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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문명충돌이 낳은 미운 오리새끼?

향기男 피스톨金 2006. 1. 31. 14:27

 

     터키는 문명충돌이 낳은 미운 오리새끼?

 

 
▲ 보스포러스해협에서 본 돌마바흐체 궁전 전경
ⓒ2005 김정은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디어지는 것

에페소의 로마유적에 흠뻑 빠져있다 이즈미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터키 여행의 시발점이었던 이스탄불로 다시 되돌아 온 순간, 이스탄불 길가에 포장된 고풍스런 돌멩이 하나하나의 느낌이 남다르다. 맨 처음 이 돌들을 보고 느꼈던 부푼 설렘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이런 느낌의 정체를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예전보다 더욱 차분해진 익숙함, 친근감?

익숙해진다는 건 나와는 다른 상대방에게로 서있는 뾰족한 날이 점점 무디어진다는 것일 것이다. 날이 무디어지는 것만큼 이해할 수 없는 일보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

이 순간 문득 이즈미르 공항에서 만났던 북한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돌이켜 봤을 때 맨 처음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던 그들과의 첫 만남은 설렘과 약간의 긴장감을 동반한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을 다시 만난다면 지금 다시 밟고 있는 터키 이스탄불의 돌길처럼 더욱 더 익숙해지고 친근한 느낌일지 확신할 수 없다.

역시 시간적, 환경적인 요건을 모두 무시하고 같은 피를 가진 한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심장의 뜨거운 박동소리가 서로에게 전해지길 기대하는 것이 너무나 순진했던 생각일까? 현실은 아직도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세운 칼날이 무디어지지 않고 있는데 만약 그 칼날이 점점 무디어지면서 익숙해지려면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을 겪어야 할까?

▲ 보스포러스해협
ⓒ2005 김정은
밤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불 밝히지 않아도
새벽으로 가는 길을 찾아 갑니다

바다는
파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고요가 찾아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중략)

누군가에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두 개의 심장을 가졌지만
하나의 박동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들고 나는
그대 숨소리에 잠이 듭니다

-김경훈 '익숙해진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네 삶에 있어서 익숙해진다는 건 부정적인 의미보다 긍정적인 의미가 많다. 하지만 살다보면 익숙해진다는 게 때때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고마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고마움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는 것일 테고 누군가에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익숙함에 따르는 편안함 대신 처음의 설렘을 잃어버리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지금 한국을 떠나 근 9일동안 나에게 다가온 터키여행 또한 그렇다. 맨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길가의 돌멩이 하나에도 설렘과 고마움을 느꼈는데 지금 여행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바라본 터키는 익숙함 대신 설렘이 사라지고 고마움 대신 피로감이 쌓여만 간다.

▲ 동서의 교두보 보스포러스 제2대교
ⓒ2005 김정은

낙천적이지만 다혈질인 터키인

이제 나는 두바이를 경유하여 근 9일동안 달려왔던 터키여행의 끝을 장식하는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을 위해 버스로 달려가는 중이다. 버스 차창 밖으로 9일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약간은 익숙해진 간판과 사람들의 모습이 지나간다.

무심코 거리에서 만난 터키인들은 하나같이 유난히 동그랗고 큰 눈에 낙천적이고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실크로드의 종착지로서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그랜드 바자르'에서 만난 터키 상인들의 호객행위 또한 짜증이 덜 나는 이유도 그들의 낙천적인 기질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이처럼 낙천적인 그들도 이번 스위스와의 2006년 월드컵 예선전과 같은 분위기에서는 쉽게 흥분해서 사고를 저지르는 다혈질적인 유전자 또한 가지고 있다.

왜 그럴까? 나름대로 추측해보면 아마도 유럽인 동시에 유럽이 아닌 터키에 살고 있는 터키인들의 피 속에는 지중해성 기후로 인한 낙천성과 함께 황야를 말로 달리던 돌궐족의 유전인자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 낙천적이고 열정적인 터키사람들
ⓒ2005 김정은
실제로 지난 2002 월드컵 기간 중 한국 심판의 애매한 판정으로 지게 된 터키-브라질 전이 끝나고 난 직후 터키에서 택시를 탔다는 어떤 한국인은, 자꾸만 자신을 수상한 눈초리로 흘깃거리며 "지금 한국인이 있다면 총으로 쏘아 버리고 싶다"던 택시기사와 터키인과의 대화를 듣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한국인이었음을 몰랐기에 다행이니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떠했을까? 그렇지만 다행히도 그 후 한국과 3, 4위전 승리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연히 목격한 때밀이, 효자손 등에서 느껴지는 동질감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터키인들의 성격은 단순하고 직선적인 면에서 얼핏 우리와도 비슷한 면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 또다른 동서의 교두보 그랜드바자르
ⓒ2005 김정은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 관광은 1시간여 동안 또 다른 모습의 이스탄불을 느낄 수 있는 관광 코스이다. 배 안에서 작열하는 태양광선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진한 커피나 그네들의 전통차 '차이' 한 잔을 마시며 지나치듯 무심하게 바라보는 풍경은 도보여행으로는 느끼기 힘든 여유로움이 숨어 있다.

한 발짝 멀리 떨어져 바라보니 돌마바흐체 궁전은 물론 술탄의 여름별장이었다는 베일 레르베이 궁전, 루멜리 히사르(1453년 요새) 등의 유적지를 비롯해 각종 독특한 양식의 건물들이 색다르게 보인다. 그동안 익숙해있던 도보여행과는 다른 눈높이와 시선을 통해 또 다른 모습의 이스탄불을 볼 수 있었다고나 할까?

동양과 서양을 함께 아우르는 경계선 보스포러스 해협을 잇는 2개의 다리를 가로질러 동과 서를 자연스럽게 출퇴근하는 터키인들을 보고 있자니 이미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동양과 서양이란 구분 자체가 별 의미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별생각 없는 여행객의 입장으로서가 아닌, 터키인들을 바라보는 동서 양쪽의 인식은 터키인의 생각과는 너무 차이난다. 어떤 면에서는 양쪽 모두 터키를 바라보는 시선이 냉정하기조차 하다.

동과 서의 미운 오리새끼?

서구의 입장에서 터키는 유럽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기반을 아시아에 두고 아시아의 문화와 종교(이슬람교)를 유지한 식민국가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서구에서 같다고 하는 이슬람권에서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칼리프직을 폐지하는 식의 터키의 이슬람 근본주의조차 어색하기만 할 뿐이다. 한마디로 동과 서 양쪽에 끼지 못하는 미운 오리새끼의 운명과 같아 보인다.

유럽인의 머리를 지향하되 몸만은 여전히 이슬람 문명권인 터키 스스로의 정체성 찾아가기는 현재 EU 가입을 위한 노력을 통해 진행 중이다. 과연 그들은 미운 오리새끼의 탈을 벗고 동과 서를 아우르는 화려한 백조로 거듭 날 수 있을까?

미국의 칼럼리스트 윌리엄 파프는 터키의 EU 가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쓴 소리를 거침없이 하고 있다.

"유럽의 지도자들이 터키의 EU 가입 협상을 시작하기로 한 것은 유럽 국민들이 실제로 원하는 바를 외면한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지 모를 문명 간의 충돌에서 터키가 상대편에 서게 되는 위험을 줄이려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기 때문에 외면한 것이다. 이제 유럽은 더욱 취약해지게 됐다."

동과 서를 아우르는 교두보 터키. 터키의 정치적인 선택이 어떻게 되든 터키는 세계 문명의 다양한 맛보기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여행객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매력적인 나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Torna A Sorrento(돌아오라 쏘렌토로) / Giovanni Marra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