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들/세 상 사람들

在佛화가 김인중 신부/ 1000년 된 돌을 노래하게 만들렵니다"

향기男 피스톨金 2008. 9. 13. 21:14

 

       1000년 된 돌을 노래하게 만들렵니다"

세계적 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 작업, 在佛화가 김인중 신부
gsmoon@chosun.com

 

 

 

인간을 정화시키는 풍경들이 있다. 한줄기 빛이 성당 안 어둠을 밀어낼 때, 운무(雲霧) 뒤덮인 비 내리는 산사(山寺)에서 종소리를 들을 때 같은 장면들이다. 빛과 여백(餘白)은 색이 없지만 어느 물감보다 울림이 크다. 그 울림에 인간은 때로 피안의 세계를 산책하고픈 유혹으로 밀려가는 것이다.

재불(在佛)생활 33년째인 김인중(金寅中·68)은 빛과 여백을 추구해온 비구상(非具象)화가다. 동양화 같기도, 서양화 같기도 하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사간 대형 서예 붓은 그의 손에서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비로, 헐벗은 나뭇가지를 덮는 눈으로 변해 유럽인의 마음을 쓰다듬었다.

한 폴란드 여성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지만 당신 그림을 보면 하느님의 손을 만지는 것 같다"고 했다. 어느 유대인은 "가톨릭에 대한 오해의 벽을 무너뜨려줬다"고 했다. 반신불수 노(老) 프랑스 의사는"아내에게 당신 그림을 내 마지막 선물로 주고 싶다"고 병상에서 전화를 해왔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성화(聖畵)처럼 보이지 않지만 어느 성화보다 감동적이다. 혁명 후 200년 넘게 내부 공간을 내주지 않던 파리 노트르담 사원이 2003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착좌(着座) 25주년 기념전시회를 그에게 처음 허락한 것이나 샤르트르 대성당, 브리우드 생 줄리앙 성당, 브로데 페르게 성당이 그에게 스테인드글라스를 부탁한 게 그런 이유다.

성당의 창(窓)은 성당의 눈(眼)이다. 그렇다면 그는 화룡점정(畵龍點睛)했다는 전설의 환생인가. 10월 30일까지 대전에서 열리는'반세기의 우정전'을 위해 내한한 그를 9일 종로구 가회동 노틀담 수녀원에서 만났다. 성모상과 석등 사이에 조각처럼 앉아있던 그가 기자를 보자 다가왔다.

―대전고 1학년 때 미술교사였던 김철호(83) 선생을 위해 연 전시회지요.

"김 선생님이 오신 건 1학년 때고 미술부는 2학년 때 생겼어요. 저희 세대는 가난과 6·25전쟁으로 예술이 뭔지 몰랐습니다. 김 선생님은 그걸 일깨워줬지요. 저희 세대는 스승을 아버지(父)처럼 모셨어요. 거동 못하는 그 분을 업고 전시회에 갈 때 참 흐뭇했습니다."

―같이 전시회를 연 분들은 대전고 동기들입니까.

"유희영 서울시립미술관장, 이종상, 이철주 중앙대 명예교수입니다. 예술적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사라지던 시절,'왜 그 실력으로 그 일을 하려느냐'는 부모와 학교의 반대를 이겨낸 친구들입니다."

―50, 60년대가 사실'예술하면 밥 굶는다'는 시절이었지요. 8남매의 장남에 공부도 잘했을 텐데 부모님이 물론 반대했겠지요.

"처음에는 펄쩍 뛰셨지요. 강요는 안 했지만 의사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대학(서울대 미대) 진학할 때 '극장 간판 그리는 사람들이 돈을 잘 번다'고 핑계를 댔어요.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반대는 안 했습니다."

―원래 예술가적인 피가 김 신부의 몸 속에 흘렀다고 생각합니까.

"판·검사 되는 것 같은 출세보다 미술이나 영화를 해보겠다는 생각은 어렸을 적부터 했어요. 고향 충남 부여의 들판과 햇빛, 둑을 그리며 미술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해방되던 해 변사(辯士)가 대사를 읊는 심청전을 본 기억도 또렷하고 '출격명령'이라는 외화를 본 뒤 영화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요."
▲ 여백미디어 제공 김인중 신부가 브리우드 생 줄리앙 성당에 설치한 자신의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을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 김인중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들.
―본인 고집대로 대학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돼 행복했겠군요.

"제가 요즘 태어났다면 미대에 못 갔을 겁니다. 지금은 예술을 사랑하는 학생을 선발하는 게 아니라 기술자를 뽑는 거지요. 제가 전시회를 하는데 파출부 아주머니가 '딸이 미대를 가려는데 제 벌이로는 과외비를 댈 수 없다'고 해요. 다음날 딸과 같이 오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려라. 그렇다면 미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요."

―아버지(김용덕·90)가 꽤 부자였다고 들었는데 대학시절 가난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돈은 많이 벌었는데 맞지도 않는 사업하시다 다 날렸지요. 대학 때 행복했던 것은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한 것이고 불행했던 것은 터무니없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굶기를 밥 먹듯 했고 동대문시장에서 산 검게 물들인 미군 군복으로 4년을 버텼지요. 오늘 문 기자가 온다고 해 이발을 했습니다만, 어느 친구로부터'머리 좀 깎고 다녀라'는 핀잔을 듣기도 했어요. 버스 차장이 제 행색을 보고 학생으로 믿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들어선 예술의 길에서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 신부가 생각하는 미술은 뭡니까.

"아름다움이죠. 단, 그 안에 통일과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통일과 질서는 미술뿐 아니라 인간 세상에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했고 제가 좋아하는 미술을 통해 매일같이 인생을 배우고 있습니다."

김인중은 ROTC로 전방 복무를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한 후 교편을 잡았다. 처음 제의는 개신교의 중학교였는데 "술, 담배를 하지 말고 세례를 받으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는 술, 담배는 워낙 안 하니까 괜찮았지만 신앙이 없었던 그는 세례 이야기에 자신이 구속 당하는 것 같아 거절했다.

두 번째 제의 받은 학교가 옛 성신(聖神)중고다. 거기서 그는 1주일에 9시간 동안 수업하고 나머지 시간을 작품활동에 바쳤다. 인연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종교도 없는데 매일 새벽 미사에 한번도 빠짐없이 참가한 것이다. 그 때를 그는 "하느님이 제게 다가오는 걸 느꼈다"고 했다.

2년 반의 교사생활을 끝으로 그는 유학을 결심한다. 목표는 파리였지만 첫 행선지는 스위스로 잡았다. 고학(苦學)이 프랑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스위스에서는 가능하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1969년 1월 그는 김포공항에서 일본 오사카, 대만, 방콕을 거쳐 1주일 만에 스위스에 도착했다.

―부모님, 그 중에서도 특히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최근 발간된 책 '빛은 춤을 춥니다'(여백) 곳곳에 나옵니다. 그런데 김 신부는 점점 어머니에게서 멀어져만 갔군요.

"무작정 간 거였습니다. 스위스에 도착했을 때 빈털터리였지만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간 겁니다. 바다에서 살고 싶은데 (우리나라는) 연못 같은 느낌이었죠."

―프랑스 유력 언론이 김 신부에게 붙인 별명이 '빛의 화가'지요. 그런데 하는 이야기마다 제게는 다 어둡게 느껴집니다. 우리나라가 연못이라는 건 또 뭡니까.

"화가 역 맡은 배우가 붓질하는 법을 보겠다고 왔다가 장래를 보장해준다며 제 작품을 가져갔지요. 나중에 물감 값도 못 받았습니다. 군 복무 중 휴가 나왔을 때 그 분 사망기사를 봤습니다. 제목이'내 돈!'이었습니다. 유명사립대 개교식 때 필요하다고 해 동숭동에서 대형 그림을 리어카에 싣고 가져다 줬지요. 그 그림이 종적도 없어졌어요. 스승 한 분은 제 작품을 궤짝 뒤에 처박아놨더군요. 기막힌 건 이 분들이 다 신자(信者)라는 겁니다. 그 뒤 저는 그림을 그냥 주지 않습니다. 소중한 걸 모르는 거지요."

―미술계에도 파벌이 대단하지요.

"대학간 파벌 보다는 대학 선생(교수)하시는 분들이 파벌을 만들지요. 자기 뒤에 부하처럼 죽 세우는 식입니다. 그러곤 자기 교과서 만들어 파는 거지요. 조교할 때 교수가 무슨 회(會)를 만든 뒤 가입을 권유했는데 안 했어요. 다음날 제 작품이 모두 복도로 나와있더군요. 그 분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잘라서 금방 죽는 나무도 있지만 가지를 쳐주면 더 잘 자라는 나무도 있습니다.' 대학 다닐 때 벌써 이런 걸 다 느꼈어요."

―그런 일들이 있은 지 몇 십 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한국이 연못이라고 느껴집니까.

"작년에 화가 루오전(展)이 대전에서 개최됐어요. 20년 전에 기획됐다 취소된 걸 성사시켰는데 정작 저는 뒷전으로 밀렸습니다. 고향작가와 서양작가가 만났다고 선전했었는데…. 그 일 당하니 정치에 이용된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루오의 손자가 오히려 저를 위로했지요. 올 4월에는 캄보디아 어린이 돕기 행사가 파리에서 열렸어요. 주최측에서 제 그림을 원해 내주고 음악회 날 제 그림을 전시했어요. 프랑스 국회의장, 내무장관, 미국대사까지 초청하는 행사였는데 우리 대사관은 초청장을 받고 답도 안 했어요. 축구선수는 TV가 따라다니지만 예술가는 외면당한다 싶었습니다."

―신부까지 속이는 게 세상이군요. 저 같으면 그런 일 당하면 그냥 안 있을 텐데.

"어떤 위대한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더 존경 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요. 지금은 다 저를 발전하게 만들려는 신의 섭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기억들뿐이라면 한국이 돌아다보기도 싫겠습니다.

"조국이고 부모 형제가 있지요. 5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묘소에 갈 때마다 나비가 날아와요. 나비는 부활을 알립니다. 지금도 나비는 제 주변에 있고 제 그림에도 있지요."
▲ 유럽에 있는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으로 세계적 명성이 나있는 재불화가 김인중 신부가 서울 가회동의 한 수녀원에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말하고 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김 신부 작품에 무슨 나비가 있다는 겁니까. 제 눈에는 알 수 없는 형상뿐인데요.

"감수성 예민한 분들은 알지요. 제가 뭘 그렸는지, 저는 말하지 않지만 아는 분들은 다 알아봅니다."

스위스 후리부르그대 유학 시절, 그는 낮에 신학을 공부하고 밤에 아르바이트를 했다. 듣던 대로 여름·겨울방학 때 열심히만 일하면 1년 학비를 충당할 수 있을 만큼 스위스는 부자나라였다. 김인중은 그곳 수퍼마켓에서 짐을 날랐고 동물원에서 야경(夜警)을 돌았다.

스위스는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곳이다. 틈틈이 그린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 때 찾아온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후리부르그대 지도 신부가 그에게 입회를 권유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그에게 가난을 빼앗아가는 대신 마음껏 작품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자유를 선물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어떤 곳인가요.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분들을 배출한 곳입니다. 지금은 7000명 가량이 소속돼 있습니다. 수도 서원(誓願)을 한 뒤 4~5년간의 훈련과정을 거치고 그 뒤로는 공동체 생활을 합니다. 우리 공동체 생활은 연구와 작품이지요. '설교 형제회'라는 말이 있을 만큼 설교도 열심히 합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수련과정이 엄격하다는데 그 사실을 부모님께 알렸습니까.

"4년 동안 모르셨지요. 유학하는 줄만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나이가 찼으니 빨리 결혼하라는 편지를 계속 보내셨을 겁니다."

―장남이어서 결혼 성화는 그 전부터 받았겠지요.

"대학원까지 다녔지만 그때는 미대 여학생을 여자로 보지 않았지요. 인격체로만 생각했지 저 사람 사귀고 하는 식의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중학교 입시 준비해 주는 과외로 생계를 이을 때여서 여학생에게 차(茶) 사줄 돈도 없었고요."

―왜 신부들은 결혼을 안 합니까.

"가톨릭 사제들은 여성이 싫어서가 아니라 저 세상이 있다는 걸 증거하기 위해 결혼을 안 하지요. 결혼 안 하면 자식 없는 것을 남들이 딱하게 여기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은 사라져도 저 세상에 있는 것들은 사라지지 않지요."

―신앙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추구하면 요즘 국내에서는 왜 종교갈등이 일어난다고 봅니까.

"우리나라의 현실이 참 창피해요. 종교는 상식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전교(傳敎)와 포교(布敎)하는 것과 반대의 길을 걷는 거예요. 종교는 권력과 금력에 결탁해서는 안됩니다."

―갈등을 빚는 종교 가운데 어느 쪽이 잘못이라고 봅니까.

"네가 마시는 물이 어디서 흘러나오는 물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 있지요. 그걸 도외시하고 다투는 우리 현실은 원시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누구 잘못을 논하기 전에 종교는 스캔들을 줄여야 합니다. 그런 것은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기자를 보며 신문기자들도 겸손해야 한다고 말할 때 기자는 잽싸게 '겸손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스위스를 떠나 프랑스로 간 게 1975년입니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파리 땅을 밟게 됐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습니까.

"파리에 도미니크 수도회가 3곳 있는데 저는 30명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스위스를 떠난 것은 작은 집에서 큰 집에 가있어도 좋다고 허락을 받은 것과 같은 겁니다. 처음에는 스위스에서 섭섭해했는데 지금은 굉장히 좋아하죠. 제 활동이 알려지면서 스위스도 부각됐으니까요."

―파리에 온 뒤로도 한참 회화를 하다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시작한 게 12년 전부터죠. 작업 자체가 어렵다고 들었습니다만.

"샤갈 같은 화가가 두 가지를 겸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마케트(표본)를 만들어 유리로 옮기는 게 정석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면 장인(匠人)이 그걸 유리로 옮겨 700도 불에 최대 네 번까지 굽는 겁니다. 비용도 많이 듭니다. 가로 세로 1m짜리 작품에 200만원 가량이 듭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프랑스가 종주국입니다. 최고 수준의 아틀리에가 많이 있어요. 저는 옮기는 과정을 생략하고 그림을 직접 유리에 그립니다."

―서예용 붓으로 그림을 그린 뒤 불에 구우면 어떻게 변할지까지 예상하고 해야겠네요.

"스테인드글라스에 빛이 투과될 때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된 주변 벽에 어떻게 비치는지, 바닥에는 어떻게 형상이 만들어지는지, 여름과 겨울에 해의 고도(高度)가 다를 때 어떻게 될지까지 예측해야 합니다. 색도 해가 뜨는 곳에는 파랑·보라처럼 차가운 색을, 해가 지는 곳에는 빨강·노랑처럼 따뜻한 색을 배치합니다."

―구워서 발색이 제대로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깨야 하지요. 잘 구워졌어도 어떤 작품은 고상한 느낌이 들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립니다. 도자기와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스테인드글라스에 이어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미술은 다시 살릴 수 있지만 스테인드글라스는 어찌 보면 잔인한 예술이지요."

―잔인한 예술을 왜 합니까.

"그만큼 매력이 있어요. (한줄기 빛이 어둠을 관통하는 사진을 보여주며) 이걸 보세요. 빛이 창을 통해 들어왔을 때의 분위기가 꼭 렘브란트의 성화(聖畵)같지요."

―가장 아끼는 색이 무언가요.

"빨간색이지요. 그런데 같은 빨간색이라도 어떤 때는 포도주 빛이 되다 어떤 때는 고기에 배어있는 피같은 색이 나기도 합니다."

―2003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작품 전시회를 한 게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처음이라고 프랑스 언론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제 전시회 때도 말이 많았어요. 프랑스는 문화재 관리에 엄격해 반대가 많았거든요. 아마 200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예요. 나중에 주교가 된 노트르담 수석 사제가 제 작품을 매우 아꼈기 때문에 전시회가 성사된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에브리 대성당은 프랑스에서 20세기에 만들어진 가장 큰 성당입니다. 이탈리아 건축가 마리오 보타의 걸작품 가운데 하나인데 그곳에 신부님의 스테인드글라스 36점이 걸렸지요.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한 게 12년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 그런 경지에 올랐습니까.

"나란히 12점을 걸고 다른 곳의 24개를 포함하는 것인데 크기가 높이 2m50에 너비가 40~50㎝짜리입니다. 이곳은 원통형을 경사지게 깎은 듯한 외관과 극장 같은 인상 외에도 빛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게 특징인 곳입니다. 이곳 역시 주교께서 저를 주목했었다고 합니다."

―21세기에 가장 큰 공사로 알려진 브리우드 생 줄리앙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공모전에 당선됐지요.

"프랑스 중부의 오베른 지역은 파스칼과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의 고향입니다. 로마네스크 미술을 알려면 부르고뉴와 함께 꼭 들러야 하는 곳인데 그곳 브리우드에 생 줄리앙 바실리카라는 성당이 있어요. 길이만 74m인데 몇 개의 스테인드글라스는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고 37개의 창이 비어있지요. 작년에 공모가 있었는데 아틀리에에서 저를 선택해 참가했습니다. 모두 52명이 응모했는데 최종 심사후보로 세 사람이 올랐어요."

―당시 최종 심사 때 한 말이 화제였습니다.

"자기 생각과 함께 한 작품을 실제로 걸기도 했는데 저는'김인중을 내세우기보다 건축에 맞도록 하겠다' '1000년 된 돌(石)을 노래하게 하겠다'고 했어요. 제 집을 꾸미는 것 같은 새 시도가 이런 곳에서 선택됐기에 더 영광스럽고 송구스럽지요."

―동양인에게 이런 기회를 주는 걸 보면 프랑스는 차별이 없는 나라인가요.

"프랑스는 작품 앞에서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프랑스 혁명 기념일에 독일인이라고 베토벤의 환희 교향곡을 연주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이런 이유 때문에 제가 프랑스를 사랑합니다."

―68세면 고령인데 김 신부의 작품활동은 갈수록 더 치열해지는 것 같습니다.

"내년 1월에 이탈리아 볼로냐 아트페어에 출품이 예정돼 있고 10월부터는 프랑스 국립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엽니다. 프랑수아 쳉이라는 중국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과 시화집을 냅니다. 이라크 바그다드 대학 중심부에 지금 6m짜리 원형 스테인드글라스 제작도 의뢰받았지요. 피카소의 유작품과 제 도자기 작품을 동시에 전람하는 행사도 예정돼 있습니다. 나이는 들었지만 예술은 영원하고 다행히 제가 건강한 편입니다."

―그림부터 스테인드글라스,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제대로 관리는 됩니까.

"최근 제 인스티튜트가 만들어졌습니다. 제 창작에 대한 매매와 관리를 전담하는 조직으로 저에게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문이 한번 더 열린 셈입니다. 83세 된 자원봉사자가 제 인스티튜트 비서 역할을 맡으며 자기 일생에 두 번 반한 일이 있다고 해요. 자기 부인과 제 그림이랍니다. 마피아가 많지만 이런 수많은 자원봉사자가 있는 덕에 프랑스가 유지되는 겁니다."

3시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촬영을 할 때였다. "제가 앞으로 할 일은 마티스나 샤갈이 하지 않은 것을 계속 하는 것"이라고 신부가 말했을 때 수녀원 한가운데 좁은 정원에 핀 들국화 사이로 어디선가 나비가 날아왔다. 신부는 기자에게 "거 보세요, 어머니가 또 오셨어요"라고 했다.

입력 : 2008.09.13 03:17 / 수정 : 2008.09.13 19:05

 

Charles Gounod (1818 - 1893)
Messe solennelle de Sainte Cécile
성 세실리아를 위한 장엄미사 
Sanctus  "거룩하시도다


  

성 세실리아를 위한 장엄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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