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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어이쿠! 우당탕! 조심하세요

향기男 피스톨金 2006. 2. 23. 20:34

 

                      북한산성,

 

          어이쿠! 우당탕! 조심하세요

 
▲ 비봉으로 가는 길목 능선의 바위 위에 엎드린 모양의 물개바위
ⓒ2006 이승철
21일 며칠째 계속되는 따뜻한 날씨에 이제 얼음도 땅도 녹아서 등산하기에 좋은 환경이 된 것 같아 친구 두 명과 함께 북한산 등산에 나섰다. 북한산의 서쪽 끝자락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의 우이동 골짜기 쪽으로 내려가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예상하였던 것처럼 날씨는 무척 좋았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평일인데도 등산객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비봉을 왼쪽으로 돌아 사모바위에서 사진 몇 장 찍고 문수봉과 보현봉을 바라보니 아직은 힘이 넘쳐 단숨에 넘을 것 같은 마음이다.

그러나 문수봉 입구에는 위험지대라며 입산을 막고 돌아가라는 표지가 있었다. 할 수 없이 산을 안고 다시 왼편으로 돌아가는데 온통 바위투성이어서 길이 만만치 않다. 널브러진 바위들 사이를 비집고 오르막길을 다 오르니 청수동 암문이다.

▲ 사모바위 부근에서 바라본 문수봉과 보현봉
ⓒ2006 이승철
북한산성.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의 경계지역에 있는 오래된 산성이다. 사적 162호인 이 산성은 삼국시대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후 북쪽의 고구려를 경계하여 세운 성이다. 개로왕 때 축성하였으며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았으나 근초고왕 때는 북진정책의 중심요새가 되기도 했다.

고려 고종 때는 세계 제패의 야심만만한 거대제국 몽골군과 맞서 싸우기도 하였고, 현종은 거란군이 침공하였을 때 태조의 재궁(梓宮, 관)을 옮겨 놓기도 했던 성이다. 본래는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 말 우왕 때와 조선 숙종 때 석성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하였다.

본래 대남문, 대서문 등 13개의 성문과 비밀문인 7개의 암문, 지휘소인 동장대, 북장대, 남장대가 있었고 유사시 왕의 임시거처인 130칸의 행궁과 140여 칸의 군수용 창고도 있었으며 중흥사 등 12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 얼어붙은 빙판 등산로
ⓒ2006 이승철
이 청수동 암문은 7개의 암문 중 하나다. 암문을 통과하니 여기서부터는 응달진 지역이어서 얼음이 이제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많이 녹은 곳은 질척거리는 흙탕길이다. 녹아내리는 얼음길은 미끄럽기 짝이 없어서 매우 위험했다.

'여기서 한 번 넘어지면 온통 흙범벅이 되어 난감하겠는 걸.'

친구 한 명이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며 미리 걱정을 한다. 그때였다.

"어이쿠!" 하는 비명과 함께 우리보다 앞서가던 등산객 한 명이 우당탕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넘어진 사람은 다행히 다치지 않았는지 엉거주춤 일어선다. 그런데 그의 몰골이 친구의 염려대로 말이 아니었다. 엉덩이며 팔꿈치 등 넘어지며 얼음바닥에 닿은 곳은 온통 흙탕물 투성이가 되어 울상을 짓는 것이었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예! 다행히…."

그는 여전히 얼음에 부딪힌 부분이 아픈지 얼굴을 찡그렸다. 주머니에 있는 휴지를 꺼내 닦아 주자 그는 몹시 미안한 표정이다.

"조심하십시오."

인사를 남기고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 산성 안의 어영청 유영지
ⓒ2006 이승철
대남문 옆에는 20여 명이 쉬고 있었다. 우리도 잠시 쉬며 간식을 먹은 다음 대성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대성문에 이르니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럽게 걸어서인지 친구 하나가 발목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단다.

잠시 쉬며 멀리 바라보이는 구불구불 오르내리는 능선을 바라보니 계획했던 갈 길은 아직 멀었다. 발목이 아프다는 친구는 미끄러운 길에 줄기줄기 이어진 능선길을 걸을 생각을 하니 영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 쉬운 길로 내려가지?"

별수 없었다. 모두 젊은 나이들도 아닌데 무리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리막 골짜기 길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조금 내려오니 온통 얼음 빙판길이다. 내리막길에 빙판이라니, 이건 최악의 사태였다.

▲ 대남문의 추녀와 성벽너머로 보이는 세 봉우리
ⓒ2006 이승철
아이젠을 착용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친구 중 한 명은 아이젠이 없었다. 배낭을 다 뒤져보아도 아이젠이 없는 것이었다. 준비가 소홀했던 모양이다. 할 수 없이 내 아이젠 한 짝을 그 친구에게 착용하게 하였다. 우리는 한쪽 발에만 아이젠을 착용한 짝 발이 된 것이다.

뒤뚱뒤뚱 걸음걸이가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래도 아이젠을 착용한 발에 중심을 잡고 걸으니 미끄러지지 않아서 한결 안전하다. 그렇게 조금 더 내려왔을 때 뒤쪽에서 또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와 비명이 들린다. 뒤돌아보니 40대쯤으로 보이는 여성이다.

빙판 위에서 나동그라진 것이었다. 일행이 여러 명이었는데 그녀만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도 다행히 많이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우리가 한쪽 발에만 아이젠을 착용한 것을 보여주자 일행 중 한 명이 한쪽 아이젠을 벗어 그녀에게 건넨다.

▲ 두꺼운 얼음이 갈라진 모습이 상어입처럼 보인다.
ⓒ2006 이승철
그런데 아이젠을 착용해도 걷기는 매우 불편하다. 길 곳곳이 어느 곳은 빙판길이고 또 어느 곳은 보송보송한 바위길이어서 그때마다 아이젠을 착용했다 벗었다 하기도 번거롭고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응달진 골짜기에는 두꺼운 얼음이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밑으로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봄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떤 곳은 두꺼운 얼음이 갈라져 상어의 벌린 입처럼 날카로운 모습도 보인다. 그렇게 조금 더 내려오자 길옆에 <어영청 유영지>라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이 어영청은 숙종 때 보현봉에서 수문 남측까지 축성을 담당하였다. 축성이 끝난 후에는 산성의 자치와 관리를 담당했던 관아로 대청 18칸, 내아 7칸, 양곡창고 48칸, 무기고 10칸, 중군소 4칸, 서원청 2칸, 원랑 12칸 규모였다고 한다. 그런데 19세기 말 혼돈기에 관리 소홀로 소멸했다는 것이다.

▲ 부질없는 인간들의 욕심, 부러진 공덕비들
ⓒ2006 이승철
잠깐 더 내려오는 중에 또 한 사람이 넘어졌다. 이번에는 미끄러진 것이 아니라 아이젠을 착용한 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었다. 그는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손바닥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몹시 아파하는 부상자를 일행들이 부축하여 내려갔다.

얼음이 풀리는 등산로 곳곳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곳을 등산했지만 이날처럼 많은 사람이 넘어지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많이 다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길로 내려가면 정릉으로 갑니까?"

우리도 조심스러운 산길에 지쳐 느릿느릿 걸어 내려오고 있을 때 뒤를 따르던 사람이 묻는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쪽으로 가는 길은 아닌 것 같다는 답변에 그는 낭패한 표정을 짓는다. 정릉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이다.

▲ 사모바위에서 문수봉으로 가는 길목의 바위문
ⓒ2006 이승철
그렇게 잠시 더 내려오자 이번에는 옛 행궁터 표지가 나타난다. 이 행궁지는 전란 시에 임금이 대피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내외전 124칸의 웅장한 건물이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북한산 문고를 마련하여 실록 등의 고문헌을 보관했는데 일제 침략기에 관리 소홀과 집중호우로 무너져 소멸했다고 하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곳에서부터는 빙판길이 없어 아이젠을 벗었다. 한쪽 발에만 아이젠을 착용하여 짝발로 걷다가 그 아이젠을 벗으니 발과 다리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걷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그런데 조금 더 내려오다가 바라보니 오른편에 마치 백운대 옆의 인수봉의 뒷면처럼 보이는 바위봉우리가 나타난다.

▲ 중성문
ⓒ2006 이승철
"저거 인수봉 아냐?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그러나 그 봉우리는 인수봉이 아니라 노적봉이었다. 우측의 노적봉을 바라보며 걷다 보니 옛 중흥사 터다. 길옆에는 수많은 옛 벼슬아치들의 공덕비가 서 있는데 그 중의 몇 개는 중간이 부러져 나가 흉측한 모습이었다. 마치 인간의 타락한 명예욕처럼.

골짜기가 깊어질수록 좌우의 산들은 더 높아 보인다. 그 골짜기 깊은 곳에 중성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골짜기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오랜 세월동안 비와 물에 씻기고 다듬어져 매끈한 모습들인데 그 아름다운 골짜기를 음식점과 각종 가게들이 점령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 북한산성 골짜기
ⓒ2006 이승철
골짜기 깊숙이까지 들어온 자동차 길도 사람들의 편리를 위한 것이겠지만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자동차 길을 피하여 골짜기 탐방로를 따라 내려가는 길 곳곳에 절경이 펼쳐져 있었다. 웅장한 민족의 영산 북한산과 오랜 역사를 간직한 북한산성을 이렇게 돌고 돌아 북한산성 매표소에 이르니 어느새 오후의 해도 기울어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산행시간은 다섯 시간이었다.

오마이뉴스 2006-02-23 09:14]    
[오마이뉴스 이승철 기자]
 
덧붙이는 글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시인 이승철 을 검색하시면 홈페이지 "시가있는오두막집"에서 다른 글과 시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다지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