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Travel)이야기들/재밋는 여행이야기

휴가체험기/‘최고’의 여행지/ 그 파란만장하고 스릴 넘치는 사연들

향기男 피스톨金 2007. 6. 14. 18:44


                  해외 여행이야기

 

 /올 여름 꼭 다시 가고 싶은 ‘최고’의 여행지

 

                   그대 삶의 가장 충만한 장면


 가슴속의 한 벽에 걸고 싶은 독자들의 아름다운 여행사진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여행을 갔다 와서 사진만 남는 건 아니다. 사진도 남는다. 특히나 큼지막하게 인화해서 벽에 걸고 싶은 멋진 사진을 남겼을 때 여행은 우리 삶의 가장 충만한 기억으로 가슴속의 한 벽에 평생토록 걸린다. 독자들이 보내온 아름다운 여행사진들을 소개한다.

 

[기쁨 두배 & 짜증 두배]

휴가체험기 응모 독자들이 뽑은 올 여름 휴가지 강추와 비추

 

● 올 여름 꼭 다시 가고 싶은 ‘최고’의 여행지

 

보길도 “아! 굽이굽이 정결한 섬길과 아름다운 남쪽 바다여!”

네팔 카트만두 순박함과 정겨움 사이에서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코알라 따윈 냄새나서 줘도 싫다고 하지만 전 가서 코알라등을 꼭 쓰다듬어 보고 싶어요.

방태산 자연휴양림 풍부한 골짝과 골짝물, 그늘 많은 풍성한 숲, 계곡물에 몸 담그며 하는 자연림속 상쾌한 트레킹.

고향집 여행이나 휴가나 필요한 것은 ‘여유로움’이다. 사람을 피할 수만 있다면 만사오케이!

볼리비아 우유니 염호 바싹 마른 소금으로 끝도 없이 펼쳐지는 순백색의 우주 우유니, 유입되는 강이 없는 우유니는 우기로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호수가 된다.

뉴질랜드 청정 자연의 나라답게 맑은 공기, 오후에는 반짝이는 에메랄드 은빛 호수, 밤이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쏟아질 듯한 별천지.

보라카이 물빛 좋고 밥맛 좋고. 직항이 열렸다니 기쁨 두 배.

거제도 저는 올해 ‘구조라’ 해수욕장으로 갑니다!

그리스 산토리니 환상의 섬. 여자친구와 같이 못 간게 아쉽다.

울릉도 성인봉에서의 장관!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느낌!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다.

타이 방콕 비교적 적은 돈으로 만만하게 먹고 놀 수 있는 곳.

프랑스 샤모니 산타 할아버지가 나올 것만 같은 마을 샤모니, 몽블랑을 보러 올라가던 에퀴디미디로의 케이블카를 타는 그 순간까지 마치 동화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캄보디아 어디에도 없는, 바다처럼 큰 톤레삽호수.

삼척 아담하고 깨끗한 해수욕장과 정비된 해안도로, 동양에서 제일 긴 환선굴까지. 올해는 새롭게 대금굴까지 개장됐다는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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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최악’의 여행지

 

인천 을왕리해수욕장 좁은 해수욕장에 복잡한 인파, 쓰레기는 넘쳐나고 ….

대성리 가끔씩 떠올리는 추억의 아픈 기억들과 흔적들의 장소

말레이시아 공항에 내리자마자 호객행위를 하는 말레이시아, 공항 바깥에 나가자마자 숨이 턱 막혀 여름에는 더더욱 비추

외도 2시간이 안 되는 강제 체류시간, 여행사들의 선호 관광지로 선전으로 인산인해, 여유있는 여행 불가.

국내의 잘 알려진 바닷가 이건 아무리 미화시키려 해도 고생길이지 여행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

캄보디아 앙코르 전체 관광객 3분의 2에 이르는 한국인들. 앙코르를 포위하고 있는 자본의 촘촘한 그물에 걸려 숨이 막힐 것 같다.

수원 원천유원지 도심 속의 유원지라는 것까지는 좋은데 어찌나 닭털 냄새가 코를 찌르는지. 마치 닭장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상하이 산해진미는 무슨 …. 입맛 안 맞아서 살만 빠졌음.

필리핀 세부 우선 한국 사람 많고, 시끄럽고, 외국여행 기분도 안 나고.

인도 머무는 한 달 동안 설사로 몸무게 10kg 빠짐.

휴가철 동해바다 사람만 많은 그곳, 쉬는 것 같지가 않던데 ….

동해 교통 체증, 몰리는 인파, 바가지에 시달려야 하는 곳.

이탈리아 피사 집시와 노점상뿐, 기대했던 피사의 사탑과 성당은 너무 평범했다.

오사카·나라·교토 한여름이 아니라면 괜찮을 곳에 한여름에 가서 땀흘리며 더위 먹으면서 봐야 했다.

로스앤젤레스 생각보다 과장된 도시. 몇가지 관광명소가 전부. 실제로 보면 실망. 치안이 나빠 밤에는 숙소에만 콕!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이보다 더 재밌는 휴가는 없었다’ 당선작 

           유리창을 박살내고 스리랑카로…

인도 트리밴드럼에서 값싼 자리를 얻느라 새벽까지 대기하다 생긴 해프닝

 

아내와 두 번째 인도 여행에 나선 것이 벌써 3년 전 여름이다. 인도 여행에서 처음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했으니 인도는 우리에게 각별하다면 각별한 의미가 있는 나라다. 부부가 된 뒤에 도전한 두 번째 여행은 40일 동안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를 돌아보는 여정이었다.

 

‘도전’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쉽지 않은 여행이었다. 여행자들이 비교적 적은 곳이다 보니 편의시설이나 입맛에 맞는, 그러니까 적당히 세계화(?)된 먹거리가 드물었고 무엇보다 ‘인도’에 가졌던 편견을 날마다 깨고 또 깨야 했으니까.

 

친절한 여행사 직원을 만난 행운

 

벵골만과 맞닿은 동해안에서 내륙을 가로질러 아라비아해와 맞닿은 서해까지 가면서 첸나이, 벵갈로르, 마이소르, 폰디체리와 오로빌, 우티, 함피, 고아, 코치 등을 여행했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신비로운 유적과 대자연에 감동했고, 인도답지 않은 최첨단 대도시 문화에 놀랐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마주하면서 마음의 너비를 키웠다. 그런데 잊지 못할 인도 여행의 정말로 잊지 못할 사건은 마지막 날에 일어났다. 인도는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놀라운 곳이다.

 

마지막 여행지는 트리밴드럼이라는 도시였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스리랑카행 국제선 항공권 값이 가장 싼 곳이기 때문이다. 고단했던 인도 여행을 뒤로 하고, 황금빛 모래밭에서 푸른바다를 바라보며 열대 과일을 먹는 상상을 하고 있던 참이라 마음은 이미 부풀대로 부풀어 있었다. 숙소를 정하자마자 여행사를 찾았다.

 

스리랑카까지는 비행시간이나 요금이 국내선과 비슷한 수준이어서 어렵지 않게 표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자리가 없었다. 최소 열흘은 기다려야 한단다. 종일 여행사와 항공사 순례를 했지만 같은 대답이었다. 길고 지루했던 우기가 끝나자 여행객이 한꺼번에 몰렸기 때문이란다. 어떡하나? 열흘 뒤면 휴가는 끝인데!

 

저녁 무렵 들른 한 여행사에서 유나이라는 친구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유난히 환한 웃음을 가진 유나이는 다른 직원들처럼 콧수염을 기르긴 했어도 서글한 눈매와 둥근 얼굴이 앳돼 보이는 청년이었다. 우리의 절망적인 마음을 전해 듣자, 유나이는 아주 원초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다. 비행 전날이면 으레 티켓 두어 장은 취소되기 마련이니 내일 떠나는 티켓이 분명 있을 거라고 했다. 2~3일은 기다릴 작정을 하고 있던 터라 다음날 떠날 수 있다는 말이 되레 당황스러웠다. 문제는 수시로 단말기에 접속하여 상황을 주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밤늦게까지 어쩌면 새벽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

 

그렇게까지 해 주는 여행사 직원은 만나기 어렵다. 스리랑카에 꼭 가야만 하는 위급 상황도 아니고, 친분 관계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더군다나 어렵게 자리가 난 비즈니스 클래스 티켓을 앞에 두고서도 우리는 망설이고 있었다.

 

이코노미 좌석과는 1600루피(약 37000원) 정도 차이였는데, 그 당시 우리가 쓰고 있던 물가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큰 액수였다. 이코노미 클래스 티켓이 3370루피(약 78000원)이었으니 반값이나 더 내는 꼴이었다. 그런데 유나이는 망설이는 우리 모습을 보더니, 자기가 이코노미 클래스 좌석 두 개를 꼭 잡고야 말겠다며 큰소리를 친다. 망설이던 마음도 일단 아끼고 보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아찔했다, 유리 파편을 팔뚝으로!

 

시간은 어느새 밤 10시를 넘겼다. 지쳐 졸고 있는 아내를 먼저 숙소로 보내고 유나이와 함께 컴퓨터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야근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유나이는 이게 자기 일이라며 씩 웃는다. 남아 있던 다른 직원 하나가 밤참을 사 왔다. ‘아차! 내가 사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염치없이 야식을 얻어먹으며, 나는 발권을 하고 나면 모두에게 맥주를 사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자정을 조금 넘기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리가 났다. 재빠르게 예약을 거는 유나이의 얼굴엔, “거 봐라,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지?”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기뻐서 환호성을 질렀다. 다음날 10시 비행기였다. 계획대로 스리랑카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발권을 마치고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을 나눈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맥주 마시러 가자! 내가 쏜다!” 그리고 유리로 된 출입구를 힘껏 미는 순간 ….

 

와장창! 커다란 정문 유리문이 반 정도 닫아놓은 밖의 셔터에 걸려 순식간에 깨지면서 무너져 버렸다. 내가 안쪽으로 열었어야 하는데 너무 기쁜 나머지 문을 확 밖으로 열어버린 것이었다. 두꺼운 유리문이 쩍 갈라지는 걸 보면서도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깨달은 거지만 정말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날카롭게 깨진 부분이 아닌 뭉툭한 테두리 부분이 팔뚝에 정면으로 떨어진 것이다. 팔이 아픈지도 몰랐다. 직원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날카로운 유리쪽이 내 팔뚝 위로 떨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다행이라며 모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이내 모두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문제는 돈이었다. 문 값을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라면 회사 쪽에서 수리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 사과를 받아야 하는 것은 오히려 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새벽 한 시에 사장님 몰래 비상연락으로 직원들을 불러 모아 대책 회의를 여는 것을 보고야 나는 문제가 심각함을 깨달았다. 문 값은 우리 돈으로 12만원쯤 든다고 했다. 자리가 나길 기다리면서 유나이와 몇 시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이곳 직원들의 월급이 우리 돈 5만원에서 10만원 사이라는 걸 들어 알고 있었다.

 


나는 큰맘 먹고 문값을 내기로 했다. 낯선 친구에게 베풀어준 유나이의 따뜻한 정을 생각해서라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긁어 문값을 치르고 한 사람 한 사람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맥주를 마시러 가자니까 모두들 괜찮다고 한다. 아무래도 다들 기분이 좀 가라앉은 것 같아 음료수를 사 돌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다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모두에게 손을 흔들며 돌아서는 나도, 나를 다독이며 즐겁게 여행하라는 유나이도 이젠 좀 기분이 나아졌나보다.

 

마음을 부자로 만들어준 정많은 친구들

 

그때 깨진 문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을 3년 만에 꺼내 본다. 몇 만원을 더 보태 비즈니스 클래스 티켓을 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조금 아끼려다 엉뚱한 큰돈이 깨졌으니 미련한 짓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배낭여행을 떠나고, 우리 돈 몇 백 원을 아끼려고 무작정 걸어다니던 그때 마음만은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 마음을 부자로 만든 것은 그곳에서 만난 정 많은 사람들이다. 유나이의 환한 웃음이 그립다.

참, 스리랑카 여행은 어땠냐고? 멍든 팔과, 닥쳐올 카드 돈에 떨리던 가슴을 바닷물에 푹 담그고 실론의 태양을 만끽할 수 있었던 내 생애 최고의 휴가였다. ^^;;;

홍석봉/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중2동

 

           나의 귀를 뚫어준 터키여
한겨레 | 기사입력 2007-06-13 19:30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지난해 여름 터키로 신혼여행을 갔다. 이스탄불에서 가방 속 현금뭉치를 도둑맞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지만 절대 싸우지 말자는 약속을 아슬아슬하게 어기지 않은 우리 부부는 마지막 일정으로 배를 타고 그리스섬에 가고자 서부 항구도시 쿠사다스로 향했다.

 

우리는 이스탄불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 버스로 다시 한 시간 정도 가야 하는 쿠사다스항에 도착하기 전에 귀참젤리라는 작은 동네에서 하루밤을 묵기로 했다. 그런데 미리 예약한 호텔이 너무 멀었다. 그냥 근처에서 다시 숙소를 잡자는 남편의 제안을 거절하고 터키에서만 볼 수 있는 하얀 미니버스 돌무슈를 탔다. 기사 아저씨는 30분 정도가면 된다고 했지만 온 동네를 지그재그 돌다가 해가 진 뒤에 내려서도 한참을 물어물어 외진 구석에 있는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

 

외진 데로 멀리 내려온 만큼 인심도 따뜻한 것이었을까. 저녁식사 시간이 끝난 지 한참 뒤였지만 호텔 지배인은 우리가 안쓰러운지 먹을 걸 챙겨주도록 주방에 말을 했다. 우리가 저녁을 먹는 동안 에게해를 바라보는 호텔 안마당에서 여행 온 터키 가족들을 만났다.

 

터키의 여러 지역에서 모인 서로 다른 가족들 가운데 한두 명이 어깨춤을 추면서 흥을 돋우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춤을 추고 놀았다. 우리 부부가 에게해를 보려고 마당을 지나가는데 이들이 함께 춤추자고 했다.

 

한국의 전통 춤과도 비슷한 덩실덩실 어깨춤쯤이야 못출 것도 없어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진짜 가족처럼 스스럼없이 춤을 추고 놀았다. 흥겨운 춤판이 끝나자 그 가운데 젊은 친구인 설칸이 내일 떠난다며 “2주 전에 가족들과 이곳에 도착했는데, 우리가 그때 만나서 함께 놀아야 했다”고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다음날 설칸의 가족들은 이미 식구들과 짐으로 가득찬 자동차에 굳이 우리를 태워서 항구까지 데려다 줬다. 나를 보고 내내 웃던 설칸의 여동생은 헤어질 때 끼고 있던 귀걸이를 빼서 내게 줬다. 눈물이 날 뻔했다. 그녀 덕분에 나는 올 여름 귀를 뚫었다.

허지훈 / 강남구 삼성1동 106번지 풍림1차 아파트

 


           바람 잘 날 없던 ‘홍콩 뺑뺑이’
한겨레 | 기사입력 2007-06-13 19:30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밤새 마신 술 때문에 공항 가는 리무진 버스에서부터 비닐봉지를 귀에 걸고 떠난 3박4일 일정의 홍콩여행. 이륙 직전에 도착한 게이트에서 승무원이 당황스런 표정을 잠시 짓더니 말로만 듣던 비즈니스 클래스로 안내했다. 아슬아슬하게 도착을 한 덕에 이코노미석에 빈자리가 없어 비즈니스를 타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행운도 한 순간! 비행기가 날아오르고 잠시 후 승무원이 가져다준 스낵과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아뿔싸! 좋다고 집어먹던 스낵이 부시 대통령이 먹다 죽을 뻔 했다던 땅콩이 든 프리첼이었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던 나는 과자를 먹다가 대폭발을 일으켰고 엄청난 횟수의 구토와 설사로 비즈니스용 식사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서 있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탈진해 도착한 홍콩에서 다른 여행객이 알려준 대로 2층 버스를 타고 숙소가 있는 정거장에 내렸다. 그런데 우리 부부가 묵을 호텔은 보이지 않았다. 짧은 영어로 물어보기도 했지만 대답을 알아들을 수 없어 지도만을 의지해 뜨거운 홍콩의 태양 아래 네 시간을 헤매다가 찾은 그곳, 그 호텔은 정거장에서 10분 거리여서 우리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다음날 여행책자에 소개된 유명 음식점을 찾았다. 이때도 우리의 방향감각은 빛을 내 지하철역에서 20분 거리인 그곳을 세 시간 넘게 헤매서 도착했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간 그 식당에서 너무나도 근엄한 종업원의 안내에 위축돼 우리는 허둥지둥 슈림프라는 단어만 보고 주문했다가 원래 먹으려고 했던 대하요리 대신 손톱만한 깐새우만 퍼먹다가 나와야 했다.

 

몸과 마음이 지친 우리는 숙소 근처에서 발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그런데 정성들인 마사지를 받던 아내의 발에서 겨우내 스키부츠에 지쳤던 발톱이 빠져버리는 것이었다. 호텔에 돌아와서는 에어텔에 포함된 조식을 언제 먹을 수 있느냐로 호텔 직원과 한참 실랑이를 벌였고, 여행사에 항의를 하느라 전화요금이 3만원 가까이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예매했던 공항행 열차표를 못 쓴다고 말을 듣고 한 번 더 소동을 벌임으로써 우리의 사건 사고 여행은 마무리됐다.

전상국 /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3가 대우이안

 

 

 

                 이 공항이 아닌가벼!

한겨레 | 기사입력 2007-06-13 19:30 기사원문보기

멜버른 공항에서의 좌충우돌,
출발시간이 지난 비행기를 세우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해질녘 노을을 바라보며 추억이 담긴 멜버른을 뒤로 한 채,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까지는 말이다. 멜버른 공항에서 ‘제트 스타’ 비행기를 타고 브리스베인 공항에 도착하는 것이 나의 임무. 혼자서도 괜찮겠냐는 팀원들의 염려에,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장담하며 홀로 하게 될 비행에 들떴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8주간 여행. 만족스러웠노라 성급히 결론 내리고, 한국을 향해 내 마음은 달음질치고 있었다.

 

“당신은 갈 수 없을 것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체크인 장소에 갔다. 웃음을 띠며 여권을 보여줬다. 그러나 들려오는 직원의 음성은 “당신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별일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예약 내역을 뽑은 종이를 전해주었다. 그러나 청천 병력 같은 말이 내게 돌아왔다. “당신 공항 잘못 왔다!”

 

내가 가야 할 공항은 이름 모를 외딴곳이라고 한다.(지금도 그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웁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상황을 짐작한 직원은 나에게 말한다. “당신은 갈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체크인 30분 전에는 가야 하는데, 여기서 거기까지 50분 거리. 지금 겨우 60분 남았다. 그러니 갈 수 없을 것이다.”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직원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개학 즈음이어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여 날짜를 바꿀 비행기 표가 생겼대도 수중에 여윳돈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꼭 그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절박함이 앞섰다.

 

정보센터로 가보라는 말에 당황한 가슴을 쓸어내릴 틈도 없이 달려갔다. 다시 처음부터 상황을 설명해야만 했다. “나는 공항에 지금 잘못 왔고, 그 비행기를 타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 까만 머리. 금방이라도 눈물 맺힐 눈으로 호소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직원분이 차분하게 설명해줬다. “오케이! 당신은 지금 당장 택시를 타고 그 공항으로 가야 한다. 최소한 50분은 걸리는데, 지금 출발하면 9시30분에 도착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쪽 공항에 당신의 상황을 이야기해 비행기 시간을 조금 연장해 보도록 하겠다. 서둘러라!”

 

장담할 수 없었다. 내가 타야 하는 제트 스타 비행기는 국내 전용으로 기내에서 물을 사고 지정 좌석도 없는, 한마디로 한 사람을 위해 기다린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비행기였다. 그래도 지푸라기는 잡았다.

 

이제 택시 타고 본래의 공항으로 이동하는 것. 그런데 아뿔싸! 택시비가 오스트레일리아 돈으로 90달러란다. 내가 가진 전재산은 50달러뿐인데. 카드도 하나 없었고 돈 빌릴 이 누구 하나 없었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나는 택시를 타고 빨리 이동해야 했다. 그렇지만 돈이 부족한데?

 

이제 내 몫이었다. 택시를 잡았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앞좌석에 탔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50달러로 어떻게 그 공항까지 갈 수 있을까? 택시기사는 인도에서 온 외국인이었다. 초를 다투는 시간과 부족한 돈 때문에 마음이 무척 조급했다. 그렇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러곤 이야기를 건냈다.

 

“잘 들으세요, 저 돈 없어요”

 

“나는 한국에서 왔어요. 한국 사람을 만나본 적 있어요?” “2002 월드컵 기억하세요? 삼성 휴대폰을 쓰시네요? 그거 한국산이에요.” 부족한 돈을 한국에서 보낼 심산이었던 나는, 자연스레 이야기하면서 전자우편 주소를 물었다. 내릴 때 물어보면 정신 없을 것이란 판단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기름도 한 번 떨어지고, 고속도로에서 시속 초과로 카메라에도 찍히고, 정말 여러가지 했다. 다시 내 지갑을 뒤졌다.

 

오스트레일리아 돈 50달러, 홍콩 공항에서 햄버거 먹으려고 남겨뒀던 15달러, 그리고 정말 지갑 탈탈 털어서 한국 돈 7천원을 찾았다. 전부 합치면 이곳 돈으로 75달러 정도였다. 그래도 부족한 택시요금. 미터기는 속절없이 잘도 올라갔다. 드디어 내가 가진 전재산 75달러를 넘었다.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야심한 낯선 이국땅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돈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저 어떻게 보이세요? 제 성격을 한 번 짐작해 보세요. 물론 우리가 처음 만났다 해도 왜 느낌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제 첫인상 어때요?” “왜 그런 것을 물어보지? 그래, 내 생각엔 당신은 이노선트(innocent)한 것 같다!” “그럼 그 말은, 어니스트(honest)와 비슷해요? 그럼 하나만 더 물을게요. 저 믿으세요?”

 

내가 생각해도 정말 어이없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래, 난 당신을 믿는다!” 앗싸! 인도인 특유의 새큼한 냄새가, 달큼한 내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곤 나는 지체 없이 말을 꺼냈다. “고마워요. 믿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죠. 나도 당신을 믿어요. 그렇기에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어요. 제가 하는 이야기 잘 들으세요.

 

저 돈 없어요. 가진 건 75달러뿐 이에요. 그런데 나를 믿는다고 했죠? 한국에 가면 전자우편으로 나머지 돈 꼭 갚아 드릴게요.” 마음 깊은 곳에서 모든 용기를 끌어, 진실된 마음으로 준비했던 이야기를 전했다. 두근두근. 이제 난 어떻게 되지?

 

“돈? 보내주지 않아도 된다. 당신이 가진 돈만 받겠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이 비행기를 타는 일이다!” 세상에, 감사 답례로 내가 산 기념품을 꺼내 선물하겠다고 하자 한사코 사양했다. 그러고는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오히려 미터기를 꺼 버렸다. 어쩜 그런 배려까지 ….


이제 남은 열쇠는, 공항에 빨리 가는 것. 한참을 달리다 공항 표지판을 발견했다. 그때 시각 9시20분. 그런데 영화는 항상 마지막 순간에 꼬이지 않던가! 공항은 잘 찾았는데 들머리가 어딘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엉뚱한 비행기로 돌진

 

절망이었다. 차를 돌릴 겨를도 틈도 없었다. 아스팔트길이 아닌 그곳에서 전진과 후진을 거듭하며 흙먼지만 잔뜩 날렸다.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선명한 주황색 비행기를 발견했다. 제트 스타! 그때 시간 9시30분, 9시30분에 출발하기로 한 비행기가 정말 그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나를 기다려 준 것이다.

 

간신히 공항 입구를 찾아가니 ‘속도를 줄이시오’ 표지와 함께 설치된 스무 곳이 넘는 방지턱. 그야말로 하늘을 날듯이 날랐다. “당신 차 괜찮겠소?” 나의 질문에, 당신의 비행기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던 택시 아저씨! 난 정말로 카레를 좋아할 것이다. 그렇게 여차해서 39분에 내렸다. 전자우편으로 꼭 연락하겠다는 인사와 함께, 약지에 낀 2년차 된 내 따뜻한 은반지를 그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꼭 맞았다.

 

 “그건 우리 우정의 표시야!” 그러곤 캐리어를 들고 정신없이 공항으로 뛰었다. 적막한 공항에서 나를 발견한 여직원이 무전기로 말했다. “영 레이디가 도착했다. 막 도착했다!” 그러곤 어서 가라고 나에게 말했다. 선명한 저 제트 스타 비행기를 향해.

 

비행기 두 대가 있었다. 이미 흥분한 나는 조금 더 익숙해 보이는 비행기를 향해 뛰어갔다. 뒤에서 ‘스톱’이라는 여승무원의 말이 들렸다. ‘내가 도착했는데 오인하고 출발하려 하는구나.’ 그래서 더 열심히 냅다 달렸다. 그런데 공항직원들이 달려들어서, 나를 붙잡곤 정신 차리라고 말하였다. 그 비행기가 아니라면서. 마지막까지 나는 그렇게 웃겼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에 올랐다. 마지막 탑승자. 승무원이 말했다. “당신은 행운아예요!” 제트 스타는 한사람을 위해서 기다리지 않는단다. 그런데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 출발시간이 조금 지연됐는데 그러던 와중에 내가 도착했다는 것이다. 지금 출발할 것이니 ‘남는’ 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신다.

‘하~’ 알 수 없는 기분에 눈물이 나왔다. 그렇게 예정시각보다 늦은 15분 뒤,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낯선 시골의 공항을 떠났다. 정다정/ 전남 나주시 죽림동

 

 

 

캄캄한 새벽 인도 시골길서 버스기사 줄행랑,

 

그 뒤…


독자들의 휴가체험기,
그 파란만장하고 스릴 넘치는 사연들

 

많은 분들이 로 재미나는 여행담을 보내주셨습니다. 서랍에, 컴퓨터 폴더에 쌓아뒀던 사진들도 함께 보내주셨습니다. 제때 마감하기도 벅찬 일정 속에 독자들의 사연을 읽는 것은, 고행에 가까운 중노동이었습니다.

 

‘이걸 언제 다 읽어!’ 한숨소리도 새어나왔습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이보다 더 재미있을 수 없었던 휴가체험’을 보내 달라고 했더니, 정말 ‘이보다 더 재미있을 수 없는’ 체험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한참 웃을 수 있었습니다. 웃으면서 즐겁게 마감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길을 잃고, 외국인과 실랑이를 벌이고, 도둑을 맞고, 비행기를 놓치고, 버스 기사가 도망가 버린 버스를 몰고, 그래도 살아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파란만장한 사연들은 세상 그 어느 이야기보다 재미있었습니다. 때론 걱정되고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지나가 버린’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행이란 먼 훗날 꺼내 볼 수 있는 시간과 이야기를 저축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지나가 버린 이야기들을 함께 얘기하며 웃을 수 있어서 는 행복했습니다. 더 많은 분들의 휴가를 ‘열렬히’ 후원하지 못한 점이 아쉬울 뿐입니다. 가장 재미있었던 몇 분의 여행 이야기와 아름다운 여행 사진을 지면에 싣습니다.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을 함께 즐겨주십시오.

김중혁 기자 pen@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사진모델 정진화 / 독자 휴가체험기 최우수작 당선자

 


황당하게 달리는 공포의 심야버스 / 정진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야심한 새벽 인도의 국도에서 들이닥친 경찰관과 운전기사의 줄행랑,

그뒤…


저는 32살의 직장인입니다. 직장인이 되고 나면 진정한 휴가를 떠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겪어본 사람은 다들 알 겁니다. 저는 25살 때 제 인생에서 다시 돌아올까 말까 한 1년의 휴가를 자발적으로 내고(사실 휴학생 신분이었죠. 아, 다시 돌아오지 못할 시절…)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습니다. 처음에는 필리핀에서 몇 달 죽치고 있다가 영어 공부도 안 되고 해서 인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정도면 대충 저의 여행이 얼마나 치밀하고 계획적인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하하….

 

장발에 특이한 패션으로 여행하다

아무튼 인도는 인생에서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여행자의 로망이지요. 하지만 저는 그런 로망을 알기에는 너무 무뚝뚝하고 감수성 떨어지는 경상도 사내였기에 더위나 피하고 영어 실력이나 쌓을 요량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제 여행이나 인생은 대부분 이렇게 계획 없이 이루어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곳에서 주로 했던 일은, 새벽 일찍 일어나 일출 보기,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일을 찾기, 더운 시간에 시원한 곳을 찾아 죽치기, 지나가다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 나누거나 친구가 되기, 저녁에 일몰 보기, 심심할 때 산책하기, 맛있는 거 찾아먹기 들이었습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여기저기 관광지를 찍고 다니는 관광객들은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여행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죠.

 

어쨌거나 인도에서는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간에 재미있는 일들을 많이 겪게 됩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하나 하도록 하지요…

 

때는 2001년었지요. 아주 무더운 여름날이었고, 저는 인도를 거지처럼 여행하던 중이었습니다. 평생 해보고 싶었던 장발을 한 채 말이죠. 평소에 한국에서는 잘 입을 수 없는 빨간 바지나 보라색 바지, 이런 것들이 무척 마음에 들더군요. 그래서 한국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골라서 하고 다녔습니다. 장발이나 특이한 패션은 지금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4월이 되니, 인도의 중남부는 정말 혀가 쑥 나올 정도로 더웠습니다. 눈동자를 굴리는 것조차 귀찮을 정도로 살인적인 더위지요. 저는 한국의 날씨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더위의 나라 인도에서 아스팔트의 뜨거운 열기를 온몸으로 쬐고 있더랬습니다.

 

더위도 피하고 구경도 할 겸 다람살라라고 하는 인도의 북부 마을(티베트 임시정부가 있어서 ‘작은 티베트’라고도 하는 마을)로 향했습니다. 다람살라에서 열리는 티베트 축제에 ‘달라이라마’가 참석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관광객들이 많았습니다. 축제가 끝나고 저는 다시 델리로 향할 참이었습니다.

 

보통 인도에서는 도시와 도시를 넘어가는 데 버스나 열차를 10시간씩 타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보통은 지역 버스가 있지만 관광객들이 많은 경우는 따로 버스 한 대를 대절해서 원하는 시간대에 출발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외국인들만 따로 모아서 저녁 늦게 델리로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길래 저도 그 버스에 탑승했지요.


미국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은?

 

저녁에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는 관광버스였습니다. 하루 저녁만 버스에서 잠을 자며 보내면 델리까지 도착할 수 있는 그런 버스였죠. 버스 안에는 국적도 생김새도 다양한 사람들이 빈자리 하나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저도 잠이나 자자 하고 한숨 자고 있었습니다. 의자는 불편해도 워낙 피곤했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웅성웅성하는 소리에 잠을 깨보니 경찰 같은 사람들이 버스에서 운전기사와 말다툼을 하고 있더군요. 버스는 전봇대 하나 없는 암흑 천지의 도로변에 이미 멈춰 서 있는 상태였구요. 버스에 탑승한 외국인들은 모두 잠도 덜 깨고, 어리둥절한 상황이라 그냥 경찰관과 운전기사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뭡니까? 갑자기 경찰관이 영어로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제대로 알아들은 바로는 이 버스는 불법 영업을 하는 버스이므로 더 이상 운행을 할 수 없고 경찰서로 연행하겠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저희들은 정말 기가 막혔지요. 깜깜한 새벽에, 게다가 어딘지도 모르는 깜깜한 도로변에서 경찰관이랍시고 나타나더니 버스를 가져가 버리겠다니요. 여기저기서 성질이 급하신 외국인들이 소리를 지르더군요. 제가 듣기로는 “뭔 소리여, 이것들이!”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입니까, 갑자기 운전사가 우리가 웅성거리는 틈을 타서 버스를 버리고 도망을 치는 게 아닙니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상상해 보시죠. 아주 캄캄한 새벽, 어딘지 모르는 낯선 곳에서 달랑 버스와 남은 40여명의 관광객들, 그리고 경찰이랍시고 우리를 협박하는 자들….

 

저는 너무나도 다른 문화권에서 온 낯선 여행자들의 단결력과 협상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이 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 경찰의 요구를 들을 수 없다”를 우리의 행동 원칙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멋진 근육을 자랑하는 어떤 우락부락한 서양인 남자가 순식간에 생긴 단체인 ‘관광버스 비상대책위원회’의 협의 과정을 주도했지요. 결국 경찰관은 우리에게 1인당 약 500루피(우리나라 돈으로 약 1만5천원)정도의 벌금을 요구하더군요. 그러면 버스를 다시 보내 주겠노라고. 아마 자신들이 대충 돈을 받아서 버스를 보내 버릴 요량이었던 모양입니다.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우리들은 ‘왜 우리가 벌금을 내느냐’며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때 시간이 새벽 3시를 조금 넘었을 겁니다.

 

사람들은 아주 다양하고 재밌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주로 미국 사람들은 계속 미국 대사관을 들먹이며 “아침만 되면 이 사실을 미국 대사관에 알리겠다”고 인도 경찰을 협박했습니다. 이스라엘 국적의 젊은 여성은 어딘가에서 돌멩이를 집어들더니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경찰서 본부로 가자, 버스를 불질러 버리겠다는 등의 과격한 이야기를 하면서요. 저는 군대에 다녀오는 이스라엘 여성들이 조금은 과격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몸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한편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그냥 벌금을 내고 갑시다”라는 협상안을 내놓으셨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델리에서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여행객들은 더욱더 흥분해 있었죠. 저는 영어도 짧고 워낙 소극적인 성격 탓으로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여행객이 버스를 운전하다

 

어쩐지 인도 경찰관들이 불쌍하게 여겨졌습니다. 새벽에 저들은 무엇을 얻으려고 이런 일을 했을까 싶기도 하고, 운전사까지 도망간 마당에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 나가려고 하는 것인지 참 막막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경찰 두 명과 40여명의 외국인들은 버스 안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결국 경찰들은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미국인들의 저 강압적인 태도가 큰 몫을 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입니까. 운전사는 도망치고 없는데 어떻게 앞으로 절반가량의 길을 운전해서 가야 하는 상황에서 두 경찰관은 버스를 운전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새벽 3시에 모두 잠든 캄캄한 시골길에서 운전사를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하고,

 

우리는 출발해야 하는 상황이고, 모두들 난감한 처지였습니다. 참고로 인도의 국도 같은 도로는 우리나라와 달리 사람 한 명, 지나가는 버스 한 대 찾기 힘든 상황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나 새벽에는 더더욱 그렇지요.

 

아주 우습게도 사람들은 버스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지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젊은 프랑스인이 예전에 버스 운전을 해 본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은 ‘운전할 줄 안다’라고 했지, 버스 운전에 능숙하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두들 조용한 가운데 다른 서양인 한 사람도 자신도 운전 경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 또한 운전한 경험이 있는 것이지 능숙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겠지요.

 

두 사람 때문에 안심한 여행객들은 “그럼 가자!”를 외쳤습니다. 그 다음 코스가 얼마나 험난할지는 누구도 상상 못 했지요. 두 사람은 정말이지 버스를 몰아본 경험이 있는가 의심스러울 만치 어리버리하게 버스를 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적도 차도 없는 인도의 길을 달리는 금발의 서양 운전사, 그리고 그 뒷자리를 가득 메운 온갖 국적의 외국인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여행자의, 여행자에 의한, 여행자를 위한 여행 버스가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버스 운전기사가 된 그들은 조심스럽게 델리까지 운전을 했습니다. 뒤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그저 ‘우리 목숨이 안전할 수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저 시바신께서 그 외국인들에게 인도 운전을 습득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말이죠.

 

결국 10시간이면 올 거리를 우리는 20시간을 넘게 달려 델리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최고의 운전수는 버스를 델리의 길거리 아무 데나 세운 뒤 우리를 내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들 서로의 길을 축복하며 헤어졌습니다. 그날의 경험만으로도 파란 눈의 서양인이 친구처럼, 형제처럼 느껴졌습니다. 진땀을 흘리며 운전한 두 서양인에게도 박수가 쏟아졌지요. 그들은 아마 인도에 와서 관광버스를 운전해 본 여행담을 가지고 자신의 나라에 돌아갔겠지요.

 

왜 그곳에선 웃을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에서는 흔히 경험해 볼 수 없는 이런 특이한 경험들을 인도에서 한두 가지씩은 꼭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 친구는 관광버스를 타고 가다가 산적 같은 도적 떼를 만나서 돈을 몽땅 털리는 경험을 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이 사건은 저에게 잊지 못할 하나의 추억으로 자리 잡아 있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면 이렇게 대응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나마 모두가 여행객이었기에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한 사실만을 감사히 여기며, 마치 재미있는 모험을 했다는 듯이 실실 웃으며 그냥 각자의 갈 길로 갔는지도 모릅니다.

 

인도에서는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갑니다. 삶도, 시간도, 인생도 말이지요. 그리고 엉뚱하고 재미있는 사건들이 여기저기에서 터집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는 웃을 수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그렇게 웃어 보기가 쉽지 않은 건 왜일까요? 일상의 빈틈이 가능한 공간, 그리고 그런 공간에서 딱 한 달만이라도 다시 살고 싶은 욕구가 자꾸 저에게 손짓합니다.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저는 여전히 일출과 일몰을 보며 감동할 수 있는 날들이 이어지기를, 그리하여 하루하루가 모두 특별하고 소중한 날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꼭 다시 떠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정진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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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서 돌아온 렘을 만나야죠
최우수작 정진화씨의 네팔 여행계획

 

5년 전 무턱대고 혼자 떠난 여행기간에 얼마나 한국말과 한국 사람이 그리웠던지 …. 확신에 찬 어조로 “한국 분이시죠?”라고 버스에서 건넨 한마디가 인연이 되어 만난 네팔 청년 렘 푼. 자신의 형처럼 영국군이 되어 외국에서 일하고 싶다는 조금 엉뚱하지만 큰꿈을 가졌던, 다시 만나고 싶은 나의 오랜 친구입니다.

 

감자 농사를 짓는 산속 집에 데리고 가서는, 벌통을 잘라 꿀맛을 보여 주겠다더니 따금한 벌침 맛도 함께 준 친구. 입산료 내지 않고 안나 푸르나를 보여 주겠다더니, 정글 속에서 길을 잃어 온종일 자기 뒤통수만 보여준 친구. 고산병으로 정신 못 차리는 나를 끝까지 외면하지 않고 함께해 준 친구.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군요. ㅎㅎ.

 

임신한 아내를 두고도 5년 만에 휴가를 청하여 떠난 2007년 1월의 네팔. 렘 푼을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몇 가지 선물들과 예고 없는 방문 계획으로 신이 나서 찾은 그의 집에 그는 없었습니다. 5년 전 영국군이 되겠다던 렘 푼은 지금 쿠웨이트 용병으로 이라크 국경에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만하면 꿈을 이룬 대단한 친구로 소개해도 되겠지요?

 

아쉬움 속에 일상으로 돌아온 어느날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예전보다 유창한 영어지만 목소리의 분명한 주인공은 렘 푼이었습니다. 어디냐고? 반갑다고? 잘 지냈냐고? 알고 있는 모든 표현을 동원해 가며 반가워했습니다. 이제 네팔로 돌아왔으니, 언제 또 올거냐구요?

 

지키지 못할 약속이지만, 머지 않아 기회가 되는 대로 가겠노라며, 핸드폰 번호를 받아 적었습니다. 렘의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나의 아내와 딸아이가 모두 모이는 자리가 될 것 같아, 이번 여행이 더욱 기대됩니다. 우리들의 추억이 아이들에게도 이어져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면 합니다.

 


향기男 

 

 

                  

 

    

                                        향기男그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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