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들/세 상 사람들

스님, "메리 크리스마스~"

향기男 피스톨金 2005. 12. 24. 11:20

 

 

              

             스님, "메리 크리스마스~"

 


‘뽀드득뽀드득.’ 상큼한 겨울 공기를 맡으며 눈 덮인 치악산의 아름드리 금강소나무 숲 길을 1㎞쯤 걷다 보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천년 고찰(古刹)을 만난다.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치악산의 으뜸 봉우리인 비로봉 북쪽에 자리를 잡은 구룡사(龜龍寺).

 

 668년 의상 대사가 세웠다는 산사(山寺)의 사천왕문 옆에선 크리스마스 트리가 어두운 세상을 밝힌다.

 

“어머! 절 앞에 웬 크리스마스 트리야.” “신기하네.” 절의 원통문(圓通門)을 지나 사천왕문 앞에 선 등산객 입에선 작은 탄성이 나온다. 등산객 이동훈(45·서울 강남구 삼성동)씨는 마음이 넉넉해진 표정이다. 그는 “절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그 속뜻을 음미해 보니 가슴이 훈훈해진다”고 말했다.

 

높이 3m의 전나무엔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쓰인 은빛 장식과 함께 흰색 솜 눈, 빨간색 별, 녹색 구슬, 황금빛 종 같은 형형색색의 장식이 제법 그럴 듯하게 꾸며져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 옆엔 현수막도 내걸렸다. ‘주 예수님 오심을 축하드립니다.

 

’ 산사의 크리스마스 트리…. 낯설지만 보기에 따라선 익숙하기만 한 따뜻한 풍경이다. 심산유곡 구룡사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등장한 것은 2000년 겨울이니 5년이 됐다.

 

원행(遠行)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원행 스님은 성탄절을 축하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도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 태어난 성인이잖아요. 그러니 기쁘고 훌륭한 날일 수밖에요. 허허.”

스님의 웃음 뒤에 감춰진 우여곡절도 있다.

 

2000년 트리를 세웠을 때 원주 시내 곳곳에 축하 현수막도 함께 내걸었다. 그게 동티가 될 줄은 몰랐다.

 

 “불교나 잘 챙길 것이지 왜 남의 종교 축일에 상관하느냐”는 다른 종교 성직자들의 반발이 있었다. 불교 신도도 오해를 했다. “대웅전 앞에까지 성탄절 축하 현수막을 거는 것은 너무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화합과 조화보다는 갈등과 대립을 지향하는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그때 스님은 스승인 탄허 스님의 예를 들어 타일렀다고 한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중생 제도(濟度) 아닌가요? 탄허 스님도 다른 종교를 이해하면서 배웠습니다.

 

참된 종교인이라면 극한적 대립은 피하고 중용적이고 중도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이끌어야지요.

 

” 탄허 스님은 조계종 중앙역경원 초대 원장으로 화엄경 등 많은 불경을 번역한 학승이다.

 

풍경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영롱한 산사의 겨울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등장한 뒤 작지만 소중한 변화가 있었다.

 

이듬해 석가탄신일엔 인근 소초성당이나 원동성당, 영강교회에서 난 같은 축하선물을 보내왔다.

 

해마다 부활절 달걀도 빠지지 않는다. 2003년 대웅전에 화재가 나는 아픔을 겪었을 땐 정성껏 성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지난 10월엔 구룡사에서 원주지역 불교 개신교 천주교가 함께 모여 산사 음악회를 열었다. 산사의 크리스마스 트리가 우리 마음의 벽을 조금씩 허문다.

 

“저도 감회가 새롭습니다. 극한 대립으로는 우리 모두 살아남을 수 없어요. 모자란 것은 채워주고 남는 부분은 나눠 주고 대화와 중용으로 서로 격려하며 끌어안아야죠.”

 

해가 뉘엿뉘엿 서편으로 모습을 감추고 외로운 산사에 밤이 찾아오면 크리스마스 트리는 더욱 빛난다. 요란한 캐럴이 귓전을 울리고 친구, 연인 끼리끼리 모여 하룻밤 질펀하게 즐기는 날로 전락한 크리스마스.

 

올해부턴 차분히 사랑과 나눔, 평화의 참뜻을 되새기는 날이 되기를….

 

치악산 구룡사=글 김청중·박진우, 사진 이제원, 그래픽 김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