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안중근 항일르포
이토 히로부미 저격장소 안내판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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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 한국을 떠난 탐방대는 열흘간의 일정 중 6일째 되는 날 하얼빈역 의거 현장에 도착했다. 야간열차로 밤새 달려 하얼빈역에 도착한 탐방대는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갑자기 멈춰섰다.
이 곳이 주변과 다른 것이라고는 바닥에 삼각형과 사각형의 작은 표시가 있다는 것뿐 어떤 안내판조차 설치돼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이 바로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역사의 현장이다. 삼각형은 안 의사가 총을 쏜 지점이고, 사각형은 이토가 총을 맞고 쓰러진 자리라는 설명이다. 이 작은 표시 2개가 역사의 현장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인 셈이다.
탐방대원들은 역사적인 의거 현장이 설명도 없이 고작 삼각형과 사각형으로만 표시된 것도 바로 지난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안중근, 하얼빈에서의 11일’의 저자인 서명훈(77) 전 하얼빈시 민족종교사무국 부국장은 “플랫폼의 넓이와 양쪽으로 늘어선 환영 인파 등을 고려하면 안 의사는 10보가 채 안 되는 거리에서 이토를 쐈는데, 이 상황을 현장에 작은 표시로 남기는 데 97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현장에서 러시아 당국(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영토였음)에 의해 체포된 안 의사가 이송돼 6박7일 동안 조사를 받았던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자리는 지금은 소학교(초등학교)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이 터가 과거 일본 총영사관이었음을 알리는 표지에는 안 의사가 이토를 살해하고 뤼순 감옥으로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명이 남아있다.
탐방대의 마지막 목적지는 랴오둥(遼東) 반도 남단의 군항도시 뤼순(旅順). 안 의사가 수감생활을 한 뤼순 감옥은 중국 당국이 감옥을 그대로 보존해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많은 중국인 독립운동가들도 이 감옥에서 고초를 겪은 탓에 탐방단이 찾았을 때도 수많은 관람객들이 잔혹했던 과거를 돌아보고 있었다.
감옥 본관동의 좁은 감방에는 당시 수감자들이 사용했던 식기, 짚신 등이 놓여 있었고, 감방동 한쪽에는 형틀, 수갑, 몽둥이 등 당시 고문에 사용됐던 도구들이 일제의 만행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안 의사가 수감됐던 방은 본관동 밖 간수부장 당직실 바로 옆에 마련된 독방이다. 벽에는 안 의사의 사진과 함께 중국어와 영어, 한국어, 일본어로 안 의사에 대한 설명을 해 놓았다.
감방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쇠창살 사이로 보이는 조그만 방에는 안 의사가 사용했던 필기구와 책상, 침구 등이 정리돼 있었다.
안 의사가 교수형을 당한 곳은 안 의사만을 위한 기념관으로 꾸며졌다. 기념관은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안 의사의 흉상과 교수형에 이용된 밧줄, 화분으로 엄숙하게 꾸며졌고, 탐방대는 조국 독립을 염원했던 안 의사를 기리며 묵념했다.
김광시(64) 탐방단장은 “지금까지 뤼순 감옥 등에 한국인 등 외국인들이 출입하려면 사전에 허가를 얻어야 했는데, 올 연말이면 이런 제한이 없어질 것으로 보여 더 많은 사람들이 안 의사의 정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얼빈·뤼순=유덕영 기자
firedy@segye.com
하얼빈역 의거 현장 하얼빈역 플랫폼에 표시된 안중근 의사의 의거 현장. 세모 표시는 안 의사가 총을 쏜 위치이고, 위쪽 점선은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한 자리다. |
ummer Snow (여름눈) - Si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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