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을 찾기 전까지 ‘시즌놀이’로 마음을 달래며 보딩할 날만 기다려요.”
자타가 공인하는 스노보드 마니아 커플인 장건욱(31)·진나영(29) 부부의 아파트. 지난해 10월 결혼해 함께 두 번째 시즌을 맞은 이들은 새로 마련한 스노보드 데크와 고글, 보드복을 거실에 펼쳐 놓고 토론에 열을 올린다.
“이렇게 입어야 맵시가 살지.”(나영)
“아냐 아냐, 빨간색 하의엔 검정 상의를 입어 줘야지.”(건욱)
사실 부부의 마음은 예년보다 이른 스키장 개장 소식에 이미 설원에 가 있다. 하지만 슬로프에 두툼하게 눈이 덧쌓이기까지 시간이 제법 남은 게 탈. 이들은 설원을 누비는 대신 시즌놀이로 흥분을 달래는 중이다.
장씨 부부뿐일까. 알고 보면 시즌놀이에 열중한 스노보드 마니아는 한둘이 아니다. 보드복 사진과 장비 정보로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온통 도배하는 것이 바로 마니아들 사이에 통하는 시즌놀이의 정석. 몇 년 전부터 거세진 스노보드 열풍이 급기야 새로운 사이버 놀이 마당까지 만들어 낸 것이다.
장씨 부부처럼 새로 장만한 의상을 차려입고 사진을 찍어 널리 공개하는 것은 철 지난 유행어로는 ‘셀카’다. 그러나 그 의상이 때마침 보드복인 데다 고글 비니 따위가 곁들여지면 이 셀카 행태는 당당한 시즌놀이가 된다. “이번 시즌을 위해 장만한 장비와 미리 생각해 둔 보드복 패션 사진을 홈페이지나 블로그 등에 올려 다른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세부 정보를 공유하는 게 시즌놀이입니다. 스키장 개장 소식에 가슴이 콩닥거리는 요즘이 바로 제철이지요.” 남편 장씨의 설명이다.
시즌놀이를 위한 사진찍기는 대개 사적인 공간에서 이뤄지지만, 때로 공개된 장소에서 진행되기도 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눈이 없는데도 아파트 옥상이나 상가 계단 등에서 비니와 고글, 보드복을 갖춰 입고 한 손에 데크를 들고 셀카를 찍고 있다면 시즌놀이를 즐기는 보드 마니아라고 보면 된다.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새 장비를 마련하지 못했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드 장갑만으로 시즌놀이에 동참한 한 마니아는 블로그에 “고글이 없어 장갑만 끼고 시즌놀이를 했다”며 장갑을 끼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장면을 연출해 올렸다. 렌즈를 따로 구입해 외양을 리폼한 고글 사진을 올리면서 렌즈 값과 리폼 방법을 함께 올리기도 한다.
강원도 성우 리조트에 모이는 보드 동호회 ‘크레이지 보더스’의 회장 신봉석(28)씨는 “시즌놀이는 보더들의 경건한 의식과도 같다”며 “고글을 튜닝하는 등 나름대로 리폼하거나 새로 구입한 장비를 사진으로 남겨 주변에 자랑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마니아들은 ‘숍 투어’를 시즌놀이의 시작으로 본다. 추석 전후로 보드 마니아들은 서울 신사동과 논현동 일대의 보드 숍을 성지순례하듯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대개 보드 동호회 회원 10여명이 ‘정모’(정기모임) 날짜를 잡고 몰려다니는 숍 투어는 보드 장비 구입보다 평가에 무게가 실린다.
시즌놀이 중에서도 숍 투어가 활성화된 것은 최근이다. 프로보더 김현식(38)씨는 “이전까지는 시즌이 임박해서야 새 장비가 들어오고 세부 정보가 공개됐는데, 2∼3년 전부터 최신 장비가 일찍 들어오면서 숍 투어가 활성화됐다”며 “저렴한 이월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활성화의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시즌놀이는 보드 마니아층이 두꺼워졌다는 방증이다. 김씨는 “스키는 선수권대회 등에 관심이 있어야 장비에 주목하지만, 보드는 한 달만 타도 장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며 “보더들은 대부분 마니아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김씨의 팬클럽인 ‘뽀사당’(cafe.naver.com/bbsd)을 비롯한 대다수 보드 동호회는 고글이나 비니 등의 상품을 내걸고 이벤트까지 펼치고 있다.
글·사진 정재영, 그래픽 최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