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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중 박근혜 대통령 숙소 조어대 18호루?

향기男 피스톨金 2013. 6. 19. 17:10

방중 박근혜 대통령 숙소 조어대 18호루?

  • 이동훈 기자
  • 입력 : 2013.06.15 11:35

    닉슨, 엘리자베스 2세, 아키히토, 김일성, 김정일… 최정상급만 묵는 총통루 해부

     6월 27일 중국을 방문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숙소는 어디일까? 대통령의 해외 방문 때 숙소는 대개 비밀이다. 경호와 안전상의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이라면 조금 얘기가 달라진다. 박 대통령은 베이징 조어대(釣魚臺) 국빈관 18호루 총통루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조어대 18호루 총통루는 최정상급 국가정상에게 제공하는 단독 별채다. 박 대통령은 당선 전인 2008년 1월 이명박 당선인 특사자격으로 방중했을 때 18호루를 숙소로 사용한 바 있다. 기자가 구상찬 주상하이 총영사에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중국 측은 박근혜 대통령의 2005년, 2006년, 2008년 세 차례 방중 때 각각 5호루, 11호루, 18호루를 제공했다. 5→11→18호로 달라진 건 박 대통령에 대한 대우가 조금씩 격상되어온 것이라고 당시 박 대통령을 수행한 구 총영사는 말한다. 과거 박 대통령에 대한 중국 당국의 예우로 미뤄 보면, 이번 국빈방문 때는 별 무리가 없다면 조어대 18호루를 제공받을 것으로 보인다.

     

     조어대는 중국 외교의 상징이다. 당과 정부 기구가 몰려 있는 중남해에서 내치(內治)가 이뤄진다면, 조어대에서는 외치(外治)가 이뤄진다. 1972년 방중한 리처드 닉슨을 필두로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부시(아버지 부시), 빌 클린턴 등 역대 미국 대통령은 조어대에서 머물렀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마거릿 대처 총리도 조어대에 묵었고 아키히토 일본 천황도 1992년 방중 때 조어대 18호루에 들어갔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한·중 수교 현장을 찾는다는 의미도 있다. 권병현 전 주중대사(1998~2000년 재임)에 따르면 1992년 4월 한국의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지첸(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수교 4개월 전 처음 마주 앉은 곳은 조어대 18호루다. 양국 실무진은 이에 앞서 가장 외진 데 있는 14호루에서 북한과 대만 몰래 ‘동해사업’이란 암호명의 수교 실무협상을 벌였다. 양국은 18호루와 마주한 17호루 방비원(芳菲苑)에서 1992년 8월 24일 수교했다.

     

     조어대의 전체 면적은 모두 43만㎡로, 중남해(中南海·100만㎡)의 절반 정도 규모다. 이 중 호수 면적은 약 5만1000㎡로 전체의 8분의 1 정도를 차지한다. 나머지는 녹지로 덮여 있는데 15만㎡에 달한다.

     조어대의 정문인 동문으로 들어가면 호수와 녹지 사이로 조성된 길을 따라 16동의 단독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정문인 동문에서 시작해 시계 반대방향으로 2호루부터 18호루까지 배치돼 있다. 1호루와 13호루는 없다. 1층과 13층이란 층수 이름을 쓰지 않는 서양식 관행을 고려한 번호 배치라고 알려져 있다. 또 4자를 꺼리는 중국의 관습을 고려해서 조어대 4호루는 ‘팔방원(八方苑)’이란 이름으로 대신 부른다. 호수를 끼고 있는 각 별채는 20개 내외의 객실을 갖추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묵을 것으로 보이는 중국 베이징 조어대 국빈관 18호루 총통루. 정문 앞에 영국 엘리자베스 2세가 반환한 황금사자상 두 마리가 세워져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묵을 것으로 보이는 중국 베이징 조어대 국빈관 18호루 총통루. 정문 앞에 영국 엘리자베스 2세가 반환한 황금사자상 두 마리가 세워져 있다.

     ‘총통루’란 별칭이 붙은 18호루는 조어대에서 가장 경치가 탁월한 곳에 있는 명(明)나라식 전통 건물이다. 조어대 18호루는 미국 대통령, 영국 여왕, 일본 천황 등 특별한 국빈들에게만 숙소로 제공되어 왔다. 1972년 방중해 마오쩌둥과 사상 첫 미·중 정상회담을 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1972년 중국을 방문해 일·중 수교를 한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가 조어대 18호루에 배정받았다.

     조어대 18호루 정문 앞에는 황금으로 도금된 두 마리 사자가 지키고 있다. 이 황금사자는 원래 건륭제의 서양식 별궁인 원명원(圓明園)에 있었는데, 청말인 1900년 영국 등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공해 약탈해 간 것들이다. 1986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첫 방중했을 때 황금사자 두 마리를 중국에 반환했다. 중국 측은 황금사자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머물고 간 18호루 앞에 세워뒀다.

     붉은 기둥에 황색 유리기와가 덮인 18호루에는 두 개의 총통실(프레지덴셜 스위트)이 있는데 각각 중국식과 서양식으로 꾸며졌다고 한다.

     

    조어대에서 20여년간 근무한 쑨단상(孫丹祥) 18호루 총경리조리(助理)는 “80%는 중국풍 객실을 선택하는데, 1998년 방중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딸(첼시 클린턴)에게 중국풍 객실을 내주고, 아내(힐러리 클린턴)와 함께 서양식 객실에 묵었다”고 중국 외교부 웹 사이트 ‘외교논단’에 밝힌 바 있다. 쑨씨에 따르면, 조어대는 중국 외교부 산하 사업단이 운영과 관리를 전담한다. 기본적으로 외부에도 대여를 하는데 18호루와 12호루는 예외다. 과거 하루 5만달러(약 5600만원)에 18호루를 대여한 적이 있는데, 역시 엄격한 자격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조어대 공관부 좡즈저(庄志哲) 총경리는 “들어가는 사람은 우리가 결정한다. 돈이 있다고 아무나 들어가는 데가 아니다”고 외교논단에 밝혔다.

     좡씨에 따르면, 조어대 18호루에 투입되는 직원들은 엄선한 우수 인력들이다. 신장이 여성은 168㎝, 남성은 178㎝ 이상이어야 하고 체형도 비율을 따진다. 특히 여직원의 경우 치파오(旗袍)를 착용해야 해 몸매를 본다고 한다. 전문대나 고졸 이상 학력에, 외국어 능력을 갖추고, 정치사상적 각오가 투철하고, 도덕윤리 교육이 잘된 인재를 선발한다고 한다.

     

     조어대를 제일 처음 찾은 한국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다. 1992년 한·중 수교를 결정한 노 전 대통령을 위해 중국 측은 첫 방중 때 조어대 18호루를 내줬다. 이후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등 후임 대통령도 모두 조어대 18호루에 숙소를 잡았다. 1994년 조어대에 머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참모들과 조어대에서 새벽조깅을 해 중국 측을 놀라게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선 전인 1995년 조어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의 정치자금을 건네받았다”고 폭탄 고백을 했다. 2008년 이명박 당선인 특사로 조어대를 찾은 박근혜 대통령은 힐러리 미 국무장관급에 준해 18호루를 배정받았다.

     

     조어대 12호루 역시 18호루와 함께 ‘총통루’란 별칭을 갖고 있다. 18호루와 같은 남향으로 호수를 바라보는데, 청기와가 올려진 12호루는 마오쩌둥(毛澤東)이 머물러서 유명해졌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대처 총리는 18호루가 아닌 12호루를 배정받았다. 특히 대처 총리는 퇴임 후에도 중국을 방문할 때면 “18호루를 제공하겠다”는 중국 측 제안을 물리치고 12호루에 머물기를 고집했다고 전한다.

     

    국왕이나 대통령, 총리가 대개 18호루와 12호루를 배정받는다면 그 이하급은 5호루, 6호루, 7호루가 주어진다. 단 1970년 우익 쿠데타로 쫓겨난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국왕은 중국으로 망명해 한동안 조어대 5호루에 머물렀다. 1971년 7월 중국을 극비 방문한 헨리 키신저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저우언라이 총리와 마주 앉은 곳은 조어대 6호루다. 석 달 뒤인 1971년 10월 재방중한 키신저가 머문 조어대 5호루에서 대자보가 발견돼 회담이 무산될 뻔도 했다. 대자보에는 ‘전 세계 인민이 단결하여 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가 영문으로 적혀있었는데, 키신저는 대자보를 뜯어내 저우언라이에게 건넸다고 한다.

     

     대개 주요 수행원들은 같은 동에 머물 수 있는데 나머지 수행원들은 별장동과 멀지 않은 위에탄남가(月壇南街)의 조어대 대주점이란 4성급 호텔을 배정받는다. 일반인도 투숙 가능한 곳이다.

     조어대가 조성된 것은 여진족의 금(金)나라 때다. 금나라 장종(章宗) 황제 완안경(完顔璟)이 처음 황실 낚시터로 조성했고 이후 황제들은 조어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았다고 한다. 1774년 청(淸)나라 건륭제는 조어대에 행궁을 지을 것을 명하고 황가의 원림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만주족의 선조인 금 장종의 낚시터를 기린다는 뜻에서 ‘조어대’란 이름을 직접 지어 붙였다.

     

     조어대 서남쪽에 있는 양원재(養源齋)는 건륭제가 세운 행궁의 정전으로, 건륭제의 글씨가 남아있다. 어원(御苑)에 둘러싸인 양원재에서는 오·만찬을 한다. 2008년 당시 당선인 특사로 방중한 박근혜 대통령은 양원재에서 탕자쉬안(唐家璇) 외교담당 국무위원과 만찬을 했다. 당시 수행기자에 따르면 만찬장에는 청나라 황실에서 사용한 묵직한 순금 식기에 자라·오리·비둘기 요리가 담겨 나왔다고 한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溥儀)는 스승인 진보침(陳寶琛)에게 조어대를 하사했고, 장제스의 국민당이 베이징을 차지했을 때는 화북사령관 부작의(傅作義)가 조어대를 접수했다.

     

    중국 정부가 조어대를 국빈관으로 조성한 것은 마오쩌둥 집권 때인 1958년이다. 당시 외교를 총괄하던 저우언라이 총리는 “외국 국빈들을 맞을 중국 특색의 고급 국빈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저우언라이의 건의에 따라 여러 곳을 물색하다 낙점한 곳이 조어대다. 1958년 착공해 1년 만인 1959년 중국 건국 10주년 국경절에 맞춰 완공했는데, 당시만 해도 조어대는 중국의 ‘10대 건축’으로 꼽혔다. 중국을 대표하는 현대건축물인 인민대회당, 중국국가박물관, 베이징역 등이 조어대와 함께 지어진 건물들이다.

     

     중국 건국 10주년 축하차 방중한 소련·북한·베트남 등 12개국 사절단은 조어대 한 동씩을 배정받았다. 당시 흐루시초프가 이끌고 온 소련 대표단은 18호루, 김일성이 이끌고 온 북한 대표단은 12호루를 배정받았다. 호찌민이 이끌고 온 북베트남 대표단은 11호루,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이끄는 루마니아 대표단은 8호루를 배정받았다. 국제 공산권 내 의전 서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어대 항공사진. 18호루 총통루(사진 우측 가운데)와 17호루 방비원(사진 좌측)이 호수를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조어대 항공사진. 18호루 총통루(사진 우측 가운데)와 17호루 방비원(사진 좌측)이 호수를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재임 중 37차례 방중한 김일성은 조어대의 가장 단골 외빈으로 꼽힌다. 지금도 조어대 12호루 앞에는 북·중 간의 영원한 우호를 상징하는, 김일성이 심은 푸른 소나무가 있다. 2011년 전용열차로 베이징을 마지막 방문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은 조어대 18호루에 묵었다. 김정일에게 18호루가 제공된 까닭은 1970년 김일성과 마오쩌둥, 1991년 김일성과 덩샤오핑 간 회동이 이뤄졌던 장소라서다. 지난해와 올해 김정은의 특사로 중국을 방문한 장성택과 최룡해 등 북측 인사도 조어대에 묵었다.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의 최고지도자들도 조어대에서 자주 쉬어갔다. 마오쩌둥은 조어대 12호루에 잠깐씩 쉬어갔다는데, 2층 특실이 아닌 1층 수행원 객실을 애용했다고 전한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주로 5호루에 머물면서 외교 사절들을 접견했다. 키신저도 1971년 10월 2차 방중 때 5호루에 머물렀다. 홍위병의 고문과 구타로 죽은 류사오치(劉少奇) 전 국가주석은 11호루를 애용했다.

     

     조어대가 정치적으로 급부상한 것도 문화대혁명 때다.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은 저우언라이를 내쫓고 5호루에 입주했다. 장칭과 저우언라이는 정치적 라이벌 관계였다. 동쪽 중남해에 마오쩌둥이, 서쪽 조어대에 장칭이 머무르며 사실상 별거하는 모양이 만들어졌다. 장칭은 5호루, 11호루, 10호루 등으로 옮겨가며 머물렀다. 문혁파가 조어대를 근거로 한 것은 옛 중국중앙방송(CCTV)과 가까워 선전 매체를 장악하기 좋아서다.

     

     이에 따라 중앙문혁소조의 일원이던 캉성(康生) 전 부주석은 8호루, 문혁 이론가인 천보다(陳伯達)는 15호루, 장춘차오(張春橋)와 야오원위안(姚文元)은 9호루, 왕훙원(王洪文)은 16호루에 머물렀다. 당시 장칭,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왕훙원 ‘4인방’은 조어대 17호루에서 덩샤오핑 축출 모의를 꾸몄다. 문화대혁명 때만 해도 조어대의 정치적 위상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자리한 중남해를 훨씬 능가할 정도로 막강했다.

     

     중앙문혁소조원들이 조어대를 비우고 떠난 것은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다. 덩샤오핑이 4인방을 축출하고 집권한 1980년대부터 조어대는 국빈관 기능을 회복했다. 조어대 경내 정원에 내걸린 ‘釣魚臺(조어대)’ 석 자는 1986년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덩샤오핑이 직접 쓴 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