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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역사의 길목에 핀 화려한 사막의 꽃 둔황

향기男 피스톨金 2006. 4. 20. 11:24

 

          역사의 길목에 핀 화려한

 

            사막의 꽃…실크로드

수천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끊기지 않고 살아 있는 길 ‘실크로드’. 매일 바람에 따라 모래언덕 모양이 바뀌어 높이를 알 수 없는 밍사산, 사막의 오아시스 둔황의 흔적이 남아 있는 마가오 굴, 모래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가오창 고성과 「서유기」에서 우마왕이 삼장 법사일행을 불길로 막았던 훠옌산 등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실크로드에 들어서는 순간 당신도 역사 속 주인공이 된다.
 

변화의 기운이 움트는 땅

 

1980년 일본 NHK는 다큐멘터리 ‘실크로드’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름답고 화려한 사막과 역사의 길목에 터를 박고 사는 사람들…. 실크로드가 먼 옛날에나 존재했던 역사 속의 길이 아니라 아직도 완전히 끊기지 않고 살아 있는 길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실크로드를 꿈꿨다.

 

물론 당시에 중국은 공산국가였고, 여행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26년의 세월이 흐른 요즘은 많이 변했다. 실크로드 여행 상품까지 나온다. 4월이면 겨우내 막혀 있던 파미르 고원 길도 열린다.

 

 

실크로드의 역사는 2천1백년이나 된다. 후한(後漢)의 장건 장군이 흉노의 침공으로 골머리를 앓던 한무제의 명을 받아 정벌에 나섰다가 포로가 됐으나 탈출해서 중앙아시아 오지의 교통로를 알렸다.

 

이 지역이 시안과 로마를 잇는 실크로드가 됐다. AD 1세기에는 중국의 특산품인 비단이 로마에까지 팔려갔으며 유럽의 유리공예품은 중국으로 흘러갔다.

실크로드가 가장 번성한 시기는 당나라 때다. 실크로드는 당나라의 멸망과 함께 서서히 쇠퇴하다가 명나라 때 해상교통의 발달로 잊혀졌다. 실크로드는 크게 텐산북로와 텐산남로, 서역남로로 나뉜다.

 

텐산북로는 톈산 산맥 북쪽으로 통하는 길. 둔황 ­ 하미 ­ 투루판 ­ 우루무치 ­ 카자흐스탄을 지나 터키에서 로마로 가는 길이다. 톈산남로는 둔황 ­ 투루판 ­ 구얼러 ­ 쿠차 ­ 카스를 지나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이란에서 터키로 빠진다. 서역남로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으로 가는 길. 둔황 ­ 러우란 ­ 체모 ­ 허텐 ­ 아르칸트 ­ 카스를 지난다.

 

현재 나온 여행 상품은 국경 통과 문제 등으로 주로 중국 내 실크로드 상품이 주종을 이룬다. 둔황, 카슈가르, 우루무치, 투르판이 주요 도시.

 

이중 목초지란 뜻의 우루무치는 중국 정부의 서역 대개발과 함께 공업도시로 변해 옛 모습을 찾기 힘들다.

 

 

사막의 오아시스 ‘둔황’과 노천 박물관 ‘마가오 굴’

 

가욕관을 지나면 황량한 사막지대. 여기서부터 실크로드답다. 버스를 타고 달리다 보면 서역으로 가는 사막 한가운데서 둔황(敦煌)을 만나게 된다. 둔황은 수천 년 전처럼 지금도 오아시스다.

 

관광객들이 처음 찾는 곳은 밍사산(鳴沙山)과 마가오 굴이다. 길이 40km, 폭 20km의 밍사산은 사구다. 바람에 따라 모래언덕이 모양을 바꾸기 때문에 높이는 알 수 없다. 산 아래에서는 그저 엄청난 모래더미지만 낙타를 타고 오르면 굽이치는 모래 능선을 볼 수 있다. 탐험가 오렐 스타인의 표현대로 ‘파도 같은 사구가 넘실거리는 바다 같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사막길. 밍사산은 ‘우는 모래산’이란 뜻이다. 바람에 모래알이 쓸려갈 때 울음소리가 난다. 모래벽에도 바람자국이 또렷했다. 간밤에 불던 바람에 구겨진 모래 능선이 꼭 비단폭을 접어놓은 것 같다. 모래알도 비단만큼이나 곱다. 3천 년 동안 마르지 않았다는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은 그저 신비롭기만 하다.

 

지금은 중국의 국가 명승지가 됐지만 이 사막은 원래 실크로드 여행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5세기 초 승려 법현은 ‘사막의 수많은 귀신들과 뜨거운 돌개바람들, 마주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간다. 하늘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짐승 하나 보이지 않는다.

 

모든 길은 바라다 보일 데까지 뻗어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마른 해골 조각이 이정표일 뿐’이라고 했다. 마르코 폴로는 ‘사막에서는 악령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홀려 길을 잃고 죽어간다’고 했다.

 

 

실크로드는 목숨을 걸고 넘어야 했던 고행길이었다. 시안을 벗어나 황허의 서북쪽 하서회랑과 고비사막을 지나고 험준한 톈산 산맥 줄기를 넘어 로마까지 갔다. 시안에서 로마까지는 7,000km. 왕복 10년의 거리였다.

둔황은 서역으로 나가는 관문이었다.

 

장도를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무사 안녕을 비는 기도처였고, 서역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휴게소였다.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바로 둔황시에서 남쪽으로 25km떨어진 마가오(莫高窟) 굴이다.

 

마가오 굴은 낙준이라는 승려가 366년, 노을에 물든 바위 절벽에서 부처의 모습을 본 뒤 석굴을 파고 수행을 하면서 생겼다. 남북으로 1,618m. 이후 1천 년 동안 수도승들이 모여들어 7백35개의 굴이 생겨났는데 지금은 4백92개만 남아 있다. 굴에서 발견된 벽화를 합하면 4만5천㎡, 불상만 1천4백여 기나 된다니 세계 최대의 노천 박물관인 셈이다.

 

 

마가오의 17호 굴에서 바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됐다. 우리 민속 악기 장구의 모습이 그려진 335호 굴, 머리에 깃털이 달린 신라인 모자를 쓰고 있는 237호 굴…. 고작 10여 개의 굴을 보았는데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기하학적인 카펫의 무늬를 연상시키는 동굴 천장의 자오정화(藻井畵), 화려한 비천상, 인종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천 년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생생하고 또렷하다. 이렇게 잘 보존된 것은 연 강수량이 40mm밖에 안 되는 메마른 기후 덕택이다.

 

크고 작은 다른 동굴에서는 불교 문화재뿐 아니라 엄청나게 다양한 문서들이 나왔다. 마니교의 기도문집, 소그드나니아 상인의 편지, 중국 황제의 칙령, 티베트 처방전, 위구르어 계약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경전…. 그래서 둔황학이란 고유의 학문까지 생겨났다.

 

마가오 굴이 알려진 것은 불과 1백여 년 전이다. 고대도시의 문화재에 눈독을 들였던 헝가리 출신 스타인, 프랑스의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미국의 워너 같은 탐험가들이 마가오 굴의 고문서를 빼돌리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들은 마가오 굴의 장경동(17호굴)에서 5만 권이 넘는 고문서를 발견한 왕원록이란 도사로부터 돈을 주고 사거나 훔쳐갔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문화재가 천 년 세월 동안 잠자고 있었을까. 둔황 고문서는 11세기 종교 탄압을 피하기 위해 승려들이 몰래 숨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나라 말기엔 면세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 수십 만 명을 강제로 환속시키는 불교 탄압이 있었다. 나중에는 이슬람 등 이교도가 들어오면서 승려들은 또 박해를 받았다.

 

당나라가 망하면서 정세가 불안해지자 실크로드의 교역량이 줄고, 명나라 이후엔 해상교통로가 발달하면서 험준한 실크로드는 잊혀졌다.

 

당나라의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여러나라의 군왕과 호족들이 모래 속에 묻힌 도시의 보물을 탐했으나 맹렬한 폭풍과 구름 때문에 길을 잃는다’고 썼다.

 

‘가오창 고성’과 중국 3대 불가사의 ‘카레즈’

 

가오창 고성(高昌)은 둔황에서 가까운 사막 유적지다. 가오창 고성은 모래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토성. 1천5백년 세월에 성벽은 무너져 내리고, 앙상한 토벽만 곳곳에 남아있다.

 

성한 곳 하나 없는 성벽의 높이는 10m, 둘레는 5.4km로 면적은 30,000km2나 될 정도로 넓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왕궁터에선 예닐곱 살 정도의 어린아이들이 기념품을 들고 나와 관광객들을 졸졸 쫓아다닐 뿐이다. 대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국은 어디로 갔을까?.

 

가오창국은 5호16국 때인 5세기부터 약 7세기까지 2백 년 동안 번성했던 나라다. 당시에는 성내에 수만 명이 살았을 정도. 가오창국 왕은 「서유기」의 삼장 법사를 국사로 초빙했다.

 

5세기 이후부터 7세기까지는 불교의 고향인 천축(인도)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는 승려가 많았다. 당대에 명성을 얻고 있던 삼장도 그중 한 명. 13세에 승려가 된 삼장은 어린 나이에 중원에 이름을 떨칠 정도로 유명했다.

 

삼장이 불교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 627년 20대 후반에 인도 여행길에 올랐을 때 가오창 국왕은 간청을 해서 3개월 동안 설법을 들었다. 그러나 의형제까지 맺은 뒤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르기로 약속하고 삼장이 천축기행을 떠난 사이 가오창국은 당나라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불법에 의지해 천 년 왕국을 꿈꾸었으나 허무하게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지금도 성 한가운데 왕궁 터와 승려가 불법을 전하던 강당이 남아 있다. 특히 강당은 연설자가 말을 하면 소리가 마이크처럼 울려 퍼지도록 설계됐다니 과학기술도 상당했다.

 

삼장의 흔적은 투르판에서 하미 가는 길에 있는 훠옌산(火焰山)에서 볼 수 있다. 우마왕이 불길로 삼장 법사 일행을 막자 손오공이 우마왕으로부터 파초선을 빼앗아 불을 껐다는 곳이다. 훠옌산은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색을 띠고 있다. 한여름 지표 온도가 80℃까지 올라간다.

 

투르판(吐魯番)은 가오창 고성을 끼고 있는 고도다. 거기엔 만리장성, 대운하와 함께 중국 3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카레즈가 남아 있다. 카레즈는 지하수로를 뜻한다. 투르판은 연간 강수량이 20mm밖에 안되는 사막지대. 하지만 텐산 산맥의 만년설이 녹은 물이 지하수로 스며든다. 그래서 지하수로를 만들고 밭농사를 짓는데 수로의 길이를 모두 합하면 5,000km나 된다.

 

투르판은 중국 최대의 건포도 산지다. 사막이라 일조량이 풍부한데다 물이 맑다보니 다른 곳보다 당도가 높다. 한여름이면 사막 한가운데 펼쳐지는 포도밭이 장관이다. 카레즈는 일단 수원을 찾아 샘과 샘을 파고 땅굴을 파서 수도관처럼 연결시킨다. 너무 지표면과 가까우면 말라버리고, 너무 깊으면 농사를 짓기 힘들단다. 또 중간에 물 저장고를 따로 만들어둔다.

 

전 세계 상인들이 모이는 번화한 땅 ‘카슈가르’

 

카슈가르는 3개의 실크로드 길 중 텐산남로와 서역남로가 교차하는 요충지였다. 중국인들은 카슈가르를 카스(喀什)라고 부른다. 파미르 고원 턱밑에 자리 잡은 카스는 전 세계의 상인들이 모여들던 번화한 땅이다. 1천 년에 지은 「한서」의 서역전에는 당시에 1천5백여 가구 8천6백70명이 산다고 쓰여있다. 2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바자르(시장)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바자르는 남대문 시장의 두세 배 정도. 파미르 고원의 고갯길이 녹아내리는 4월쯤이면 파키스탄과 인근에서 상인들이 몰려든다. 그들이 가져오는 것은 주로 실크와 면으로 된 카펫이고 중국의 공산품을 사서 돌아간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까지 가세해 시장은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시장에는 없는 게 없을 정도다. 실크, 칼, 카펫, 공예품, 모자, 양털, 의류는 물론 전통 빵인 난, 양고기꼬치 시시케밥, 스파게티의 원조라는 비빔국수 판미엔까지 다양하다.

 

카스의 또 다른 명소는 향비 묘다. 위구르족인 향비는 위구르인들이 가장 떠받드는 인물 중 하나. 향비란 몸에서 향기가 난다는 뜻인 데 청나라 건륭 황제의 총애를 받다 59세에 사망했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향비가 건륭 황제의 수청을 거부하다 20대 후반에 독살당했다고 믿고 있다. 실제로 향비의 묘는 후베이성(湖北省)에 있다. 향비 묘는 실제로는 이슬람을 전파했던 17세기 아바크훠자의 묘로 그의 아들 위스프란이 세웠다.

 

 

눈부신 만년설을 안고 있는 ‘파미르 고원’

 

카슈가르를 지나면 파미르 고원으로 이어진다. 파미르 고원으로 가는 길은 독특하다. 도로 양쪽으로는 신장백양나무만 촘촘이 서 있다. 하얀 기둥은 사시나무를 닮았고 줄기는 포플러나 미루나무처럼 솟은 신장백양나무는 거센 모래바람을 걸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시내를 벗어나서 두어 시간쯤 달리면 서서히 눈 덮인 산자락이 나타난다. 이 길이 중국·파키스탄 우의도로다. 1961년부터 85년까지 중국과 파키스탄이 공동으로 만든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시작. 카스에서 파미르 고원을 지나 쿤제랍 고개 ­ 훈자 ­ 이슬라마마바드까지 모두 1,300km. 얼마나 난공사였던지 3천 명이나 죽었다고 한다.

 

가장 난코스인 쿤제랍 고개는 ‘피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옛날엔 더 험했다. 5세기 초 중국의 고승 법현은 「불국기」에서 ‘깎아 지른 절벽 밑으로 세차게 물이 흐른다. 앞으로 가려 해도 발을 디딜 곳이 없다’고 표현했다.

말이 고속도로지 포장도 안 된 흙길도 나타나고 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만한 좁은 구간도 많다.

 

사막 기후와 고산 기후가 교차하면서 흙이 푸석푸석한데다 가끔씩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에 휩쓸려 도로가 유실되기 때문이란다. 이러다 보니 도로 한가운데로 불쑥 양떼를 몰고 가는 목동도 만나고, 노새에 짐을 지우고 달리는 촌로도 흔하다.

 

지프와 소형 버스만 다닐 수 있는데 버스는 그나마도 뒤쪽 범퍼가 땅에 닿는다고 떼어내고 운행한다. 휴게소라는 것도 원주민들의 막사같이 작은 집인데 벽에 ‘식당’이라고만 쓰여 있을 뿐이다.

 

만년설을 쓰고 있는 고봉이 한 발자국 물러나 있는 나이스 협곡을 지나 해발 3,000m를 넘어서면 파미르 고원지대가 나타난다. 파미르 고원은 텐산, 힌두쿠시, 쿤룬, 카라코람 등 4대 산맥이 교차하는 고원이다.

 

고원은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다. 동서로 300km, 남북으로 200km 정도. 그렇다고 광장처럼 확 펼쳐지지 않고 사이사이에 해발 6,000m가 넘는 고봉들이 솟아 있다. 고도도 2,500~5,000m로 다양하다. 파미르란 타지크어로 ‘세계의 기적’이라는 뜻이다.

 

산자락의 만년설은 빛을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부시다. 고원 길은 4월이 돼야 열리고 5월 들어서야 빙천(氷川)이 녹는다. 겨울에는 영하 30~40도 이하로 내려가는 혹한을 피할 수 없다.

 

파미르 고원은 신라승 혜초, 고구려 출신의 당나라 장수 고선지가 넘었던 길이다. ‘길은 거칠고 눈은 산마루에 수북이 쌓였는데, 험한 골짜기에는 도적이 들끓는다. 새는 날다 깎아지른 산 위에서 놀라고 사람은 좁은 다리를 건너며 어려워한다. 평생 눈물 흘린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천 줄이나 뿌리도다’ (「왕오천축국전」)

 

1천3백년 전 구도의 길을 떠나며 험준한 세상을 몸으로 버텨냈던 신라승 혜초는 얼마나 고단하고 팍팍했는지 눈물까지 흘렸다. 8세기 당 현종 때 고선지 장군은 파미르 고원에서 세계 전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 747년 티베트와 사라센 제국이 동맹을 맺고 당을 견제하려고 동쪽으로 진격해오자 군사 1만 명을 끌고 티베트(토번국)를 격퇴시키고 티베트의 72개 동맹국의 항복을 받았다.

 

750년에는 타슈켄트를 토벌하기도 했다. 고선지 장군이 빙하와 만년설이 있는 해발 4,500m의 산줄기를 넘는 대장정을 두고 영국 탐험가 스타인은 ‘알프스를 넘은 하니발과 나폴레옹보다 뛰어났다’고 표현했다.

 

관광객들이 갈 수 있는 곳은 해발 3,650m의 카리쿠리 호. 시시각각 색이 변한다는 변색호지만 여름이 돼야 얼음이 녹는다. 그 옆으로 빙산의 아버지라는 뜻의 무스타거봉(7,546m)에 구름이 걸쳐 있다. 여기서 국경까지는 불과 4시간이면 된다.

 

동양과 서양을 이어줬던 실크로드.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실크로드는 모래 속에 파묻힌 지 1천 년만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

 

 

여행수첩

 

베이징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둔황으로 들어가는 방법과 시안에서 기차를 타고 유원을 거쳐 둔황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여행 코스는 둔황, 투루판, 카슈가르, 우루무치, 파미르 고원 등이다. 직장인들은 둔황까지 직접 비행기를 타고 들어가는 상품이 낫다.

 

그래도 7박 8일 이상 걸린다. 시안부터 시작할 경우 2주 가까이 걸린다. 카스는 중국령이지만 이슬람 색채가 강하다. 돼지고기는 금물이며 현지에서는 달러가 통하지 않는다. 국내 대형 여행사와 배낭여행 전문 여행사에서 실크로드 상품을 취급한다.

글·사진 / 최병준 기자(경향신문 매거진 X부)

 

 

 

 

   실크로드의 흥망과 함께 한 사마르칸드

 

[오마이뉴스 2005-11-18 14:49]    

 

[오마이뉴스 김준희 기자] 육상의 실크로드를 이야기할 때 그 길은 중국의 시안(장안)에서부터 터키의 이스탄불까지를 가리킨다. 시안에서 서쪽에는 광대한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고 이 사막을 북쪽으로 돌아서 가는 길이 천산 남로, 남쪽으로 돌아서 가는 길이 서역 남로에 해당한다.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과는 관계 없이 천산산맥의 북쪽을 질러 가는 길이 천산 북로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길을 택하든 육상의 실크로드 길은 중간에 사마르칸트를 거치게 된다. 시안에서 이스탄불에 이르는 긴 길의 가운데에 위치한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실크로드를 동과 서로 나눌 수 있다.

사마르칸트라는 도시의 역사는 티무르 제국의 수도이기 전에 기원후 10세기까지 번성했던 육상 실크로드의 중심지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교역로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사마르칸트가 치러야 했던 대가도 컸다. 기원전 500년경에는 다리우스에게 정복되어서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기원전 300년경에 다시 알렉산더에게 정복되기도 했다.

이후 기원후 7세기에 경전을 구하기 위해서 인도로 가던 도중에 이곳을 방문한 당나라의 승려 현장 삼장은 사마르칸트를 가리켜서 '외국 각지에서 들어온 값진 상품이 이곳에 모여 있다. 땅이 비옥해서 농작물이 많이 난다. 숲에는 나무가 울창하고 꽃과 과일이 풍부하다'고 <대당서역기>에서 묘사하고 있다.

당시에는 사마르칸트와 시안을 잇는 동쪽의 실크로드를 통해서 많은 상품들이 거래되었다. 사마르칸트의 상인들은 양털과 비취와 보석을 시안으로 가지고 가서 팔았고 중국에서 고급 비단을 사서 사마르칸트로 돌아와서 팔았다.

▲ 사마르칸드의 성원. 기도하는 무슬림들.
ⓒ2005 김준희
사마르칸트에서 시안으로 가는 길은 약 5000km다. 낙타와 말에 짐을 싣고 가는 여정은 족히 수개월이 걸렸을 것이다. 이 도중에는 세계에서 제일 험한 산맥인 파미르 고원과 천산산맥이 있고, 세계에서 제일 삭막한 사막인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까다로웠던 것은 국경수비대와 부유한 상인을 노리는 도적이었을 것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북쪽으로 또는 남쪽으로 지나가는 대상의 낙타행렬은 많은 경우 수백 마리에 달했다고 한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그 대상의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풍족했던 도시도 칭기즈칸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버렸다. 당시에 번성했다는 나무가 울창한 숲은 지금 찾아 볼 수 없고, 칭기즈칸의 원정 이전에 있었다던 문명의 흔적은 오직 박물관 안과 발굴이 되지 않은 언덕에 묻혀 있을 뿐이다.

중앙아시아를 여행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부터 내 마음 한구석에는 사마르칸트가 있었다. 고대에 번성한 강국(康國), 칭기즈칸에 의해서 파괴된 도시를 티무르가 재건한 제국의 수도 그리고 그 이전에 실크로드의 중심도시로 수많은 대상들이 거쳐 간 '중앙아시아의 로마'. 여행자에게 이만큼 영감을 주는 도시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마르칸트에 와서 실크로드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티무르 제국 이전의 유적에 관심이 있다면 아프라시압 언덕으로 가거나 아프라시압 박물관에 가야만 한다. 그래서 나도 아프라시압 박물관과 언덕으로 향했다. 사마르칸트의 중심가인 레기스탄 거리를 지나고 타슈켄트 거리를 지나서 걷다 보면 아프라시압 박물관과 그 뒤로 아프라시압 언덕으로 오르는 길목이 나온다.

타슈켄트 거리를 지나서 포장도로를 걷다보니 아프라시압 박물관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가운데는 그 유명한 아프라시압 벽화가 보관되어 있는 곳이고, 그 왼쪽으로 전시실이 있었다. 사마르칸트의 건축물들이 티무르 제국 시대의 것들이라면, 이 박물관의 전시물들은 그 이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 아프라시압 박물관 가는 길
ⓒ2005 김준희
처음으로 나오는 전시실에는 이곳에서 발굴 작업을 했던 당시의 사진들이 주로 있었다. 다음 전시실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놓여 있었다. 1-4세기의 아프라시압 역사는 기록된 것이 없어서 오직 고고학에만 의존해야 한다. 이 전시실에는 많은 유물들이 있었다. 알렉산더 시대의 유물부터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도기와 잔, 작은 항아리와 작은 석상들이 있었다.

그 옆에는 그림과 문양이 있는 동전과 엽전을 연상시키는 구멍이 있는 동전,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큰 항아리도 있다. 물론 이 항아리는 온전한 형태가 아니라 부서진 조각들을 모아서 붙여놓은 것이다. 그 위의 벽에는 이 항아리를 발굴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붙어 있다.
 
이 많은 조각들을 모아서 어떻게 이 큰 항아리로 복원했을까. 아마도 그 작업은 천조각의 퍼즐그림 맞추기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9-12세기에 사용했다는 화려하게 채색된 세라믹 그릇들이 많이 있었다.

전시실을 빙 돌아서 나오자 이곳을 관리하는 아주머니가 "프레스코 프레스코"하고 말을 하며 벽화가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이 벽화가 프레스코 벽화인 모양이다. 이 벽화는 아프라시압 언덕에서 발굴된, 흔히 아프라시압 벽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7세기에 만들어졌다는 높이 2m가 넘는 커다란 이 벽화는 정면과 좌우측으로 나뉘어 있었다.

우측의 벽화는 사냥을 하는 모습이다. 활과 창으로 호랑이같이 생긴 동물을 잡는 그림이고, 좌측으로는 코끼리에 올라 탄 신부와 말을 탄 시녀들, 그 뒤를 따르는 행렬들의 모습이다.

정면으로는 왕이 가운데에 앉아 있고 각국에서 온 사절들이 그 앞에 조공을 위해 서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 각국의 사절들은 중국인, 투르크인, 파미르의 유목민 그리고 고구려인도 있다고 한다. 이 벽화가 만들어진 것은 7세기. 당시는 육상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활발했던 때다. 그 시기에 고구려의 사신이 공물을 들고 사마르칸트를 방문했던 것일까.

이 벽화는 당시 사마르칸트의 문화 역량을 잘 나타내주는 벽화라고 하지만, 전체적으로 낡고 색이 바래 군데군데 떨어진 모습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 아프라시압 언덕
ⓒ2005 김준희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와서 그 뒤쪽으로 올라오니 이곳이 그 아프라시압 언덕이다. 아프라시압 언덕은 칭기즈칸이 파괴하기 전에 이 도시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지금은 그냥 황량한 곳인 이 언덕에서 1958년 한 목동이 우연히 동전과 유물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발굴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몇 년 전까지 프랑스 고고학 팀이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지금은 발굴이 중단되었는지 아니면 발굴이 끝난 건지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하긴 듬성듬성 풀이 있을 뿐인 이 황량한 언덕에서, 따가운 햇볕과 달려드는 날파리들을 무릅쓰고 발굴작업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넓은 언덕을 돌아다니다 보니 발굴이 중단된 듯한 현장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벽돌 같은 것으로 만든 성벽의 흔적이 보였다. 언덕 가운데 자리한 그 흔적은 흙 속에 묻혀 있던 것을 최근에 발굴한 것이 아니라, 오래 전에 만들어 놓은 것을 얼마 전에 부숴버린 것 같은 모습이다.

▲ 사마르칸드의 전경
ⓒ2005 김준희
이 언덕의 한쪽 끝에서는 사마르칸트의 모습이 보인다. 저 멀리 비비하님 성원이 보이고, 그 앞으로 바자르와 대로가 보인다. 이곳에서 바라본 사마르칸트의 하늘은 파랗다.
 
그 파란 하늘 아래로 비비하님 성원의 에메랄드 빛 돔이 겹쳐진다. 아미르 티무르가 살았던 시절에도 하늘은 지금처럼 푸른 빛이었으리라. 티무르는 아마도 푸른 하늘 빛에 매료되어서 모든 건축물의 돔을 푸른 색으로 만들게 했을 것이다.

▲ 푸른 하늘과 푸른 돔. 구르 에미르.
ⓒ2005 김준희
아프라시압 언덕을 내려오면서 나는 실크로드를, 그리고 당시의 사마르칸트를 생각했다.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육상 실크로드가 가장 번성했던 때는 기원후 7-8세기였다.
 
중국 문화가 화려했던 왕조인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수많은 외국인들이 모여들었던 '세계 제일의 국제 도시'였다. 그리고 실크로드의 중심에 위치한 사마르칸트도 많은 대상들이 오고가는,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큰 대도시였다. 당시에 육상 실크로드가 번성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국제색이 풍부했던 당나라의 문화와 정책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8세기 중반, 실크로드의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당의 중앙아시아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아랍세력은 연합군을 형성해서 동쪽으로 진군해오고 있었고, 이에 맞서기 위해서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수인 고선지 장군도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아랍 연합군과 당나라 군대가 맞붙은 이 전투 이후로 당나라가 중앙아시아에서 전면 철수하면서 실크로드의 양상도 바뀌어 갔다. 육상로보다는 해상 교역로가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당나라는 내부 반란에 시달리며 세력이 약해져갔다.

사마르칸트도 변화했다. 수많은 종교들이 공존했던 예전과는 달리 이슬람 문화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몇 세기 후에는 칭기즈칸의 원정대가 도시를 파괴하고 말았다. 실크로드의 흥망과 함께 사마르칸트의 모습도 변해갔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2005년 7월 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몽골-러시아(바이칼)-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을 배낭여행 했습니다.
 
 

         지프 타고 실크로드 랠리횡단

 

[경향신문 2005-06-28 16:27]    

 


지프를 타고 중국을 횡단하거나 유람선을 타고 떠나는 중국 바캉스여행, 열차타고 떠나는 일본 배낭 등 다양한 해외 여름상품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오버랜드 엔터테인먼트는 8월2일 떠나는 실크로드 자동차탐방 참가자를 모집한다. 27박28일 코스.

 

톈진~베이징~시안~난저우~주천~둔황~투루판~우루무치~바인부룩~타클라마칸~시안~무위~훅후트~베이징~위하이~인천으로 총연장 1만4천㎞를 달리게 된다. 랠리 형식으로 실크로드를 횡단한다.

 

자신의 자동차로 갈 수도 있다. 원래 중국은 국내에서 차량을 가지고 가려면 절차가 복잡했지만 이번에는 미리 신청만 하면 가능하다. 자동차탐방여행을 기획한 사람은 1999년 런던~서울 구간을 랜드로버로 횡단했고, 2002년에도 유라시아를 횡단했던 남기환씨.

 

이번 여행에는 자동차 정비사가 따라가게 된다. 중국면허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차량소유주는 30일까지 신청을 해야 하며 차량 미소지자는 오는 7월25일까지 신청하면 된다. 차량 소유자는 4백50만원, 일반참가자는 3백90만원. (02)522-0228

 

테마21은 ‘배를 타고 떠나는 중국 바캉스’ 상품을 내놨다. 여객선을 이용하기 때문에 가격이 저렴하다. 평택항에서 떠나는 영성~위하이~적산법화원~성산두 코스는 4박5일 32만9천~35만9천원. 중국 최대 규모의 야생동물원과 해수욕장, 장보고 유적지 등을 돌아보게 된다.

 

특히 성산두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일출을 볼 수 있는 곳. 중국 대륙에서도 길지로 여겨 진시황이 두차례나 방문하는 등 황제들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석도진에는 장보고 유적지 적산법화원도 있다. 중국인들은 1,200년 전 해상왕 장보고가 신이 됐다고 믿고 있으며 적산을 신성시한다.

 

테마21은 배낭여행상품도 내놨다. 톈진~베이징~시안 11일 코스가 42만9천원, 톈진~베이징~항저우~수저우~상하이는 46만9천원. 베이징과 시안에서는 배낭객들이 자유여행을 즐기는 것으로 일정이 짜여 있다. (02)544-6363

 

일본여행센터는 도쿄와 오사카 후쿠오카를 돌아보는 ‘밤도깨비 일본일주’ 상품을 판매한다. 한국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도쿄~닛코~요코하마~하코네~후지~교토~나라~오사카~고베~후쿠오카 코스.

 

일정은 여행자가 조절할 수 있다. 일본정부가 국토순례를 하는 외국인이나 자국 학생들을 위해 내놓는 청춘18열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가격이 저렴하다. 청춘18패스는 오는 7월20일부터 9월10일까지 판매되며 1만1천5백엔. 일본국철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도쿄~오사카 야간열차는 좌석이 없으면 승차할 수 없어 지정석을 예매해야 하는데 값이 싸서 서둘러야 한다. 각 도시에서는 1일패스를 사용하면 된다. 오사카는 850엔(약 8,500원), 나라는 400엔, 고베는 650엔, 후코오카는 600엔. 열차표와 1일패스만 있으면 물가가 비싼 일본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현재 8가지 코스를 개발, 여행프로그램을 짜준다. 가장 많이 찾는 상품은 부산에서 페리를 타고, 도쿄로 건너가 도쿄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나머지는 자유여행을 하는 프로그램. 청춘18열차 포함 39만9천원.

 

   (02)7360-100

〈최병준기자 bj@kyunghyang.com

 


 

JennyFlute(젤이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