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Travel)이야기들/재밋는 중국여행

중국기행 신장(상)끝없는 황무지 ‘아, 이 길이…’

향기男 피스톨金 2006. 9. 7. 10:46

 

                 중국기행 신장(상)

 

          끝없는 황무지 ‘아, 이 길이…’

사진제공/KBS 제1라디오

‘8·15 남북청소년 서역원정’

 

이것이 이번에 내가 다녀온 중국 대장정의 총제목이다. KBS 제1라디오(조휴정 수석PD)가 주선했고, KBS 다큐제작팀이 따라붙었다. 원정 대원으로는 탈북 청소년 대표 7명과 남한 청소년 대표 7명이 선발되었고, 원정 목적의 부제목이 ‘고선지 장군의 원정로를 따라’이기 때문에 이 방면의 전문가이신 연세대 역사학과 지배선 교수가 지도교수로 모셔졌다.

 

해동검도의 사범이며 신인 탤런트이기도 한 윤자경양과 나는 남북청소년들의 멘토, 그러니까 남북청소년의 정신적 지주 같은 역할로 뽑혔다. 그래서 전체 대장정 인원은 총 27명이었다.

 

우리 일행의 출발점은 중국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의 주도 우루무치였다. 지난 8월15일 뜻깊은 광복절 오후 인천공항에 모인 우리 대원들은 서로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며칠 전 다 함께 청계산 산행을 하면서 얼굴들을 익혀두었기 때문이다.

 

그날 KAL 비행기를 타고 저녁 8시10분에 출발, 정확하게 4시간 만에 우루무치에 도착했다. 나는 이 시점부터 서서히 중국의 거대함을 실감하게 된다. 우선 신장웨이우얼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경상도나 전라도처럼 중국 전체에서 여섯 개로 나뉜 성 중의 하나인데 그 규모가 우리나라의 16배 크기라는 것이다.

 

우루무치라는 곳은 말하자면 강원도의 춘천쯤 되는 곳인데도 그 이름이 베이징이나 칭다오 같은 중국식 발음이 아니다. 서양식 발음이다.

 

도착했을 때가 오밤중이라 호텔에서 한잠 자고 일어나 아침 산책을 나가보니까 이게 웬일인가. 그곳은 내가 알고 있던 중국이 아니었다. 몇 년 전 베이징에 갔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대부분 우루무치 사람들의 얼굴이 우리 같은 동양인의 얼굴이 아니라 아랍이나 유럽인의 얼굴 형태인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말로만 듣던 ‘아하! 저 사람들이 바로 중국 안에 있는 소수민족이라는 것이구나’하고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당연히 이 사람들은 중국과는 완벽하게 다른 언어와 글자를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 신장성의 수도 우루무치가 언제 어떻게 형성된지는 역사책에 나오겠지만 하여간 카자크 민족, 위그루 민족, 우리는 학교때 돌궐족으로도 배웠는데 그런 별별 민족의 중심지쯤 되는 곳이었다.

 

나는 아직 못가봤지만 지린성의 옌볜에 가면 중국어와 한국어 간판이 나란히 적혀있듯이, 여기는 거의 모든 길거리 간판이나 안내판이 중국어와 위그루어로 나란히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우루무치는 말로만 중국, 무늬만 중국인 셈이었다. 그래서 완전히 중국 분위기가 나는 도시는 어딨냐고 물으니까 한족만 따로 사는 곳으로 찾아가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알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풍기는 중국식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버스에 몸을 싣고 중국 대륙 횡단에 나서야 했다. 말이 그렇지 우리의 목표는 엄밀히 말하자면 신장성 횡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강원도 춘천에서 속초까지 가는 셈이었다.

 

그 사이에 바로 세계 제5위의 타클라마칸 사막이 가로로 놓여져 있고 우리는 그 사막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횡단하는 것이 목표였다. 타클라마칸이란 위구르어(語)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이라는 뜻이다.

 

겨울에는 혹한, 여름에는 혹서로 유명하다. 그곳에 환갑 지난 중늙은이(?)가 겁도 없이 간 것이다. 고선지 장군도 아닌데 말이다.

 

여하튼 그 길이 바로 그 옛날 우리의 고구려인이었던 고선지 장군이 당나라 장군이 되어서 당시의 연합군을 이끌고 서쪽 오랑캐들을 점령하기 위해서 진군했던 길이었다.

 

그로부터 천 몇 백 년 후 우리의 남북청소년 원정대가 고선지 장군이 행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길을 말타고 가는 대신 버스를 타고 달려가는 것이다. 원주나 춘천에서 강릉이나 속초까지는 까짓것 배낭 메고 온종일 걸어서 하루 이틀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중국 대륙은 다르다.

 

우루무치로부터 교외로 빠져나오자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한 마디로 아무런 풍경이 없는 것이었다.

 

8월의 중국 태양은 한국 태양보다 더 뜨거웠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오로지 흙먼지 이는 벌판이었다. 내가 살아온 우리나라의 어디를 다녀봐도 그런 풍경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중국땅의 풍경을 뭐라고 설명해낼 도리가 없다.

 

그냥 한도 끝도 없는 자갈, 모래, 흙, 먼지가 범벅된 벌판이다. 때때로 커다란 산이 등장해서 나란히 가긴 했지만 산 전체를 둘러봐도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없는 자갈, 흙, 모래, 먼지로 뭉쳐진 벌거숭이 산이었다.

 


처음에 우리 원정대원들은 중국산 플라스틱 병에 든 생수를 마시며 가벼운 소란을 떨었다. “야! 여기 땅 넓다. 여기다 100평짜리 아파트, 빌라 짓고 살자”

 

“여기다 벙커 탈출하는 골프 연습장 만들면 돈 무진장 벌겠다”했지만 대여섯시간을 가도 똑같은 풍경이 이어지자 더이상 재미의 느낌은 연결되질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아! 중국은 크구나. 그리고 넓구나”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재작년 한·러수교 120주년 KBS 주최 ‘한·러 합동 열린음악회’에 출연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을 때도 “아하! 여기는 큰 나라이구나. 넓은 나라이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모스크바라는 도시의 어느 곳에 서 있어도 산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풀 없이 넓은 들판뿐이었다.

 

그때도 바다가 어디 있냐고 했더니 사방 2,000㎞ 밖으로 나가야 바다를 본다고 해서 “아! 크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의 “아 크구나”와 중국 고비 사막 한가운데서 느끼는 “아 크구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질량의 ‘크구나’였다.

 

그러니까 모스크바의 ‘아, 크구나’는 그냥 상상 속에서 그려본 느낌이었지만 중국 고비사막에서의 ‘아 크구나’는 실제 속에서의 ‘아 크구나’, 내 몸 전체로 느껴지는 ‘체험 삶의 현장’에서의 느낌이었다. 장난감 코끼리를 만지면서 ‘아, 큰 동물이구나!’하는 것과 실제 코끼리 옆구리를 만지면서 ‘아 크구나’하는 느낌의 차이였다.

 

나는 중국 대륙에 와서 처음 알았다. 고비사막이 자갈 사막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니까 고비 사막도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나오는 멋진 모래 사막이라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고비사막에도 중간 중간에 모래사막도 있긴 있지만 총체적으로 고비사막은 모래도 자갈도 흙도 아닌 아무짝에 쓸모 없는 황무지를 말한다.

 

안내원은 세명이었다. 한 명은 옌볜 출신의 한국인이었고 위그루인 두 명이었는데 이들한테 들은 얘기는 1년에 한 두번씩 황사가 일어나면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고 했다.

 

모래 먼지가 새벽 안개처럼 하늘을 꽉 채우면 도저히 앞을 내다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나갈 수가 없다고 했다. 거기서 생긴 무지막지한 황사가 황해를 건너서 이따금씩 서울 하늘까지 밀려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맞는 황사와 중국 본토에서 맞는 황사는 내용과 질적인 면에서 달랐다.

 

원자폭탄과 수류탄의 차이였다. 우리가 7∼8시간씩 고비사막을 뚫고 달려가서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는 곳의 지명은 전부가 중국식 이름이 아니었다. 쿠얼라, 아르칸트, 카쉬카르 등 전부가 소수민족들이 사는 그들 언어로 된 지명이었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7일간 여행의 절반 지점까지 오면서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던 중국, 영화나 뉴스에 나오는 진정한 중국을 단 한 장면도 목격하지 못했다.

 

나머지 7일을 보내면서도 중국을 볼 것이라고 서울에서 비행기 타고 날아온 한국 나그네는 15일을 꽉 채우는 순간까지 온통 중국 변방의 모습만 들여다보고 돌아가게 된다.

 

버스에서 내려 그곳 도시 사람이나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면 내 입속에서 저절로 이런 말이 새어 나온다. “앗! 여기는 중국이 아닌데 내가 잘못 왔나?”

 

눈·코·입이 우리와 다른 서양인을 닮았고 여성들은 이상야릇한 색깔의 치렁치렁한 옷을 걸치고 찌는 땡볕 속에서도 머리에 보자기를 둘렀거나 입 주위를 가리고 다닌다. 그냥 보기만해도 숨이 탁탁 막힌다.

 

이 사람들한테는 아침에 세수를 하거나 목욕을 하는 습관이 아예 없는 듯하다. 아이들은 때가 끼어서 아예 피부가 가죽처럼 반들반들하다.

 

참으로 신기한 건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시골 마을에 서양 사람이 나타나면 구경거리가 생긴 것처럼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여기선 거꾸로 서양인 같이 생긴 사람이 우리를 어디 문명국에서 온 사람들처럼 일제히 쳐다본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보고 느낀 사안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안내원한테 물었다.

 

중국 본토의 한족들이 그밖의 소수민족을 한 수 아래로 보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그렇다고 했다. 운전을 해주는 로버트 드니로처럼 생긴 청년한테 통역을 앞세워 영어를 섞어 짓궂게 말했다.

 

“어이! 너는 중국인이 아니야”했더니 그래도 자기는 중국인이라고 우겼다. 내가 “야! 너는 지금 너희들 위구르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레지스탕스가 되거나 빨치산이 되어야지 지금 여행 버스를 몰고 있으면 어쩌냐”고 했더니 그런 말하면 큰일난다고 머리를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그 방면에 나는 아무런 지식도 없지만 나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지하운동이고 뭐고 간에 지리산이나 속리산처럼 치고 빠지고 숨을 장소가 있어야지, 허허벌판 풀 한 포기 없는 벌거숭이 지형에서 무슨 수로 비밀운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7일째 우리는 카라칼 호수에 있었다. 말이 호수지 백두산보다 훨씬 높은 3,600m 지점에 물이 고여 있었다. 거기 내려서 식사를 한다고 잠시 앉았다 일어섰는데 앞이 캄캄해지고 갑자기 어질어질 증세가 일어나며 눈알이 뻑뻑해지는 느낌이 왔다.

 

높은 지역에서 산소가 부족하면 이상 현상이 온다는 것이었다. 원정대원들이 고선지 장군이 넘었음직한 7,500m 상봉에서 최소 6,000m 지점까지 산행을 강행한다고 떠날 때 나는 말없이 버스로 돌아와야만 했다. 우선 어지러워서 걸을 수가 없었고,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가 일찍이 혈압 문제로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로 13년을 지내셨고, 작은 누님이 몇 년 전 김장을 담그다가 혈압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내가 버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는 동안 우리 일행 중 남자 2명, 여자 3명이 몸의 이상증세를 심각하게 일으켜 응급 오토바이로 돌아왔다. 안내원 얘기가 여기서 쓰러지는 건 흔히 있는 일이라고 했다. 나를 포함, 탈락자 3명을 태운 작은 버스는 고도가 낮은 카쉬카르라는 곳으로 내려와야 했다.

 

갈 때는 몰랐는데 산에서 줄곧 내리막길로만 내려오는 데 무려 다섯 시간이 걸렸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계속 내리막길을 타고 내려온 셈이다. 중국은 정녕 큰 나라였다.

 

돌아가는 길에는 기차 여행도 추가된다고 했다. 몇 시간짜리 기차냐고 했더니 26시간짜리 기차라고 했다. 밖을 내다보면 매번 똑같은 풍경 고비사막이었다. 크다는 느낌은 나로 하여금 질리게도 말들었고 무섭게도 만들었다.

 

허허벌판 황무지 중간중간에 프로펠러처럼 생긴 풍차처럼 돌아가는 풍력발전소와 오일을 캐낸다는 기중기가 쭉 서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중국이 무섭다는 느낌에서 공포스러운 느낌까지 추가로 들었다.

〈조영남〉

경향신문 2006-09-06 15:42]    

 

 

 

뉴에이지 곡
                   Richard Abel - Le Lac De Come


                      

                                       향기男그늘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