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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향기男 피스톨金 2006. 2. 22. 15:08

 

        쿠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쿠바 3일 머문 동안 ‘찬 찬’ 30번도 더 들어

‘칸델라’를 위시한 다른 수록곡도 어디서나 울려퍼졌다.
 

[조선일보 이동진 기자]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하 ‘부에나’)의 고향 쿠바로 가는 길은 멀었다.

 

미국에서 쿠바로 들어가는 항로가 금지되어 있어서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기내에서만 20시간을 소비한 끝에 수도 아바나에 닿았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향하는 길은 쿠바가 공산주의 국가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쿠바 혁명 47년 자축 포스터가 나붙은 가운데 건물 벽마다 ‘사회주의 수호’나 ‘피델(카스트로) 만세’ 같은 구호가 쓰여 있다.

 

쿠바에서 ‘혁명’은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사랑’만큼이나 자주 쓰이는 마케팅 용어다. 핵심엔 체 게바라가 있다.

체 게바라는 쿠바에서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다. 내무부 건물 외벽엔 그의 거대한 철골부조상이 붙어 있고, 혁명 기념관엔 그의 전시실이 따로 차려져 있다.

 

체 게바라는 ‘메이드 인 쿠바’의 동의어다. 손수건과 그림엽서에서 티셔츠와 조각상까지, 베레모를 눌러 쓴 그의 얼굴은 ‘체 게바라 주식회사’의 모든 장소에 편재(遍在)했다. 카리브해의 눈부신 햇살 속에서 혁명가는 과소비되고 있었다.

딱딱한 첫 인상은 여장을 풀고 구시가지 거리로 나서자마자 사라졌다. 아르마스 광장을 지날 때 레스토랑 밴드가 신나는 춤곡 ‘찬 찬’을 연주했다. 쿠바에서 처음 들은 노래가 ‘부에나’ 수록곡이라니! 그러나 행운이 아니었다.

 

 ‘찬 찬’은 현재 쿠바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었다. 단 3일 머무는 동안 서른번도 더 들었으니까. ‘칸델라’를 위시한 다른 수록곡도 어디서나 울려퍼졌다.

이어폰을 꽂은 채 해변 도로 말레콘을 천천히 걸었다. 영화 속 라이 쿠더가 아들과 함께 지날 때 방파제를 넘어 도로로 쏟아지던 파도를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말레콘 파도는 쿠바 음악의 넘실대는 리듬을 빼닮았다. 쿠바에서 바다는 품고 있던 수많은 가락을 바람의 힘을 빌어 하나씩 풀어내는 음악의 자궁이었다.

그러나 말레콘의 풍경과 음악에만 몰두하기란 쉽지 않았다. 살사 리듬처럼 적극적인 쿠바인들이 끊임없이 말을 붙여왔기 때문이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쿠바인들은 누가 혼자 상념에 빠지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 뜨겁고 밝은 나라에서 외로움에 젖는 것은 불가능했다.

쿠바에서 음악은 윤활유가 아니라 휘발유였다. 그 자체로 쿠바인 삶의 핵심을 이루는 음악은 살아 숨쉬며 생활 곳곳에 배어 있었다. 식사가 훌륭하고 음악도 좋다는 레스토랑 ‘푸에르토 데 세구아’에 들렀다.

 

트리오 마드리갈이란 3인조 밴드는 팁을 쥐어준 나의 청에 따라 낭만적 ‘볼레로’부터 복잡한 리듬에 경쾌한 선율을 얹은 ‘손’(Son)과 ‘살사’까지를, 기타 두 대와 타악기 마라카스만으로 멋지게 살려냈다.

국민 가수 베니 모레가 노래했다고 해서 ‘베니 모레 바’로 불리는 술집을 찾았다. 60대 이상 멤버로만 구성된 9인조 밴드가 신나는 ‘손’ 음악을 연주했다.

 

활력 넘치는 추임새와 화려한 애드립까지 섞어 신나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자니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노인네들이 근력도 좋지. 럼주에 콜라를 섞다가 내려다봤다. 쿠바에도 코카콜라는 있었다.

쿠바에도 그늘은 있었다.


관광객에게 달러를 벌어들이는 ‘달러 아바나’와 그렇지 못한 ‘페소 아바나’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경제가 양분된다.

 

달러를 벌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새로운 빈부격차로 ‘관광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란 말이 생길 정도였다.

카테드랄 광장 옆 골목에서 예쁘게 차려 입고 꽃을 꽂은 채 시거까지 물고 있는 할머니들을 보고 카메라를 들이대자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손을 동그랗게 말아 돈을 요구한다.

 

1달러를 건네자 환하게 웃는 할머니들은 나를 앉힌 뒤 팔짱까지 끼며 사진 포즈를 취한다.

 

입에 문 시거엔 불이 붙여져 있지 않았다. 특정 이미지에 가둔 채 쿠바를 바라보고 싶어하는 관광객들 앞에서 어떤 쿠바인들은 그 이미지 그대로 스스로를 ‘타자’(他者)로 현시함으로써 달러를 벌고 있다.

 

보는 이의 눈에도 보여주는 이의 마음에도, 진짜 쿠바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음악도 비슷했다. 떠나기 전날 밤, ‘부에나’ 멤버가 출연한다는 호텔 나시오날의 콘서트에 갔다. 초반은 관광 상품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사실 모두 ‘부에나’ 음악만 찾는 상황에 대해 비판하는 쿠바 음악인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타악기 팀발레스 연주자인 80대 노인 아마디토 발데스가 나오는 순간 심드렁함은 사라졌다.

 

‘부에나’의 다른 멤버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홀로 남은 노인은 눈을 감은 채 기묘한 손놀림으로 독특한 리듬을 새로 세상에 만들어내고 있었다. 언젠가 발데스가 떠나도 그 리듬은 누군가의 귓전에 오래 남을 것이다.

할머니 가수, 테레사 가르시아 가툴라가 주도한 후반은 그야말로 흥겨웠다. 열정적으로 노래하던 그녀는 콘서트 말미에서 곳곳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다.

 

호기심 많은 쿠바인이 모두가 백인인 장내에서 유일한 동양 남자를 그냥 넘길 리 없었다. ‘코리아’라고 답했더니 몇 번이나 안 들리는 척 귀에 손을 가져다 댄 끝에 직접 마이크를 쥐어주고 말하게 했다.

 

객석을 돌며 한 명씩 일으켜 세워 자신과 춤추게 하는 순서에서도 나를 빼놓지 않았다. ‘관타나메라’를 부르는 콘서트 피날레엔 나를 비롯해 십여명의 사람들을 이어붙여 기차놀이를 시키기까지 했다.

관광객의 표피적 관심을 겨냥한 박제된 음악이었는지도 모른다. 콘서트보다는 엔터테인먼트에 가까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날 그 자리에서 민망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일어나 잠깐 춤을 추었던 나를 할머니 가수가 환한 웃음으로 껴안아주었을 때 갑자기 쿠바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졌던 이상한 경험만큼은 부정하고 싶지 않다.

콘서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산 프란시스코 광장의 어둠 속을 걸었다. 작은 불빛이 힘겹게 어둠과 싸우고 있었다.

 

아바나 베야(Habana Bella·아름다운 아바나), 아바나 미스테리오사(Habana Misteriosa·신비스런 아바나), 아바나 트리에스테(Hanaba Trieste·슬픈 아바나)…

 

숨쉬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채우던 음악도 다 사라진 텅 빈 정적 속 침묵이 이명(耳鳴)으로 마음 속 길게 꼬리를 남겼다. 잘 있거라 쿠바여. 아스타 시엠프레 아바나.

(아바나[쿠바]=이동진기자)

[조선일보 2006-02-15 11:10]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다지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