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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안탈랴,지중해 바라보며 에페소 맥주 한 잔

향기男 피스톨金 2006. 1. 31. 16:05

 

                  터키 안탈랴,

 

     지중해 바라보며 에페소 맥주 한 잔

 
▲ 터키 안탈랴 차창으로 보이는, 중국 계림 산들을 닮은 지중해 저편의 산
ⓒ2006 이승열
멜하바! 유일하게 내가 알고 떠난 터키어이다. '안녕하세요' 근사하게 터키말로 저녁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멜하바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 내 마음이 진실로 전달되길 바라는 수밖에는…. 언어가 필요 없다. 말을 하지 못해도 원하는 것은 모두 소통이 가능한 곳이다. 이곳 안탈랴의 헤삽치 거리에서는….

검은 차도르 대신 화려한 스카프를...

1923년 공화국 설립이후 세속주의를 채택한 터키에서는 이슬람이 국가 체제를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학에서 차도르 착용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지중해의 지는 해를 바라보며 데이트를 즐기는 눈빛이 파란 터키 아가씨들은 검은 차도르 대신 색색의 스카프를 멋스럽게 쓰고 있다. 검은 차도르로 온몸을 가린 다른 이슬람 여인들과는 눈빛과 몸의 곡선,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기부터 다르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얼굴 표정이다. 계산이 들어있지 않은 손님 자체를 환영하는 그들의 진심. 왕래가 적었던 어린 시절 외지에서 누군가가 오면 괜히 주위를 맴돌았었다.
 
그가 어떤 의미를 가진 사람인가는 알 필요가 없었다. 지금 나는 그들의 진심 어린 환대를 받는 손님이다. 기꺼이 카메라를 향해 웃음을 짓고, 함께 정지된 화면을 보며 원더풀을 외치고 따뜻한 눈빛을 교환한다.

▲ 안탈랴 해변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남녀들. 청년은 수줍게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바다 속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2006 이승열
▲ 안탈랴 해안 절벽에서 지는 해를 바라 보며 에페소 맥주 한잔. 터키 사람들이 많은 독일에 수출되는 터키의 대표 맥주이다.
ⓒ2006 이승열
저녁 시간까지는 두 시간쯤 남아있다. 오랜 시간 땅 끝에 앉아 지중해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본다. 안탈랴의 지중해 너머에 있는 산들은 중국 계림의 그림 같은 산들과 닮아있다.
 
석회암 산들은, 바다 속으로 지고 있는 해의 마지막 강렬함으로 희미한 실루엣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햇살이 조금씩 잦아들면서 바다 끝 산들의 실루엣이 조금씩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지중해 너머로 지는 해를 보며 에페소 맥주를 마시는 나는 행복한가. 판단이 필요 없다. 다만 지는 해를 맨송맨송하게 보내는 것은 장렬한 해넘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시간에 맞춰 아이를 실어 나르며, 학원을 알아보고, 점수를 묻고, 차선을 급하게 바꾸며 출근길에서 조급해했던 일들이 먼 옛날의 일처럼 아득하다.

▲ 지중해 최대의 휴양지인 아름다운 항구 안탈랴의 해질 무렵
ⓒ2006 이승열
해가 점점 지중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그물을 걷고 길모퉁이에서 빵을 사고 방파제에 앉은 소년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을 뿐이다. 일부러 밀어낸 것도 아닌데 터키에 도착한 순간부터 집도 아이도 남편도 떠오르지 않는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아내 때문에 늘 걱정이 앞서는 남편이 낯선 땅, 바닷가에서 지는 해를 보며 홀로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 또 어떻게 야단을 칠까? 남편은 내게 풍경과 사람,
 
사물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머리로 받아들일 것을 주문한다. 그편이 서울 같은 정글 속에서 버티는 데는 더 바람직한지도 모르겠다.

인사동처럼 고풍스런 헤삽치 거리

이곳 지중해의 도시 안탈랴에서는 가슴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내 버릇이 상당히 유용하다. 조명을 밝힌 밤의 하드리아누스 문은 어쩐지 더 신비롭다. 바닥의 대리석에는 마차 바퀴 자국이 선명하다.
 
이곳 사람들은 가운데 마차 길로 통행하지 않고 다른 아치 아래를 걷는다. 마차 바퀴 자국을 확인하며 대리석 길로 통행하는 것은 여행객들뿐이다.

▲ 유적 발견으로 공사가 중단된 가게, 벽의 모서리를 깎아 통행을 배려한 로마시대의 벽, 그리고 오스만식 집들
ⓒ2006 이승열
▲ 헤삽치 거리의 해질녘 풍경. 차도르를 쓴 여인의 인형에서 터키 여인들의 매력이 느껴진다.
ⓒ2006 이승열
마차와 사람들의 통행을 배려해 벽의 모퉁이를 깎아 놓은 고대 사람들의 세심함이 내게도 전해진다. 이곳에서 아주 오래된 과거를 확인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다. 그냥 땅을 파면 된다.
 
지금처럼 중장비가 발전하지 않았던 시절,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때 사람들은 전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을 걷어내지 않고 흙으로 덮은 후 다시 도시를 건설하였다.

헤삽치 거리는 인사동과 매우 흡사한 곳이다.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 벽의 낙서들, 이층이 더 튀어나온 오스만 식의 집들, 손으로 정성껏 기워 만든 오스만 고유의 가죽신, 반원형의 오래된 폐허가 된 교회, 번개를 맞고 부러진 미나렛, 모든 악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파란 눈의 나자르본죽, 그 좁은 골목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는 자동차의 경적.

▲ 헤삽치 거리 입구 하드리아누스 문 앞. 개와 함께 산책중인 안탈랴 청년들
ⓒ2006 이승열
▲ 터키 청년 에민의 'SILVER 925'와 그곳에서 본 하드리아누스 문
ⓒ2006 이승열

보디빌더가 만드는 오스만 가죽신

'SILVER 925'는 히드리아누스 문 바로 앞에 있는 서른한 살 에민의 가게이다. 터키 여행이 처음인 동양여자의 나이를 궁금해 한다. 연애의 기술에 관한 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터키 남자답게 호들갑스럽게 내 나이를 절대 믿지 않는다.
 
그는 작년 미스터 터키(?) 챔피언이라고 했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그가 작은 규모의 챔피언인지, 전국 규모 대회의 챔피언인지는 도저히 판단할 능력이 내겐 없다.

그는 내게 사진을 보여주고, 벽에 걸려 있는 챔피언 메달을 만지게 해 주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오스만 고유의 가죽신을 보는 그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근육질의 남자가 만든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죽신은 섬세하게 꿰매져 있었다.

그는 빠르게 가게밖에 진열된 물건들과 테이블을 가게 안에 넣고는 문을 닫았다. 가게 한편에 마련된 관광객을 위한 물, 음료수, 의자 같은 것들을 들어서 나도 에민과 함께 열심히 밖의 물건들을 가게 안으로 이동시킨다.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로 채운 후 열쇠를 앞 건물의 갈라진 계단 틈에 감춘다. 자취를 했던 시절 연탄광이나 수도 계량기 함에 열쇠를 감춰뒀던 오래 전 기억이 잠시 스친다.

▲ 130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방문 기념으로 세운 안탈랴의 하드리아누스 문
ⓒ2006 이승열
▲ 'SILVER 925'의 주인 에민과 그가 만든 오스만식 가죽신. 그가 하드리아누스 문 안내를 위해 가게문 닫고 있는 모습
ⓒ2006 이승열

유적은 살아있는 유기체다

에민은 나를 하드리아누스 문 위로 안내했다. 앙코르와트에서든 이곳 안탈랴에서든 트로이에서든 유적은 우리네 문화재처럼 박제되어 있는 전시품이 아니다. 오감으로 느끼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하드리아누스 문 위에 오르니 아타튀르크 거리 너머의 모스크에서 꾸란(코란)을 읽는 소리가 들린다. 이슬람이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나 실제로 터키의 이슬람 인구는 60%, 기도시간을 지키는 신실한 이슬람은 30%쯤 된다고 한다.

아무도 가던 길을 멈추거나 하던 일을 중단하고 기도하지 않는다. 저쪽 10분쯤 걷는 곳에 에민의 집, 반대편 20분 거리에 내가 묵고 있는 호텔. 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 도시를 방문한 것을 기념해 세워진 문 위에 2005년 내가 서 있다. 이천년 전 시간과 지금이 공존한다. 하드리아누스 문 위에서 내게는….

멀리 지중해로 지는 해를 배웅했던 안탈랴 항구의 모습이 보인다. 저녁을 함께 먹고 싶어 하는 에민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내 짧은 영어 실력으로 더 이상 대화를 이끌고 나가는 것은 무리이다. 난 아쉬워하는 에민을 뒤로하고 하드리아누스 문 앞에서 그와 악수하고 헤어진다.

이번에는 나도 가운데 마차길로 가지 않고 이곳 사람들이 다니는 문을 통해 그 거리를 나선다. 카페 안에서 나르길레(물담배)를 피던 사람들이 유리창 밖을 향해 기꺼이 포즈를 취해준다. 나르길레를 태우기 위해 작은 접시에 불씨를 피우는 청년의 주위에 불꽃이 사방으로 피어난다.

(계속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1월 13일부터 21일까지 터키를 여행했습니다.

 
[오마이뉴스 2006-01-26 09:21]    
[오마이뉴스 이승열 기자]

Torna A Sorrento(돌아오라 쏘렌토로) / Giovanni Marra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