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의 휴가체험기,
그 파란만장하고 스릴 넘치는 사연들
많은 분들이 로 재미나는 여행담을 보내주셨습니다. 서랍에, 컴퓨터 폴더에 쌓아뒀던 사진들도 함께 보내주셨습니다. 제때 마감하기도 벅찬 일정 속에 독자들의 사연을 읽는 것은, 고행에 가까운 중노동이었습니다.
‘이걸 언제 다 읽어!’ 한숨소리도 새어나왔습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이보다 더 재미있을 수 없었던 휴가체험’을 보내 달라고 했더니, 정말 ‘이보다 더 재미있을 수 없는’ 체험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한참 웃을 수 있었습니다. 웃으면서 즐겁게 마감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길을 잃고, 외국인과 실랑이를 벌이고, 도둑을 맞고, 비행기를 놓치고, 버스 기사가 도망가 버린 버스를 몰고, 그래도 살아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파란만장한 사연들은 세상 그 어느 이야기보다 재미있었습니다. 때론 걱정되고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지나가 버린’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행이란 먼 훗날 꺼내 볼 수 있는 시간과 이야기를 저축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지나가 버린 이야기들을 함께 얘기하며 웃을 수 있어서 는 행복했습니다. 더 많은 분들의 휴가를 ‘열렬히’ 후원하지 못한 점이 아쉬울 뿐입니다. 가장 재미있었던 몇 분의 여행 이야기와 아름다운 여행 사진을 지면에 싣습니다.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을 함께 즐겨주십시오.
김중혁 기자 pen@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사진모델 정진화 / 독자 휴가체험기 최우수작 당선자
황당하게 달리는 공포의 심야버스 / 정진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야심한 새벽 인도의 국도에서 들이닥친 경찰관과 운전기사의 줄행랑,
그뒤…
저는 32살의 직장인입니다. 직장인이 되고 나면 진정한 휴가를 떠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겪어본 사람은 다들 알 겁니다. 저는 25살 때 제 인생에서 다시 돌아올까 말까 한 1년의 휴가를 자발적으로 내고(사실 휴학생 신분이었죠. 아, 다시 돌아오지 못할 시절…)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습니다. 처음에는 필리핀에서 몇 달 죽치고 있다가 영어 공부도 안 되고 해서 인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정도면 대충 저의 여행이 얼마나 치밀하고 계획적인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하하….
장발에 특이한 패션으로 여행하다
아무튼 인도는 인생에서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여행자의 로망이지요. 하지만 저는 그런 로망을 알기에는 너무 무뚝뚝하고 감수성 떨어지는 경상도 사내였기에 더위나 피하고 영어 실력이나 쌓을 요량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제 여행이나 인생은 대부분 이렇게 계획 없이 이루어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곳에서 주로 했던 일은, 새벽 일찍 일어나 일출 보기,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일을 찾기, 더운 시간에 시원한 곳을 찾아 죽치기, 지나가다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 나누거나 친구가 되기, 저녁에 일몰 보기, 심심할 때 산책하기, 맛있는 거 찾아먹기 들이었습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여기저기 관광지를 찍고 다니는 관광객들은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여행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죠.
어쨌거나 인도에서는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간에 재미있는 일들을 많이 겪게 됩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하나 하도록 하지요…
때는 2001년었지요. 아주 무더운 여름날이었고, 저는 인도를 거지처럼 여행하던 중이었습니다. 평생 해보고 싶었던 장발을 한 채 말이죠. 평소에 한국에서는 잘 입을 수 없는 빨간 바지나 보라색 바지, 이런 것들이 무척 마음에 들더군요. 그래서 한국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골라서 하고 다녔습니다. 장발이나 특이한 패션은 지금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4월이 되니, 인도의 중남부는 정말 혀가 쑥 나올 정도로 더웠습니다. 눈동자를 굴리는 것조차 귀찮을 정도로 살인적인 더위지요. 저는 한국의 날씨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더위의 나라 인도에서 아스팔트의 뜨거운 열기를 온몸으로 쬐고 있더랬습니다.
더위도 피하고 구경도 할 겸 다람살라라고 하는 인도의 북부 마을(티베트 임시정부가 있어서 ‘작은 티베트’라고도 하는 마을)로 향했습니다. 다람살라에서 열리는 티베트 축제에 ‘달라이라마’가 참석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관광객들이 많았습니다. 축제가 끝나고 저는 다시 델리로 향할 참이었습니다.
보통 인도에서는 도시와 도시를 넘어가는 데 버스나 열차를 10시간씩 타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보통은 지역 버스가 있지만 관광객들이 많은 경우는 따로 버스 한 대를 대절해서 원하는 시간대에 출발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외국인들만 따로 모아서 저녁 늦게 델리로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길래 저도 그 버스에 탑승했지요.
미국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은?
저녁에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는 관광버스였습니다. 하루 저녁만 버스에서 잠을 자며 보내면 델리까지 도착할 수 있는 그런 버스였죠. 버스 안에는 국적도 생김새도 다양한 사람들이 빈자리 하나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저도 잠이나 자자 하고 한숨 자고 있었습니다. 의자는 불편해도 워낙 피곤했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웅성웅성하는 소리에 잠을 깨보니 경찰 같은 사람들이 버스에서 운전기사와 말다툼을 하고 있더군요. 버스는 전봇대 하나 없는 암흑 천지의 도로변에 이미 멈춰 서 있는 상태였구요. 버스에 탑승한 외국인들은 모두 잠도 덜 깨고, 어리둥절한 상황이라 그냥 경찰관과 운전기사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뭡니까? 갑자기 경찰관이 영어로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제대로 알아들은 바로는 이 버스는 불법 영업을 하는 버스이므로 더 이상 운행을 할 수 없고 경찰서로 연행하겠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저희들은 정말 기가 막혔지요. 깜깜한 새벽에, 게다가 어딘지도 모르는 깜깜한 도로변에서 경찰관이랍시고 나타나더니 버스를 가져가 버리겠다니요. 여기저기서 성질이 급하신 외국인들이 소리를 지르더군요. 제가 듣기로는 “뭔 소리여, 이것들이!”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입니까, 갑자기 운전사가 우리가 웅성거리는 틈을 타서 버스를 버리고 도망을 치는 게 아닙니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상상해 보시죠. 아주 캄캄한 새벽, 어딘지 모르는 낯선 곳에서 달랑 버스와 남은 40여명의 관광객들, 그리고 경찰이랍시고 우리를 협박하는 자들….
저는 너무나도 다른 문화권에서 온 낯선 여행자들의 단결력과 협상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이 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 경찰의 요구를 들을 수 없다”를 우리의 행동 원칙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멋진 근육을 자랑하는 어떤 우락부락한 서양인 남자가 순식간에 생긴 단체인 ‘관광버스 비상대책위원회’의 협의 과정을 주도했지요. 결국 경찰관은 우리에게 1인당 약 500루피(우리나라 돈으로 약 1만5천원)정도의 벌금을 요구하더군요. 그러면 버스를 다시 보내 주겠노라고. 아마 자신들이 대충 돈을 받아서 버스를 보내 버릴 요량이었던 모양입니다.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우리들은 ‘왜 우리가 벌금을 내느냐’며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때 시간이 새벽 3시를 조금 넘었을 겁니다.
사람들은 아주 다양하고 재밌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주로 미국 사람들은 계속 미국 대사관을 들먹이며 “아침만 되면 이 사실을 미국 대사관에 알리겠다”고 인도 경찰을 협박했습니다. 이스라엘 국적의 젊은 여성은 어딘가에서 돌멩이를 집어들더니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경찰서 본부로 가자, 버스를 불질러 버리겠다는 등의 과격한 이야기를 하면서요. 저는 군대에 다녀오는 이스라엘 여성들이 조금은 과격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몸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한편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그냥 벌금을 내고 갑시다”라는 협상안을 내놓으셨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델리에서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여행객들은 더욱더 흥분해 있었죠. 저는 영어도 짧고 워낙 소극적인 성격 탓으로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여행객이 버스를 운전하다
어쩐지 인도 경찰관들이 불쌍하게 여겨졌습니다. 새벽에 저들은 무엇을 얻으려고 이런 일을 했을까 싶기도 하고, 운전사까지 도망간 마당에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 나가려고 하는 것인지 참 막막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경찰 두 명과 40여명의 외국인들은 버스 안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결국 경찰들은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미국인들의 저 강압적인 태도가 큰 몫을 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입니까. 운전사는 도망치고 없는데 어떻게 앞으로 절반가량의 길을 운전해서 가야 하는 상황에서 두 경찰관은 버스를 운전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새벽 3시에 모두 잠든 캄캄한 시골길에서 운전사를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하고,
우리는 출발해야 하는 상황이고, 모두들 난감한 처지였습니다. 참고로 인도의 국도 같은 도로는 우리나라와 달리 사람 한 명, 지나가는 버스 한 대 찾기 힘든 상황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나 새벽에는 더더욱 그렇지요.
아주 우습게도 사람들은 버스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지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젊은 프랑스인이 예전에 버스 운전을 해 본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은 ‘운전할 줄 안다’라고 했지, 버스 운전에 능숙하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두들 조용한 가운데 다른 서양인 한 사람도 자신도 운전 경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 또한 운전한 경험이 있는 것이지 능숙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겠지요.
두 사람 때문에 안심한 여행객들은 “그럼 가자!”를 외쳤습니다. 그 다음 코스가 얼마나 험난할지는 누구도 상상 못 했지요. 두 사람은 정말이지 버스를 몰아본 경험이 있는가 의심스러울 만치 어리버리하게 버스를 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적도 차도 없는 인도의 길을 달리는 금발의 서양 운전사, 그리고 그 뒷자리를 가득 메운 온갖 국적의 외국인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여행자의, 여행자에 의한, 여행자를 위한 여행 버스가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버스 운전기사가 된 그들은 조심스럽게 델리까지 운전을 했습니다. 뒤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그저 ‘우리 목숨이 안전할 수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저 시바신께서 그 외국인들에게 인도 운전을 습득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말이죠.
결국 10시간이면 올 거리를 우리는 20시간을 넘게 달려 델리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최고의 운전수는 버스를 델리의 길거리 아무 데나 세운 뒤 우리를 내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들 서로의 길을 축복하며 헤어졌습니다. 그날의 경험만으로도 파란 눈의 서양인이 친구처럼, 형제처럼 느껴졌습니다. 진땀을 흘리며 운전한 두 서양인에게도 박수가 쏟아졌지요. 그들은 아마 인도에 와서 관광버스를 운전해 본 여행담을 가지고 자신의 나라에 돌아갔겠지요.
왜 그곳에선 웃을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에서는 흔히 경험해 볼 수 없는 이런 특이한 경험들을 인도에서 한두 가지씩은 꼭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 친구는 관광버스를 타고 가다가 산적 같은 도적 떼를 만나서 돈을 몽땅 털리는 경험을 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이 사건은 저에게 잊지 못할 하나의 추억으로 자리 잡아 있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면 이렇게 대응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나마 모두가 여행객이었기에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한 사실만을 감사히 여기며, 마치 재미있는 모험을 했다는 듯이 실실 웃으며 그냥 각자의 갈 길로 갔는지도 모릅니다.
인도에서는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갑니다. 삶도, 시간도, 인생도 말이지요. 그리고 엉뚱하고 재미있는 사건들이 여기저기에서 터집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는 웃을 수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그렇게 웃어 보기가 쉽지 않은 건 왜일까요? 일상의 빈틈이 가능한 공간, 그리고 그런 공간에서 딱 한 달만이라도 다시 살고 싶은 욕구가 자꾸 저에게 손짓합니다.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저는 여전히 일출과 일몰을 보며 감동할 수 있는 날들이 이어지기를, 그리하여 하루하루가 모두 특별하고 소중한 날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꼭 다시 떠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정진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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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서 돌아온 렘을 만나야죠
최우수작 정진화씨의 네팔 여행계획
5년 전 무턱대고 혼자 떠난 여행기간에 얼마나 한국말과 한국 사람이 그리웠던지 …. 확신에 찬 어조로 “한국 분이시죠?”라고 버스에서 건넨 한마디가 인연이 되어 만난 네팔 청년 렘 푼. 자신의 형처럼 영국군이 되어 외국에서 일하고 싶다는 조금 엉뚱하지만 큰꿈을 가졌던, 다시 만나고 싶은 나의 오랜 친구입니다.
감자 농사를 짓는 산속 집에 데리고 가서는, 벌통을 잘라 꿀맛을 보여 주겠다더니 따금한 벌침 맛도 함께 준 친구. 입산료 내지 않고 안나 푸르나를 보여 주겠다더니, 정글 속에서 길을 잃어 온종일 자기 뒤통수만 보여준 친구. 고산병으로 정신 못 차리는 나를 끝까지 외면하지 않고 함께해 준 친구.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군요. ㅎㅎ.
임신한 아내를 두고도 5년 만에 휴가를 청하여 떠난 2007년 1월의 네팔. 렘 푼을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몇 가지 선물들과 예고 없는 방문 계획으로 신이 나서 찾은 그의 집에 그는 없었습니다. 5년 전 영국군이 되겠다던 렘 푼은 지금 쿠웨이트 용병으로 이라크 국경에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만하면 꿈을 이룬 대단한 친구로 소개해도 되겠지요?
아쉬움 속에 일상으로 돌아온 어느날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예전보다 유창한 영어지만 목소리의 분명한 주인공은 렘 푼이었습니다. 어디냐고? 반갑다고? 잘 지냈냐고? 알고 있는 모든 표현을 동원해 가며 반가워했습니다. 이제 네팔로 돌아왔으니, 언제 또 올거냐구요?
지키지 못할 약속이지만, 머지 않아 기회가 되는 대로 가겠노라며, 핸드폰 번호를 받아 적었습니다. 렘의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나의 아내와 딸아이가 모두 모이는 자리가 될 것 같아, 이번 여행이 더욱 기대됩니다. 우리들의 추억이 아이들에게도 이어져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