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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과 신부님의 기분좋은 스캔들

향기男 피스톨金 2005. 12. 24. 11:30

 

 

 

       스님과 신부님의 기분좋은 스캔들

 


각종 상술이 넘쳐나는 가운데 흥청망청 보내는 날로 퇴색한 크리스마스. 사랑과 나눔, 평화의 참뜻은 온데간데없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조금 눈을 돌려보면 요란한 캐럴과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조용히 사랑과 화합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 스님, 성탄절에 어떤 선물 받고 싶으세요?

 

“와, 참 예쁘게도 꾸몄네요. 스님, 이번 성탄절에는 어떤 선물을 받고 싶습니까.”(정홍규 신부)

 

“선물요? 허허. 나한테도 산타클로스가 오려나.”(허운 스님)

크리스마스를 열흘 정도 앞둔 지난 14일 대구시 남구 대명동 은적사 부설 룸비니 유치원 현관. 아기자기한 장식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며 정홍규 신부(수성구 시지동 고산성당·사진 왼쪽)가 허운 스님(남구 봉덕동 은적사·오른쪽)에게 농을 던진다.

 

사찰의 트리를 앞에 두고 신부와 스님이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짓는 모습은 그들이 입고 있는 사제복과 승복의 차이만큼이나 꽤 낯설다.

 

공교롭게도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인 룸비니유치원의 ‘룸비니’는 부처가 탄생한 곳의 이름이다.

 

두 성직자가 교감을 나눈 지 올해로 벌써 3년이 됐다. 지금도 매주 한 번씩은 꼭 전화 통화를 나눌 만큼 각별한 사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2003년에 맺어졌다. 대구지하철 참사 희생자를 위로하는 위령제를 계기로 시작된 인연은 해마다 더욱 탄탄하게 다져지고 있다. 정 신부와 허운 스님은 상대방의 종교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석가탄신일에는 정 신부가 성당 신도들과 함께 은적사에 방문, 절을 찾은 불교 신도들에게 직접 비빔밥을 배식하고 축사를 해왔다. 지난 5월 15일 석가탄신일엔 108배를 하기도 했다. 허운 스님도 부활절 기간에 성당을 방문해 축하의 법문을 읽는다.

 

이런 교분을 바탕으로 지난 10월 1일에는 은적사 앞에서 미혼모 시설인 혜림원을 후원하는 산사음악회를 함께 주최했다. 이번 산사음악회에서는 성당과 절의 두 합창단도 화음을 맞췄다.

 

절의 합창단이 성가를, 성당의 합창단이 찬불가를 부른 것이다. 정 신부는 “함께 노래하기 위해 3개월 동안 매주 성당과 절의 합창단이 합동연습을 하면서 스님과 저만의 교분을 넘어서 신도 간의 정도 돈독해졌다”고 말했다.

 

이날 정 신부와 허운 스님이 룸비니유치원을 찾은 이유도 16일 은적사에서 열린 송년법회 때 함께 부를 노래를 연습하고 있는 성당 합창단과 절 합창단을 격려하기 위해서다.

 

정 신부와 허운 스님이 합창 연습이 한창인 유치원 2층 대법당에 등장하자 연습하던 신도들이 환호했다. 천주교 합창단의 한 여신도는 “허운 스님은 우리 성당에서도 인기인”이라고 말했다. 정 신부는 “자주 만나다 보니 이제는 신도들이 저보고는 ‘정홍규 스님’이라고 하고 스님 보고는 ‘허운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파격적인 교류에 곱지 않은 시선도 없지 않았다. 정 신부는 “일부에서는 ‘왜 자꾸 스님과 교류하느냐’는 불만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신부가 절에 와서 108배를 했다는 것은 충분히 스캔들이 될 만한 사안이고 스스로 불안하기도 했죠”라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이런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다른 종교가 교류함으로써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고 풍성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허운 스님은 말한다.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은 종교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란 것이 결국 같은 게 아닐까요?”

# 법당에 울려 퍼지는 캐럴소리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

 

지난 14일 오후 2시. 대구시 남구 봉덕동에 위치한 영남불교대학 관음사 3층 큰법당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황금빛 불상이 내려다보고 있고, 불교 신자의 소원이 담긴 연등이 천장을 빼곡히 장식하고 있는 법당에 웬 캐럴일까.

 

이런 궁금증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사찰의 여성 불자로 이뤄진 가릉빈가 합창단은 연습에만 열중이다. 가릉빈가는 극락에 사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새.

 

가릉빈가 합창단이 속해 있는 영남불교대학 관음사는 벌써 7년째 크리스마스 트리를 절 앞마당에 꾸미고 있다. 이날 합창 연습도 21일 오후 7시에 절 앞마당에서 열린 점등식 행사를 위해서다.

 

30대∼50대 주부 80여명으로 이뤄진 가릉빈가 합창단. 찬불가로 불교의 교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이들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며 캐럴을 부르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부단장 노영희(49·여)씨는 “예수님도 성인이잖아요. 이분이 태어나신 날 축하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라고 외려 되묻는다.

 

그는 “석가탄신일도 세계적인 잔치이듯 크리스마스도 많은 사람이 즐거워하는 날이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화이트 크리스마스’ ‘창밖을 보라’ ‘루돌프 사슴코’ 같은 흥겨운 캐럴을 연습하는 단원들의 얼굴에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표정이 비친다.

 

합창단의 연습을 바라보며 박판임(54·여) 단장이 말했다. “동반상생(서로 돕고 화합함으로써 발전하고 번영함)이라고 하잖아요. 자신의 종교만을 고집하는 것보다 서로 다른 종교끼리 화합하는 모습, 보기 좋지 않나요?”

 

대구시 동구 도학동 팔공산 자락에 자리를 잡은 동화사 주지 지성 스님과 천주교 대구대교구 이문희 대주교 간의 종교를 뛰어넘은 교분도 크리스마스의 참뜻을 더욱 아름답게 색칠하고 있다.

 

동화사는 은석사와 영남불교대학 관음사를 포함한 대구 경북지역 100여곳의 절을 관리하는 조계종 제9교구 본사. 2003년 지성 스님과 동화사 신도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대구지역 천주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계산성당을 신도들과 방문해 미사에 참석하면서 교류가 시작됐다.

 

지성 스님은 “내가 처음 성당을 방문한다고 할 때 일부 스님들이 ‘굳이 주지 스님이 먼저 갈 필요 있느냐’며 반발한 것도 사실”이라며 “그러나 종교인들끼리 서로 백안시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종교 간의 벽을 허물고자 시도한 일”이라고 말했다.

 

지성 스님의 방문을 받은 대구대교구 이문희 대주교는 화답하는 의미로 지난해 석가탄신일에 동화사를 방문해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

 

지성 스님은 요즘의 크리스마스 모습에 대해 “감각적인 향락 위주로 치우치고 있는 크리스마스 풍경은 예수 탄생의 본뜻을 제대로 새기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작은 바람을 말했다.

 

“불교와 개신교·천주교 등을 포함하는 기독교 모두 이웃의 소외받고 그늘진 곳까지 자비와 사랑이 스며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게 본 사명 아닙니까. 이번 크리스마스는 우리 모두 어려운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날이었으면 합니다.”

 

대구=글 박진우 dawnstar@,

사진 이제원 기자 jwlee@segye.com

◇대구 관음사 ‘가릉빈가’ 합창단이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