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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동경지회/무일푼 유학생이 이룬 '재팬드림' 장영식에이산 회장

향기男 피스톨金 2008. 2. 1. 17:00

 

무일푼 유학생이 이룬 '재팬드림'

장영식 에이산 회장
日本서 찾아낸 사업소질…면세점 1위 밑천됐죠
뱃일하며 모은 돈 300만원 쥐고 일본行, 유통업에 매력느껴

공부접고 사업 시작
日 최대 전자상가 아키아바라서 면세점

일본에 온 외국인들 사이에 인기 관광코스인 아키하바라.
전철을 타고 JR아키하바라역 전기출구에 내려 정면을 바라보면 영어, 한글, 한자, 러시아어 등으로 '에이산 면세점(Eisan Duty Free)'이라고 적힌 큰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4층짜리인 점포 안으로 들어서면 직원들이 영어, 일어, 중국어로 응대한다. 그러나 정작 이 점포의 소유주는 한국인이다.
 
바로 도쿄, 오사카, 벳푸 등 일본 주요 도시 7곳에 '에이산 면세점'을 운영 중인 장영식 에이산 회장(40)이 그 주인공. 장 회장은 면세점 사업, 가전제품 유통업, 무역업,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사업을 벌이고 있다. 특히 면세점 업계에서는
라옥스, 이시마루 등 일본기업을 제치고 매출액 1위다.

장영식 에이산 회장
에이산의 전체 직원은 230명. 최근에는 한국에서 올해 2월 대졸 예정자 15명을 뽑았다. 올 3월 말 결산에서는 140억엔의 매출액을 올릴 것으로 추산된다. 상하이와 서울에 해외지사도 개설했다. 직원들의 국적은 천차만별이다. 한국인이 90명으로 가장 많고 중국인 50명, 일본인
40명이며 그외에는 인도, 필리핀, 프랑스, 브라질, 싱가포르, 우크라이나 출신들이다. 직원 중 절반 가까이가 3개 언어를
구사하며 이들 중 40명은 4개 이상의
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한국에서 장 회장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지방대인 순천대 기계설계공학과를 졸업한 그를 받아주는 번듯한 직장은 없었다. 작은 건설업체 하도급 사업을 시작했지만 발주처가 도산하는 바람에 덩달아 문을 닫아야 했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을 때 길거리 전주에 붙은 구인광고(연근해
어선의 선원 구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인천 근해에서 3개월간 어선을
타면서 유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993년 단돈 300만원을 쥐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히라가나'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현해탄을 건너온 만큼 우선 일본어학교에 등록했다. 기거할 월셋방을
구하고 새 운동화를 샀더니 돈이 바닥이 났다. 이때부터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시작됐다. 하루 3시간씩 자는 생활을 1년 동안 하면서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 뽑아 먹지 않고 돈을 모았다. 일본은 1993년 자연재해로 그후 2년간 쌀값이 폭등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양국 쌀값을 비교했더니 일본
 쌀값이 한국보다 5배 가까이 비쌌다. 그는 경기미와 강화미를 수입해 일본에
팔았다.

일본 최대 전자상가인 아키하바라역에 있는 에이산 면세점.
일본에서 가수 조용필의 노래가 유행하자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에서 가요테이프를 싸게 구입한 후 이를 일본에 내다 팔았다. 이렇게 해서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에 300만엔을 손에 쥐었다.

이 같은 경험을 통해 자신이 사업에 소질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진로를 '공부'에서 '사업'으로 바꿨다. 다만 파친코나 한국음식점 등 기존 재일교포들이 많이 종사하는 업종이 아닌 다른 길을 찾기로 했다. 우연히 들른 아키하바라에서 가전제품 유통업에 매력을 느껴 관련사업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TV나 냉장고를 한두 대씩 가전 도매상에서 싼 가격에 산 후 이를 소매점에 마진을 붙여서 넘겼다. 운송수단이 없던 터라 노숙자의 리어카를 하루에 2000엔씩 주고 빌려서 제품을 실어날랐다. 그 후 35만엔을 주고 중고 봉고차를 마련했으며 돈을 더 벌자 2t 트럭을 구입했다.

이런 방식으로 2년간 아키하바라에서 일을 하면서 안면을 넓혀갔다. 어느새 아키하바라에서는 '청바지 입고 농구화를 신은 한국 청년'이라는 별칭으로 불렸으며 그를 돕겠다는 사람도 나왔다. 한 일본 사업가가 연대보증을 서줌으로써 미쓰비시UFJ은행으로부터 300만엔을 대출받아 1995년 회사 설립자금으로 썼다. 장 회장은 사업을 벌이려면 인력부터 보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키하바라의 한 대형점포의 영업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일본인을 삼고초려 끝에 영입했다. 그 영업부장이 올해 62세인 에이산의 사사키 사장이다. 그 후 사업영역을 일본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넓혀 나갔다. 일본 내 호텔이나 정부기관에 TV 등 전자제품을 납품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에 가전제품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수입한 명품 시계, 화장품, 패션 잡화 등을 면세점에 진열하고 팔았다. 그동안 일본에서 손톱깎이를 가장 많이 파는 점포는 DIY용품 판매점으로 유명한 도큐핸즈였는데 최근 에이산이 1위 자리를 차지했다. 매출액도 뛰기 시작했다. 98년 23억엔에서 2000년 32억엔, 2002년 61억엔, 2004년 78억엔, 2005년 98억엔으로 늘었다. 2006년 3월 결산 때는 100억엔을 돌파했으며 2007년 3월 말에는 111억엔을 달성했다.
 
기자는 "90년대 빈털터리로 일본에 유학온 사람들(이른바 '뉴 커머')은 많았지만 왜 당신과 같은 사업을 일구지 못하는가"라고 물었다. "시장의 흐름이나 소비자의 요구를 정확히 읽고 스피드 경영을 했기 때문이며 면세점이라는 니치마켓을 공략한 것이 주효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과연 그것만으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 기자는 에이산 본사 사무실에 걸린 회사의 모토를 본 후 '아 저것이다'라고 무릎을 쳤다. 사무실 벽에 붓글씨로 '한다. 지금 당장 한다. 될 때까지 한다'가 적혀 있었다. 헝그리정신과 도전정신, 집념이 오늘의 에이산을 있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 회장은 일본에서 사업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거나 설움을 당할 때마다 입을 악물었다고 한다. "나는 한국에서는 실패한 3류인생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벌이는 '패자(敗者) 부활전'에서는 반드시 이기겠다"라고.

에이산은 일본의 면세점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에이산을 소개했다. 한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자주 들르는 쇼핑장소로 에이산의 아키하바라역 점포를 소개했다.

와세다대 대학원에서도 최근 장 회장에게 강의를 부탁했다. 일본에 진출한 외국기업 중 단 한 번도 적자를 내거나 실적이 하락한 적이 없는 기업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 그중 하나가 에이산이라는 설명과 함께 대학원생들 앞에서 그 비결을 들려달라고 요청해 온 것이다.

또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일본은 배타적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농경문화를 가진 일본에서 사업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이지 기회는 얼마든지 널려 있다"고 말했다.

장 회장에게 장래 계획을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는 답변이 이어졌다. "지금의 도쿄 본사 빌딩 옆의 용지를 매입해 새로 8층짜리 건물을 지은 후 일본에 진출할 한국 벤처기업들이 둥지를 틀 '벤처 인큐베이터'를 만들 생각이다."
신흥국에서 유통업이나 리조트사업을 벌이기 위해 협상도 벌이고 있다고 했다.

▶▶일본서 사업할 때 유의점

일본과 한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상관습이나 회사의 문화가 비슷한 것 같지만 상당히 다르다.

우선 의사결정이나 명령체계에서 차이가 난다. 일본은 담당자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담당자가 의견을 종합, 정리해서 상사에게 보고하거나 제안하는 체계가 일반적이다. 소위 보텀업(bottom up) 방식이다.

일하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팀이나 조직을 이뤄 일을 진행시킨다. 계획을 세우거나 일을 처리하는 과정을 매우 중시한다. 집단의 의견을 모으고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만큼 첫 거래를 맺기까지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 비용, 노력이 든다.

일본에서는 자신의 상사보다는 고객이나 거래상대방이 우선이다. 접대를 할 때도 자사의 사장이나 회장보다는 비록 직급이 낮더라도 거래처의 담당자를 상석에 앉힌다. 일본에서는 접대의 기본을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본다. 거래처 회사 사람들에게 자신의 회사 사장이나 회장을 소개할 때도 이름으로만 소개한다. 직책(사장 혹은 회장)이나 높임말(~상, ~사마)을 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다.

구두약속에 대해서도 주의해야 한다. 일본의 한 교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일본인은 할 수 있는 일의 90%만 말하고 한국인은 할 수 있는 일의 110%를 말한다'고 평했다. 일단 큰소리를 쳐놓고 나중에 상황이 달라졌다고 변명하는 태도는 특히 일본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이미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낙인이 찍히는 셈이다.
[도쿄 = 김대영 특파원]
[ⓒ 매일경제 ]

2008.02.01 07:51:48 입력

 

 

                                    Roger Wagner Chorale(로저와그너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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