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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男 피스톨金 2008. 2. 20. 16:32

 

           젊은 사제들이 일어섰다! 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지난 18일 서울 신월동 성당에서 월례회의를 열고 향후 활동 방안에 관해 논의했다. 이날 회의에는 원로 사제인 문정현, 문규현 신부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신부들이 참석했다. (강윤중기자)




ㆍ‘삼성 비자금 폭로’ 다시 전면에 나선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이 얼마만이던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다시 뉴스의 중심에 섰다. 사제단은 지난해 10월29일 삼성그룹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와 함께 삼성 비자금 의혹을 폭로했다. 이 기자회견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삼성은 특검 수사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둘로 나뉜다. ‘역시 사제단’이라는 상찬이 있는가 하면, ‘대체 언제적 사제단이냐’는 냉소도 공존한다. 과거 사제단은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지만,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사제단의 이름이 갖는 무게감과 폭발력이 예전 같지 않았던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사제단의 젊은 신부들은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서 이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해소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선배 신부들이 눈에 보이는 독재 권력과 싸웠다면, 이제는 모두 당연하게 여겼던 현상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시대에 적실한 문제 의식과 단호한 실천력으로 사제단의 역사를 새로 써나가고 있었다.

세계 유일의 자율적인 사제 조직

올해로 창립 34주년을 맞은 사제단은 한국 천주교의 공식 기구가 아니다. 뜻이 맞는 신부끼리 결성한 일종의 사조직이다. 회칙이 없고, 대표와 총무 등 집행부를 제외하고는 가입이나 탈퇴 같은 소속의 개념도 없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사제단 회의에 참석하면 그날부터 사제단 신부가 된다.

한 번 활동을 함께했다고 해서 집행부의 모든 주장에 동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제단이 삼성 문제를 제기한 것이 탐탁지 않은 신부들은 뒤로 물러나 있으면 그만이다. 이처럼 사제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전국 단위의 조직은 전 세계에서 사제단이 유일하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성격은 다른 기구가 1969년 설립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다. 정평위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감독을 받는 공식 조직이다. 따라서 정평위가 발표하는 성명은 한국 가톨릭의 공식 입장이 된다.

지금은 사안에 따라 긴장과 갈등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70~80년대를 말할 때 정평위와 사제단을 분리하기는 쉽지 않다. 김병상 몬시뇰, 함세웅 신부 등 사제단의 핵심 인물 상당수가 정평위에서도 활동했다. 그러나 사제단은 정평위보다 몸이 한결 가벼웠다. 주교회의라는 상부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긴급한 사안에 신속하고도 과감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정평위보다 사제단의 이름이 더 많이 거론되는 이유 중 하나다.

사제단이 탄생한 계기는 74년 7월 발생한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의 구속 사건이다. 지주교는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발표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이 때부터 전국의 신부들은 사제단을 조직하고, 지주교의 석방과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했다. 세상과 동떨어져 지내던 사제들이 지주교의 구속으로 본의 아니게 ‘각성당했던’ 것이다.

사제들은 거침이 없었다. 고비고비마다 전면에 나섰다. 80년 5월엔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광주교구와 전주교구가 중심이 돼 각 성당에 ‘전두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유인물을 배포하고 반정부 성명서를 냈다.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핀 것도 사제단이었다. 그해 5월 사제단의 고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 독재 정권의 몰락을 재촉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런 활동들은 사제단이 아니고서는 하기 어려웠던 일로 평가된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매우 제한돼 있던 시대였지만 성직자에 대해선 탄압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천주교는 로마 교황청을 정점으로 전 세계에 탄탄한 조직을 갖추고 있다는 면에서도 다른 집단보다 특장점이 있었다. 사제에겐 회합 장소인 성당과 전국 교구라는 국내 조직망, 신자들이라는 지지세력이 있었다. 이런 신분상의 특수성은 민주화 운동을 함께했던 세력 대부분이 이합집산한 현재에도 사제단이 원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

2세대 사제단의 전면 부상

97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사회는 민주화·다원화됐다. 정치와 경제, 생태, 인권 문제를 다루는 시민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70~80년대 사제단이 사실상 홀로 수행하던 역할을 여러 단체들이 분점하면서 사제단의 공간은 그만큼 줄었다.

이런 경향은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확연해진다. 뜨거운 이슈를 만들어내던 사제단의 ‘의제설정 기능’은 상당 부분 축소됐다. 물론 사제단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운동과 새만금 간척사업 중단을 요구하는 삼보일배 등 사회문제에 관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주목도는 과거만큼 높지 않았다.

사제단은 인적 구성에도 변화를 겪었다. 70~80년대 명성을 얻었던 ‘간판 스타’들이 집행부 일선에서 퇴장했다. 창립 멤버 중 일부는 ‘주류’로 진입하기도 했다. 함세웅 신부는 2004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이사장이 됐고, 송기인 신부는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의 위원장에 임명됐다.

사제단이 절차적으로 한 세대를 마감한 것은 2006년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바통을 넘겨 받아 통일·생태 운동에 매진했던 문규현 신부가 그해 사제단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전종훈 신부(52)가 새 대표로 선출됐다. 대중에게 이름과 얼굴이 낯선, 이른바 ‘2세대 사제단’이 출범한 것이다.

현 집행부는 90년 이후 사제 서품을 받은 30, 40대의 젊은 신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70~80년대엔 시대가 사제들을 거리로 내몰았다면, 이 세대의 신부들은 스스로 깨어 있어야 했다.

전 신부는 90년 사제 서품을 받기 전부터 명동성당에서 평신도 신분으로 청년 활동을 하며 사회를 향한 문제 의식을 키웠다. 91년 서품을 받은 총무 김인국 신부(45)도 어린 시절 성당 게시판에서 나붙은 사제단의 성명서를 읽으며 ‘행동하는 사제’를 소명으로 알고 자랐다.

이들 새 집행부는 출범 이후 1년 이상을 사실상 ‘무명’으로 지냈다. 그러다 지난해 10월, 김용철 변호사와 함께 삼성 비자금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으로 화려하게 ‘신고식’을 치렀다. 당초 김변호사는 시민단체와 언론을 찾아갔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마지막 기댈 언덕’은 아직도 사제단이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정부나 다른 시민사회단체들이 삼성에 관해 몸을 사려 이번 사제단의 주장이 힘을 못받는 측면이 있다”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제단의 입지가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사건은 ‘사제단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존재 증명이었다.

다시 기지개 켜는 사제단

사제단의 젊은 신부들은 70~80년대를 현장에서 보내지 않았던 터라 이른바 민주개혁 세력들과 정서적으로 크게 얽혀있지 않다. 따라서 노무현정부를 비롯한 개혁 세력을 거리낌없이 비판할 수 있다. 민주화 세력의 상당수가 주류로 편입됐지만 현 집행부는 재야의 감수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다른 종교단체보다 개혁적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그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집단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일례로 이들은 함세웅 신부와 송기인 신부가 참여정부에서 공직을 맡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다. 사제가 민주화 운동을 후광 삼아 그런 자리에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송신부는 과거사위로 가기 전에 사제직에서 은퇴했고, 함신부에겐 상근직인 이사장 자리를 비상근으로 역임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사제단은 시민사회 영역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전 신부는 “지난 10년 동안, 사회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관직에 나가고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며 “민주화 운동의 영광을 특정 개인들이 차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들이 김대중·노무현정부의 당사자가 되다보니 지금 정권을 비판할 세력이 남아 있지 않다”면서 “보수 세력으로 권력이 넘어간 데는 시민사회·종교단체의 책임이 크다”고 덧붙였다.

사제단은 시민사회 운동이 국민들의 신뢰를 상실했다고 본다. 현 집행부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지난 세월 사제단을 이끈 동력은 국민들의 뜨거운 성원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시대 환경이 바뀐 데다 국민들의 지지가 예전만 못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제단이 삼성 문제에까지 개입할 필요가 있느냐’는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을 사제단도 잘 알고 있다.

김신부는 “우리는 해야 할 말을 하고,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사제단에 목소리를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여전히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 이 사회라는 것이다. 그는 “‘왜 자꾸 나서느냐’는 말을 자주 듣는데, 사실 신부님들이 더 힘들고 괴롭다. 제발 우리가 성당에서 편안히 도를 닦을 수 있게 해달라”며 웃었다.

그러나 이명박정부는 아무래도 사제단을 조용히 있게만 하지는 않을 듯싶다. 전 신부는 “영어 공교육 논란과 대운하 문제에서 보듯 민족의 정체성과 터전이 단순히 경제 논리로 재단되고 있다”면서 “더 많이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을 관찰할 것”이라고 향후 계획을 밝혔다. 그는 “사람이 중심이고 사람이 목적인 사회를 만드는 게 사제단이 할 일”이라며 “70, 80년대의 시대 정신으로 돌아가 그때보다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투쟁하겠다”고 덧붙였다.

〈 최희진기자 〉

 

 

 

                           

                                   Kate St John - Notti Senza Amore(한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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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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