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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해남 고산의 은둔생활 눈에 선한듯 고즈넉

향기男 피스톨金 2006. 2. 18. 21:18

 

                       두륜산,

 

  해남, 고산의 은둔생활 눈에 선한듯 고즈넉


술잔을 들고 혼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니/그리던 님이 온다 해도 반가움이 이보다 더하랴/산은 말씀도 웃음도 없지만 마음은 못내 좋구나/
 
-윤선도 산중신곡(山中新曲) 중 만흥(滿興).
 

하늘을 속이면 제일 나쁜 일이고, 임금이나 어버이를 속이거나 농부가 같은 농부를 속이고, 상인이 동업자를 속이면 모두 죄를 짓게 되된.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 예순 날 하양 섭섭해 우옵내다/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있을테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해남의 끝에서 다산과 고산, 그리고 영랑을 만나다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김영랑은 각기 자신의 시대를 살면서 뚜렷한 족적인 남긴 큰 이름이다. 윤선도는 조선시대 국문학상 최고의 시조 시인으로, 정약용은 조선후기 실학사상을 구체화한 사상가로, 김영랑은 남도의 투박한 사투리를 정감있게 풀어낸 시인으로 저마다 이름을 남겼다.

 

한 인간이 남긴 정신세계를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수 있음은 복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을 찾아나서는 길은 설레임과 흥분이 교차한다. 게다가 녹우당과 다산초당, 영랑생가는 인접돼 있어 돌아보기도 수월하다.

 

땅끝마을을 출발해 77번 지방도를 타고 해남 방향으로 올라간다. 20여분을 갔을까 현산면 소재지에서 고산 윤선도 유적지라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다시 구림리 삼거리에서 좌회전, 5㎞를 가면 ‘녹우당’에 도착한다.

 

가는 길에는 고산이 9년간 은둔생활을 하며 산중신곡 등 26수의 시를 지은 금쇄동과 수정동이 있다.

 

고산은 한 평생을 유배와 낙향으로 산속이나 외딴 섬에서 보내며 산중의 정취나 자신의 회포를 담은 많은 시문을 남겼다. 금쇄동과 수정동은 고산이 유배지에서 풀려난뒤 안착한 곳으로, 두륜산 깊숙한 품안에 있다.

 

산중신곡에는 금쇄동과 수정동의 정경이 잘 묘사돼 있다. 적막감을 즐기고 싶다면 금쇄동과 수정동에 들릴 일이다.

 

금쇄동을 출발해 5분거리에 위치한 윤선도 고택에 도착했다. 아침 시간이라서 초입에 위치한 주차장은 한산하다.

 

주차장에서 보이는 녹우당(어른 2,500원, 어린이 1,000원)은 고택과 함께 나이를 먹은 늙은 은행나무가 수호신처럼 서있다. 오랜 세월 녹우당을 지킨 은행나무는 잎은 모두 떨궜지만 위세는 여전히 당당하다.

 

녹우당(綠雨堂)은 윤선도가 시작에 전념했던 고택이다. 집 뒷편에 위치한 비자나무 숲에서 바람이 불면 초록 잎이 비처럼 날린다는 데서 녹우당이라는 멋진 이름이 붙여졌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고문(古文) 시간에 접한 윤선도의 ‘오우가’‘어부사시사’‘산중신곡’은 당시에는 고역이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고졸한 멋이 담긴 절창이다.

윤선도 유적지는 입구 초입에 자리한 연못을 시작으로 녹우당과 고산유물관, 어초은사당, 비자나무 숲까지 볼거리가 많다.

 

1991년 개관한 고산유물관은 국보 240호인 공재 윤두서 자화상을 비롯해 해남윤씨 가전 고화첩, 노비문권 등 4,600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윤두서 자화상은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로 동양인의 자화상 중 최고로 꼽힌다.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부여서 가계를 더듬는 재미도 있다.

 

 


고산 윤선도와 다산 정약용의 가계를 더듬다

 

유물관에는 해남윤씨 가문에서 보존해 온 노비문서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녹우당 사랑채와 안채를 둘러본뒤 뒷편에 자리한 비자나무 숲까지 오솔길을 걷는 맛은 일품이다. 바람소리에 녹색 잎이 쓸려 올 듯 싶고, 산새 소리만 적막한 공기를 가를 뿐이다.

 

녹우당에서 정약용의 다산초당까지는 20여분이면 도착한다. 다산은 18년간의 유배생활 동안 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내면세계의 모든 결정체를 보여주었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다산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참여정부의 386세대처럼 개혁군주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젊은 피였다. 그러나 당쟁에 휩쓸려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펼쳐보지 못한채 귀양길에 올라야 했던 불운한 사람이다.

 

남인을 제거하기 위해 시작된 신유사옥(1801년)은 그의 가족을 철저히 파괴했다. 둘째형 약전은 흑산도 유배, 셋째형 약종은 참형, 그리고 자신도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채 귀양길에 올랐다.

 

이런저런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며 다산초당으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다산초당까지는 제법 멀다. 걸어서 20여분이 소요되는 다산초당 오르는 길은 사색하기에 좋다. 독일 하이델베르그에 괴테가 걷던 철학자의 길이 있지만 다산초당 오르는 길만 못하다.

 

이 곳에서 다산은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등 500여권을 저술했다. 허물어졌던 초당은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에 의해 복원했다. 그러나 초가 대신 지금의 기와로 재단장했다. 엄밀히 말하면 ‘초당’이 아닌 ‘와당’인 셈이다.

 

다산은 실용주의자이자 백성을 사랑한 사상가였다. 특히 그가 주창한 ‘여전제’는 지금도 파격적인 개혁안이다.

 

그는 원칙적으로 토지는 농민이 소유하고 생산물도 직접 생산에 종사한 사람들의 것 이어야한다는 생각에서 토지의 공동소유, 공동경작, 공동분배 원칙을 주장했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피지배계층을 사랑한 지식인의 고뇌가 읽혀진다. 그래서 다산초당에 가면 숙연해 진다. 초당 오른편에 위치한 천일각에 올라 강진만을 바라보면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린다.

 

다산초당을 나와 삼산면 사거리에서 강진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영랑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영랑생가는 강진면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다.

 

생가 전면에는 그의 대표작인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새긴 시비가 있으며,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의 시에 등장하는 감나무와 모란, 동백이 마당을 채우고 있다. 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그의 집은 예전 생가터에 비해 3분1로 줄었다. 그나마라도 보존된게 고마울 따름이다.

 

 

조선후기 불교문화의 산실 대흥사

 


몇장 남지 않은 감나무 이파리는 초가와 함께 을씨년스럽다. 장독대가 감나무 아래에 있어 ‘오메∼ 단풍 들것네’라고 노래했던 배경을 연상할 수 있다. 영랑은 시문학 동인으로 문단에 데뷔해 주옥같은 서정시를 남겼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남도의 정서를 전통적 운율로 읊은 그의 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사랑한다. 강진을 출발해 줄곧 13번 국도를 타고 영암-나주-광주를 거쳐 돌아오는 길은 다른 시대를 살다간 세 사람의 흔적을 되짚어본 이번 여행에서 의미를 찾았다.

 

대흥사는 두륜산 중턱에 자리잡은 유서깊은 사찰이다. 13 대종사와 13 대강사를 배출한 대흥사는 조선후기 불교문화의 산실이었다. 대흥사는 또 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가 있는 호국사찰이기도 하다.

 

절 아래 ‘유선관’에서 하룻밤을 묵는 것도 절 구경 못지 않은 독특한 체험이다. 예전의 ‘유선여관’을 개조했지만, 4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전통 한옥 구조의 유선관은 ‘서편제’를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절의 요사채를 연상시키는 창호문과 너른 뒷마당의 장독대, 집 옆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운치 있다. 새벽 3시경이면 사찰에서 울려나온 도량석과 새벽 예불소리를 들을 수 있어 호텔이나 여관, 민박과는 색다른 느낌이다.

 

원래는 대흥사를 찾는 신도나 수행승들의 객사로 쓰여졌다고 한다. 여관영업을 한 것은 40여년 전부터인데 2000년 6월 해남 출신의 윤재영(50)씨가 인수해 마당을 넓히고, 온돌방을 아궁이에서 보일러로 바꿨다.

 

숙박비는 3만원에서 6만원까지이며, 저녁은 1인당 1만원, 아침은 7,000원이다. ▲대흥사 유선관(061-534-3692)

 

새전북신문 임병식기자 montlim@sjbnews.com/ 노컷뉴스 제휴사


노컷뉴스 2005-12-17 09:18]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다지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