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들/세 상 칼럼들

인생에서 세 번 맞는 정년

향기男 피스톨金 2006. 5. 10. 15:38

 

           인생에서 세 번 맞는 정년

 

 
요즘 직장인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노후대비가 아닐까 생각된다. 평균 수명은 늘어난 데 비해 명예퇴직 등으로 직장을 떠나야 하는 시기는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장인들 노후설계에 대한 관심사를 보면, 대부분이 노후자금 마련에 있는 것 같다.
 
그 때문인지 노후자금을 마련하겠다고 무리하게 부동산이나 주식·선물 등에 투자했다가 실패를 하는 사례도 많다.
 

그러나 노후설계를 할 때 자산운용에 앞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정년 이후 30년이 넘는 후반인생을 무슨 일을 하면서 보낼 것인가에 대한 생애설계(Life Planning)를 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직장인들은 인생에서 세 번의 정년을 맞게 된다.

제1의 정년은 타인이 정년을 결정하는 고용정년, 제2의 정년은 자기 스스로가 정하는 일의 정년, 제3의 정년은 하느님 결정에 따라 세상을 떠나는 인생정년이다.

 

종신고용제가 유지되고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절의 직장인들은 한 직장에서 정년까지 무사히 근무하는 것이 목표였다. 여성들 또한 안정된 직장에서 정년까지 근무할 수 있는 남성을 훌륭한 결혼상대자로 생각했다.

 

정년퇴직 후 남은 인생 또한 그다지 길지 않기 때문에 퇴직금만으로도 어느 정도 노후자금을 충당할 수 있었다. 자녀들도 교육만 받으면 부모들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이후 종신고용제가 급격히 붕괴되면서 직장인이 행복했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회사를 몇 군데 옮겨서 근무한다 해도 50세가 넘으면 고용정년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이런 경험을 한 미국이나 일본 직장인들은 젊은 시절부터 후반인생 설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준비한다. 노후자금 마련을 위한 자산운용 설계에 앞서 생각해야 할 것이 생애설계라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고용정년 후 30년 이상의 기간을 좀 더 돈을 벌기 위한 인생을 살 것인가, 자기실현을 위한 인생을 살 것인가, 사회 환원적인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이 세 가지를 병행해가며 살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

 

노후생활 자금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체면을 버리고, 허드렛일에 가까운 일자리라도 찾는다. 직장에 소속돼 있었기 때문에 해보지 못했던 일을 하기 위해 소규모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일의 정년이라고 판단되는 나이까지는 무언가 돈벌이가 되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노후자금에 큰 걱정이 없는 사람들 중에는 젊은 시절에 못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대학원에 가거나 해외유학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자기실현을 위한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NPO(Non Profit Organization) 단체에 들어가 사회봉사 활동으로 보람있는 노후를 보내려는 사람도 있다. 사회 환원적인 인생설계다.

퇴직 후에 하루 10시간만 자유시간(남는 14시간을 수면, 식사 등에 쓰는 시간으로 가정)을 갖는다고 해도, 60세에서 80세까지 20년을 계산하면 7만시간 이상이 된다.

 

이것은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총 수업시간의 3배가 넘는다. 또 22세에서 60세까지 일을 한다고 가정할 경우, 이 기간의 근무 시간과 맞먹는 시간이다. 이 기간을 결코 헛되이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우리나라 직장인들도 이제는 인생에서 세 번 맞는 정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들어섰다.

 

현재 직장에서 고용정년이 가까워졌다고 생각되면 또 다른 직장을 찾아 고용정년을 연장시킬 것인지, 아니면 적당한 기회에 창업 등의 방법으로 일의 정년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실현을 위한 인생이나 사회 환원적인 인생을 살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직장인이 획일적인 노후를 보내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생각으로 각자에게 맞는 후반인생을 설계해야 한다.

[매경이코노미 2006-05-10 10:47]

[강창희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장]

 

 

 

 

             죽음은 삶의 과정이다

 

[일다 2006-05-10 03:27]

 

인간의 죽음을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 과정, ‘죽어감’으로 이해하려는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3~4일 양일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은명대강당에서 연세대 간호대학 창립 100주년이자 한국죽음학회 1주년을 기념하여 죽음학자 알폰스 디켄(Alfons Deeken) 교수 초청 <인간의 죽음과 죽어감>이란 주제의 강연이 있었다.
 

죽음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환자’

 

알폰스 디켄 박사는 죽음학자이자 가톨릭 예수회 신부로 1975년부터 일본 동경 상지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1982년 일본에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會)’를 창설해서 현재 7천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저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궁리, 2002)가 번역, 출판됐다.

 

디켄 박사는 죽어가는 환자, 특히 말기 암 환자의 고통에 주목하면서 죽음을 환자 개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환자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이해관계와 갈등 속에 놓여 있는 장으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의 죽음은 의사, 간호사와 같은 의료인, 가족, 친구 및 지인들과의 관계적 맥락에서 이해되고 다뤄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나이 듦에 따른 자연사가 아니라 말기 암이나 치유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환자’들에게 갑작스러운 죽음은 본인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온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개인의 죽음은 본인뿐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실을 체험해야 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주게 된다.

 

또, 환자의 결정이나 선택에서 주위 사람들의 행동이나 태도가 환자의 의도와 충돌하는 지점이 생긴다.

 

디켄 박사는 죽음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환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고, 환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그를 대함으로써 환자의 죽음에 협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죽음앞둔 환자들의 욕구와 자기결정 존중돼야

 

디켄 박사는 죽음을 앞둔 환자의 욕구를 열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환자는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혼자 버려진다는 느낌, 두려움을 갖기 때문에 옆에 친구가 가까이 있기를 원한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 때 옆에 가까운 사람이 있어 주는 것이 필요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공동체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원하는 것이다.

 

둘째, 환자는 자율성을 존중 받으며 자기결정을 하기 원한다.

 

의사나 간호사는 질병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갖고 있고 반면 환자는 질병으로 인해 정신적, 신체적, 정서적으로 약해진 상태지만,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환자의 결정을 무시해선 안 되며 환자의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셋째, 환자는 인간 ‘성장’에 대한 요구를 갖고 있다.

 

죽음이라는 끝에 대해 자포자기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지만, 죽음까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가고 성장하고 싶어하는 존재이길 원한다.

 

넷째, 환자는 죽음의 행위에서 조연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원한다. 자신의 죽음 때문에 겪어야 할 주위 사람들의 고통을 알고 있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들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한다.

 

다섯째, 환자는 자신의 병에 대해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

 

환자를 위해 ‘암’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환자에게 희망을 갖게 하고 치료효과를 거두기 위한 것이지만, 이러한 의료진의 태도는 스스로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반영한 것일 뿐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환자와 의사가 신뢰관계 속에 있으려면, 의사는 환자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야 하고 환자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알 권리를 누려야 한다.

특히 환자에게는 자신의 남은 삶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여섯째, 환자는 품위 있게 ‘위엄’을 갖고 죽기 원하며 불필요한 생명연장, 인위적 생명연장은 원하지 않는다.

 

안락사와 관련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죽음의 과정을 연장시키기 위해 최첨단 의료기구 사용을 거절할 권리를 죽어가는 환자에게 부여해야 한다는 것과 연관된다. 의료인의 생명연장을 위한 처치는 환자의 자유와, 환자가 품위 있게 존엄한 상태에서 죽는 것을 방해한다.

 

일곱째, 환자는 자기 전 생애를 돌아보는 정신요법을 원한다.

 

과거의 인간관계나 현재 고민하는 문제들 때문에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데, 화해와 용서의 시간이 필요하다.

 

여덟째, 환자는 고통을 통제할 수 있기를 원한다. 육체적인 고통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 사회적 고통, 영적 고통을 합한 전체적인 고통을 고려해야 한다.

 

아홉째, 환자는 유머와 웃음을 갖기 원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의 슬픈 얼굴을 바라보기보다는 유머나 웃음을 통해 의사소통하고 싶어한다.

 

열째, 환자는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태어남과 죽어감, 역동적인 삶의 과정

 

디켄 박사의 이야기는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는 가톨릭의 종교적 기반에서 나온 것이라 어떤 부분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또한 환자를 주변 사람들과 분리시켜 ‘주연’이 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환자가 힘든 상황 속에서도 누구에게 의존해선 안 되며 자율성과 독립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도 이견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인위적 생명연장에 대한 기대와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는 환자들을 본 사람들이라면, 디켄 박사의 설명이 다소 현실과 거리가 있거나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켄 박사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보여준다. 젊음과 건강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죽음은 더욱더 삶과 분리되고 있으며, 분리된 만큼 우리에게 더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자신의 몸을 비롯해 자연을 통제하고 기술을 개발해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근대적 인간은 과학 및 의료기술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연장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삶에서 몰아낼 수 없기 때문에 좌절을 경험한다.

 

죽음과 가까이 있는 ‘나이 듦’에 대한 혐오와 거부감이 강화되고, 건강관리 열풍 속에서 죽음은 점점 더 삶에서 주변화되어 간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가까이 있는 사람들, 이별해야 하는 사람들은 낯설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죽음을 대면하게 된다.

 

생명의 시작, 출산, 양육, 노인보살핌, 죽음이 ‘여성의 역할’로 한정되어온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면, 이러한 역동적인 삶을 잊어버린 채 경제활동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삼는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맞이하는데 더욱더 곤혹스러워한다.

 

‘성공적인 삶’, ‘건강한 삶’, ‘활동적인 삶’

 

속에서 죽음은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의존의 영역으로서 의미 없고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했다. 사회적으로 죽어감의 과정을 둘러싼 (여성들의) 보살핌 노동! 의 존재와 그 가치를 ‘없는 것’이나 ‘가벼운 것’,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실제 죽음에 가까이 있는 노인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어버리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사람들,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죽음을 삶의 깊숙한 곳에서 체험한다.

 

한국 사회가 고령화를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노인보살핌 제도화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죽음 역시 삶의 과정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디켄 박사의 주장은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향기나는 중년의 男


찿고싶은 내사랑/김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