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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운남/다리(대리) 삼탑은 영광을 기억하는가

향기男 피스톨金 2007. 12. 16. 00:11

           

            다리 삼탑은 영광을 기억하는가



[한겨레] 동이 터 오는 다리(대리) 고성을 걷고 있는 지금 시각은 새벽 5시40분. 어젯밤 게스트하우스 주인장과 함께 마신 백주의 알코올 기운이 채 빠져나가지 못했나 보다. 아침의 아름다운 광선을 번번이 놓치는 것도 윈난(운남)의 낭만에 취한 여행자들이 쉬 잠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속은 쓰리고 다리는 후들거리지만 차가운 고원의 새벽공기가 잠을 깨운다.

고성 안 곳곳은 공사 중이다. 도로는 파헤쳐져 있고 낡은 주택은 철거를 앞두고 있다. 리장의 성공에 고무받은 윈난 지방정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관광사업에 뛰어들었다. 서남지역처럼 경제적으로 낙후한 곳에서 그들을 탓할 바 아니지만, 그냥 두면 보석이 될 것을 지금 빛이 안 난다고 아쉬움 없이 없애버리는 무모함이 아쉬울 뿐이다.

윈난 최초의 고대왕국 남조의 상징

우리네 70년대 개발독재 시기, 얼마나 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렸는가.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이 없다고 투덜거리지 않는가. 천천히 걸어 숭성사(崇聖寺)에 갔다. 이곳에서 꼭 봐야 할 것이 있다. 하지만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단다. 아침 빛은 지금이 좋은데 매표관리원이 출근 전이라 표도 팔 수 없단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니 삼탑도영공원(三塔倒影公園 싼타다오잉궁위안) 쪽으로 가보란다. 게다가 이곳도 매표원이 출근 전이라 5위안만 찔러주고 들어갔다. 이곳은 참으로 우습게도 숭성사와 상관없지만 그곳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바로 내게 펼쳐진 풍경은 하얀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남조(南詔)시대 기념비적인 건축물, 삼탑이다.

이 공원의 이름처럼 삼탑이 호수에 비칠 때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완성된다고 하는데, 물결이 잔잔한 날이 드물어 그 또한 진풍경이라 한다. 하지만 좋았다. 아침 빛은 불그스레하게 백탑을 물들이고 그 뒤의 창산은 녹음으로 젖어 있다.
 
이 탑은 고대 강저인의 후예인 이족(彛族)과 백족(白族)이 윈난 최초로 건립한 고대 왕국 남조의 상징이었다. 남조 7대 왕인 소성왕(재위 823~859)이 건립한 숭성사 중앙에 69.13m의 사각 13층탑을 세웠다. 그리고 차례로 42m 높이의 팔각 10층탑을 두 개 더 세웠다. 이것이 당나라 이후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4대 불탑 중 하나인 삼탑이 되었다.

다리 인근의 이족과 백족이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토번의 영향 때문이었다. 초기 일부의 사람들이 티베트 불교인 밀교를 받아들였다가 남조국의 시조인 이인(彛人) 세노라(細奴邏)가 관음을 친견하고 남조를 세우자 윈난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로 떠올랐다.
 
그 때문에 윈난의 불교사원 대부분은 관음전이 중심에 있다. 하지만 이들의 불교는 상당히 전투적이었다. 이들은 당나라와 토번 사이에서 250년간 존속하며 무수한 전투를 치렀다. 특히 이들에게 유명한 것은 ‘대리마’라 불린 강한 말들과 ‘운남도’(雲南刀)라 불린 병기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설가 김용의 <사조영웅전>에는 남제 일등대사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의 본명은 단황야로 남조를 이은 대리국의 황제였으며 불가에 귀의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천하오절 중 한사람으로 대리국의 대표적인 무공 ‘일양지’를 사용하며 절대경지의 무공을 선보인다. 승려도 전투적이다. 요즘도 중국 티브이의 당나라 역사극에서 빠지지 않는 곳이 바로 다리의 남조국과 대리국인 것을 보면 이들 나라의 대국적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리를 떠나 인근의 웨이산(巍山)이라는 곳을 찾았다. 쿤밍에서 다리로 이어지는 도로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어 외지인이 들르는 곳은 아니지만 바로 이곳이 남조를 탄생시킨 세노라의 고향이다. 이곳은 오늘날 이족들의 자치현으로 다리의 백족과 비견되는 곳이다.
 
옛글에는 “서찬은 백만(현 백족)이고 동찬은 오만(현 이족)이다”라 했는데 얼하이((물 수 변에 귀 이자를 붙이면 됨 ??海)를 사이에 두고 두 부족이 공존했다. 모두 고대 강저인의 후예로 말과 풍습이 같지만 백문과 찬문이라는 나름의 독자적인 문자를 갖고 발전된 문화민족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이들은 아직도 90%의 사람들이 중국어가 아닌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한다.

찬문으로 비석을 새기던 노인의 자존심

웨이산은 다리에 비해 작은 마을이지만 원대(元代)에 만들어진 고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예스런 마을이다. 거리에 나와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노인들의 옷매무새도 단정하고 깐깐해 보인다. 대리석을 이용해 비석을 만드는 노인에게 말을 붙여 본다. “이 글이 찬문이란 거요.
 
옛 이족들의 글이지. 우린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오. 중국인들과는 달라!” 노인의 말투에서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난다. 이 찬문은 한나라 시기 ‘아가(*阿 可자 앞에 밭전자가 붙어있음)라는 사람이 산곡에 은거하며 1840자를 이두 형태로 만든 것이다. 그를 이족들은 서조(書祖)라 불렀다.

해 지는 웨이산 고성을 걸으며 꽤나 울적해진다. 찬란했던 대리국이 4천 미터 창산을 넘어온 원나라 몽골 기병에 의해 멸망한 뒤 이곳에는 더는 나라가 세워지지 못했다. 중원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독립을 시도했지만 돌아온 것은 철저한 진압이었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 ‘서남공정’의 일환으로 이들의 역사는 중국사에 포함된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사로 정리되는 중이다. 참으로 국가의 흥망성쇠는 허무한 것이다. 찬문으로 비석을 새기던 저 노인의 손길이 사라지는 훗날, 누가 있어 이들의 역사를 알려줄꼬!

윈난성 웨이산(중국)=글·사진 이상엽/사진가

남조, 윈난의 고구려

쳐들어온 당나라 병사 20만명 얼하이 차가운 물 속에 수장되다


당나라 초기 얼하이(水+耳 海)에 여섯 개의 강대한 오만 부족이 나타나니 이들을 육조(六詔)라 한다. 육조의 하나인 남조의 몽사조가 당의 지지 아래 여섯 부족을 치고 얼하이 지역을 통일한 후 윈난 전체를 장악한다. 이 나라가 바로 윈난 최초의 고대국가 남조(南詔)국이다.
 
13대에 걸쳐 250년간 윈난 전체뿐 아니라 쓰촨, 구이저우, 베트남, 미얀마까지 세력을 넓혔다. 이러한 세력 확장으로 발전시킨 길이 쓰촨에서 다리를 거쳐 미얀마, 인도까지 이어지는 서남 실크로드다. 이러한 발전으로 강대국인 당나라, 토번과 맞설 수 있었다.

당나라는 몽씨 왕가를 운남 왕으로 책봉하고 토번의 강력한 힘을 누르려 한다. 당은 송첸캄포 시기의 통일왕국인 토번의 힘을 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조와 당의 우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당나라의 운남 군수에게 모욕을 받은 남조왕은 이번에는 토번과 연합해 당나라와 맞선다.
 
670년 대비천에서 설인귀가 토번 군대에게 대패한 뒤 당나라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다가 754년, 남조가 토번과 연합했다는 소식에 남조를 일제 공격하게 된다. 당나라의 이밀을 총대장으로 해 20만의 대군을 지금의 다리 인근으로 진군시킨다. 하지만 남조의 치밀한 전략과 수전에 밀려 파병된 20만 명은 얼하이의 차가운 물속에 수장된다.
 
당시 당나라는 이 파병을 위해 집안의 남자 세 명 중 한 명을 징병했다. 대대적인 병역기피 현상이 벌어진 것도 이때다. 시인 두보는 이렇게 노래했다. “예로부터 백골을 거두어 주는 이도 없네 / 새 귀신은 괴로워서 원망하고 묵은 귀신은 통곡하네 / 하늘은 흐리고 비가 젖어들어 우중충하구려.”

남조는 얼하이의 물속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천보전사총’을 만들고 총대장 이밀의 사당을 지었다.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리·웨이산 여행 수첩

말을 타고 넘어볼까?


◎ 다리는 바이족 자치주의 주도로 쿤밍에서 377㎞ 떨어져 있다. 오래전 촉의 수도 청두에서 인도로 이어지는 서남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발전했다. 또한 7세기 윈난 최초의 통일국가 남조국의 수도이자 대리국의 수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쿤밍에서 다리행 버스는 많다. 고속도로가 있어 약 4시간이 걸리며 편도 100위안 정도다. 서울에서 바로 가는 항공편은 없고 쿤밍을 거쳐 들어간다.

◎ 다리는 한국의 배낭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게스트하우스가 흔하고 주변 여행을 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NO.3 게스트하우스’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음식 맛도 좋고 주변 여행 알선료도 싸다. 주인장인 털보 아저씨와 차 한잔을 즐길 수 있다. 방값은 4인실 도미토리의 침상 하나가 30위안. 근처의 게스트하우스들도 비슷하다.

◎ 다리는 자연풍광이 좋다. 도시 뒤편으로 해발 4120m의 창산이 솟아 있다. 몽골 기병은 이곳을 넘어 다리를 침공했다. 과연 말을 타고 넘을 수 있을까 궁금한데, 이곳에는 말 트래킹이 유명하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 중턱의 ‘종화사’까지 쉽게 오른다. 또한 다리의 상징은 얼하이 호수다. 호수 둘레에 마을이 많은데, 특히 사핑(沙坪)이 좋다. 백족의 전통의상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월요 장터가 유명하다. 하지만 물건들은 그냥 중국제의 싸구려들이 대부분이다. 집안에서 들고 나온 오래된 공예품을 눈여겨볼 만하다.

◎ 웨이산(巍山) 고성은 이족·후이족 자치현의 현성이다. 바로 남조국의 발생지로 이곳 이족의 조상인, 오만의 두목 몽사조가 병사를 일으킨 곳이다. 이들은 이해 주변 6개 부족을 통합하고 남조국을 건설했다. 현재의 고성은 1389년에 지은 것이다. 최근 다리와 연계된 관광을 준비하느라 도심은 조금 어수선하다. 다리에서 15분 간격으로 버스가 있다.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 다리와 웨이산은 얼하이라는 호수가 있어 물고기 요리가 풍성하다. 사귀워(砂鍋魚)라는 백족의 매운탕이 일품이다. 또 거리를 걷다가 목이 마르면 다리 우유를 마셔보자. 목초지에서 기르는 산양의 젖으로 고소한 맛이 오랫동안 입가를 맴돈다.
한겨레|기사입력 2007-12-14 16:18 기사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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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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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의 시작이자 한해를 마무리 해야할 12월입니다

                          추억속에 남을 즐거운 이시간을 위하여
                            따뜻한 가족 들과  마음과 마음에
                               기쁨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서로 이쁜 사랑들 나누시며
                         오손도손 행복한 시간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향기男피스톨金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