것이다.

봄 가을이 짧은 데다가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곳, 심한 바람과 공장의 매연 때문에 도시의 나무와 풀도 메마르고 생기없는 모습이다. 아마 이 발하쉬 호수는 뭔가 이변이 있지 않는 이상 여행지로 알려지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이지도 못한 채 공장의 매연 속에 묻혀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발하쉬를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호수가 이렇게 오염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니까 떠날 때의 기분도 별로 좋지가 못했다. 발하쉬 시에서 4일간 머무른 것으로 어찌 전체 호수의 모습을 알 수 있을까. 그저 전체호수의 풍경은 내가 보았던 모습과 다르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발하쉬를 떠나서 수도인 아스타나까지 가기로 했다.

"거기 꼭 평촌 같은 곳이야"

알마티에 있을 때 한우리 민박집에서 만난 사람이 했던 말이다. 평촌에 가본 기억이 없는 나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수도를 아스카나로 이전한지 얼마 되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카자흐스탄에 온 이상 수도 구경은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발하쉬에서 저녁 6시 30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탔다. 아스타나에는 내일 오후 2시에 도착한다고 한다. 이번에 구한 표는 문이 있는 침대칸, 그러니까 4인용 쿠페다. 내 자리가 있는 칸에는 러시아 남자 한명, 그리고 여자 2명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다.

"내 이름은 안드레이야."

키가 크고 늘씬한 체격을 가진 안드레이는 붙임성 있게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영어를 잘하는 28살의 안드레이는 8개월 된 딸의 아버지라고 한다. 예카테린부르크에 있는 한 연구소에서 핵물리학을 연구한다는 그는, 지금 휴가를 맞아서 어머니가 살고 있는 발하쉬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이 기차가 아스타나를 거쳐서 러시아 국경을 넘어 예카테린부르크까지 가는 모양이다. 다른 두 명의 여자는 내일 새벽에 '카라간디'라는 곳에서 내린다고 한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추워지는 기분이다. 우리는 조금 얘기를 하다가 각자 침대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 발하쉬 호수.
ⓒ2006 김준희
안드레이가 깨우는 바람에 새벽에 눈을 떴다. 내 자리는 아래층 침대였는데 그 침대 밑에 여자들의 짐이 있었던 것이다. 얼떨결에 눈을 떠서 침대를 들어올리고 그 밑에 있던 짐을 내주고 다시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시간은 새벽 5시 30분. 이곳은 발하쉬와 아스타나의 중간 지점인 카라간디. 알마티에서 한참을 북쪽으로 올라온 곳이다. 안드레이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몇 시간 동안 정차했다가 다시 출발한다고 한다.

차가운 새벽 공기 때문에 이미 잠은 달아난 상태다. 여자들이 내렸기 때문에 우리 칸에는 나와 안드레이 뿐. 우리는 먹을 것을 꺼내서 작은 탁자에 펼쳐놓고 아침밥을 먹기 시작했다. 안드레이는 어머니가 싸주셨다면서 튀긴 생선요리와 토마토를 꺼냈고 나는 바자르에서 산 빵과 오렌지를 내놓았다. 안드레이의 목적지인 예카테린부르크까지는 2박 3일이 걸린다고 한다.

"여태까지 어디 어디 여행했어?"

내가 중앙아시아를 여행 중이라니까 안드레이가 나에게 물었다.

"몽골,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거쳐서 카자흐스탄 여행 중이야. 얼마 후에 키르키즈스탄으로 가려고."
"러시아는 어디 가봤어?"
"바이칼. 이르쿠츠크하고 바이칼만 가봤지."

안드레이는 두툼한 러시아의 지도책을 꺼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혹시 나중에라도 기회가 되거든 페테르부르크에 꼭 가봐. 그 주위에 커다란 호수가 있는데 정말 아름답거든."
"넌 가봤니?"
"응. 난 여러 번 가봤어. 좀 춥기는 하지만 정말 멋진 곳이야."

밥을 먹고 나서 안드레이는 녹차를, 나는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한 소년이 우리 칸으로 들어왔다. 기차는 여전히 카라간디에서 정차한 상태다. '다스타'라는 이름의 이 14살 소년은 카라간디에서 살고 있는데 카자흐스탄 북쪽으로 캠프를 가는 길이라고 한다. 카라간디에서 태권도를 배운다는 다스타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니까 나에게 한국어 철자를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노트를 꺼내서 한국어의 자음과 모음을 순서대로 써서 가르쳐주고, 그 자음과 모음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그리고 자음과 모음이 어떻게 결합해서 글자가 되는지를 알려주었다. 서툰 영어를 구사하는 다스타는 내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써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ㄷ ㅏ ㅅ ㅌ ㅏ'

난 다스타에게 잘썼다고 말을 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간단하게 기본적인 철자만을 알려줬을 뿐인데 자기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다니. 난 다스타와 좀더 얘기해보고 싶었지만 얼마 후에 일어난 일 때문에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 아스타나로 가는 기차. 안드레이와 다스타.
ⓒ2006 김준희
잠시 후에 기차는 다시 출발했고 다스타는 콜라와 빵, 배를 꺼내서 먹으며 나와 안드레이에게도 권했다. 안드레이가 나에게 말했다.

"여행 끝나면 뭐할 거야?"
"글쎄.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해야지."

이 말만으로는 왠지 썰렁해보여서 한마디를 더했다.

"여행 끝나면 우선 여행기를 좀 써보려고."
"어디에? 신문에?"
"그건 아직 모르겠어."

처음에 이 말은 농담반 진담반이었다. 그냥 막연하게 계획 중이던 이야기를 꺼낸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이 말이 효과를 보는 상황이 생겼다. 경찰이 나타난 것이다.

덧붙이는 글
2005년 7월 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몽골-러시아(바이칼)-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을 배낭여행 했습니다.
[오마이뉴스 2006-02-10 17:14]    
[오마이뉴스 김준희 기자]

 

 

 

 

***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다지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