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심도 동백은 지아비 기다리는 섬 아낙을 닮았다. 행여 누가 볼세라 여인의 입술처럼 붉은 동백꽃이 초록잎에 살짝 숨어 쪽빛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하지만 스쳐가는 중저음 뱃고동과 동박새 노랫소리 뿐 무심한 봄날은 속절없이 흘러만 간다. 기다림에 서러운 동백꽃이 눈물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지심도 오솔길을 꽃길로 수놓는다.
지심도(只心島)가 꽃멀미로 아찔하다.
경남 거제도의 동쪽 바다에 위치한 지심도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섬의 형상이 ‘마음 심(心)’자를 닮은 폭 500m,길이 1.5㎞의 작은 섬. 후박나무 해송 팔손이 등 원시림의 보고인 지심도는 섬 면적의 60∼70%가 동백나무로 뒤덮여 동백섬으로도 불린다.
동백꽃은 11월부터 겨우내 피고 지고를 거듭하다 3월 초순부터 본격적인 개화를 시작해 3월 말에 절정을 이룬다.
아담한 선착장에서 섬 중턱 쉼터까지의 지그재그 오솔길은 동백나무 터널. 원시의 생명력이 오롯이 살아 숨 쉬는 오솔길은 수령 수백 년의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앞 다퉈 꽃을 피우고 서둘러 낙화하느라 숨이 막힌다. 고개를 들어도 동백꽃이요 고개를 숙여도 온통 핏빛 동백꽃이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울창한 동백터널을 벗어나면 산비탈을 따라 옹기종기 들어선 민박집 10여 채가 나그네를 반긴다. 나지막한 지붕과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그리고 돌담에 둘러싸인 손바닥만한 마당은 동백섬답게 온통 낙화한 동백꽃들로 붉게 물들었다.
민박촌에서 숲길을 잠시 오르면 섬 정상에 활주로로 이용되는 평평한 풀밭이 나타난다. TV드라마 ‘로망스’의 촬영지로 관우(김재원)와 채원(김하늘)이 잔디밭에서 자전거를 타던 곳이다.
이곳에 서면 서쪽의 지세포항과 동쪽의 망망대해는 물론 날씨 좋은 날엔 대마도도 한 눈에 들어온다.
지심도는 1930년대에 일본군 300여명이 섬 주민들을 내쫓고 주둔했던 곳이다. 섬 남단의 일본군 포진지와 탄약고,섬 북단의 서치라이트 보관소와 망루 등 당시의 생채기는 아직도 섬 곳곳에 남아 그때의 아픔을 증명하고 있다. 일본군은 태평양전쟁 말기 이곳에서 전투기로 폭격을 퍼붓는 미군과 격전을 치렀다고 한다.
해식애가 발달한 지심도는 선착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해안이 가파른 절벽이지만 섬을 일주하는 오솔길은 대체로 평탄하다. 주민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비탈진 산자락을 깎고 다듬은 덕에 1시간30분 정도면 섬의 속살을 샅샅이 엿볼 수 있다.
특히 활주로에서 섬 북단의 망루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은 동백터널과 대숲길이 이어지는 원시림이다. 새 소리와 파도가 절벽에 부딪치는 소리,그리고 해풍이 대숲을 빗질하듯 스치는 소리는 동백꽃이 수놓은 화려한 꽃길에서 원시의 화음을 연출한다.
지심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피싱하우스라는 민박집이 자리 잡은 곳. 31년 전 팔색조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지심도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신만부(56)씨가 아예 3년 전 이곳에 터를 잡았다. 동백나무에 둘러싸인 아담한 보금자리와 투박한 소품들은 모두 신씨의 작품이다.
피싱하우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대문 없는 입구에 매달아 놓은 노란색 종.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평상과 벤치엔 동백꽃이 주인처럼 자리를 차지하고,해변에서 주워온 돌에는 주인과 나그네가 쓴 낙서가 빼곡하다.
신씨가 순수 만든 의자에는 ‘사람 없어도 주전자 물 끓여 커피 한 잔 드시고 가세요’라는 글이 적혀 있다. 검게 그은 주전자와 땔감,그리고 수북이 쌓인 봉지커피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피싱하우스 아래의 자그마한 일본식 건물은 일본군 소좌가 기거하던 관사. 쪽빛 바다 건너 지세포항이 한 눈에 들어오는 이곳은 TV드라마 ‘홍콩 익스프레스’의 촬영장소로 주인공인 정연(송윤아)과 민수(조재현)의 어린 시절을 담았다.
이곳의 동백나무는 수령 800년이 넘는 지심도 최고령.
울창한 동백숲에서 동박새와 직바구리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쉼 없이 들려오는 지심도. 하지만 지심도가 국방부 소유에서 거제시로 이관되는 내년 초부터 지심도엔 해전사전시관,해양전망대,식물원,조각공원,구름다리,선착장 등 인공구조물들이 대거 들어설 예정이다.
원시의 섬 지심도가 개발이란 이름 아래 외도처럼 ‘박제의 섬’이 되지는 않을 지 염려스럽다.
거제=글·사진 박강섭 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