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world-OKTA]/월드-옥타 사람들

자랑스런 옥타인[세계 속의 한국인]세계 韓商들의 代父 鄭鎭哲 로열 아이

향기男 피스톨金 2008. 2. 21. 17:37

 

월드-옥타[세계 속의 한국인]

세계 韓商들의 代父 鄭鎭哲 로열 아이멕스 회장

                                 정진철 증경회장 월간조선 2월

 

 

대한민국은 소득 3만 달러 달성을 위해 해외 韓商들을 이용하라 』

 

鄭鎭哲 회장은 제1회 세계韓商대회(2002년)부터 지난 5회 대회까지 회장을 맡았다.

세계韓商대회는 全세계에서 활약하는 한국 기업인들의 모임이다.

鄭鎭哲
1943년 서울生. 중앙高·고려大 영문과 졸업. 미방무역 부사장. 고려大 남가주 교우회장. 세계 해외한인무역협회(OKTA) 회장. 제 1~5차 세계한인대회장. 現 로열 아이멕스 회장, LA 중앙은행 이사, 동서대학교 명예경영학 박사, 객원교수.

金南成 月刊朝鮮 기자 (sulsul@chosun.com)

 

1978년 渡美
 月刊朝鮮의 연재물 「세계 속의 한국인」을 지원해 주고 있는 KOTRA에 「이번 주인공은 미국에 거주하는 기업인이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KOTRA는 다음 날 鄭鎭哲(정진철·65) 회장을 추천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鄭회장의 이력서와 그에 관한 짧은 기사들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鄭鎭哲 회장은 1978년 渡美(도미), 1980년 가발 생산·유통 업체인 「로열 아이멕스」를 설립했다. 2006년 약 1억 달러의 매출을 달성했다. 로열 아이멕스는 미국 가발 시장의 약 12%를 점유하고 있다.
 
  KOTRA에서 보내 준 자료 가운데, 「세계 韓商(한상)들의 代父(대부)」라는 修辭(수사)가 눈에 띄었다. 鄭회장은 제1회 세계韓商대회(2002년)부터 5회 대회까지 회장을 맡았다. 세계韓商대회는 全(전)세계에서 활약하는 한국 기업인들의 모임이다.
 
  중국 상인을 의미하는 「華商(화상)」에 맞선 의미로 「韓商」이라고 이름 붙였다. 2년에 한 번씩 대규모 대회를 개최하는 華商들과 달리, 모래처럼 뿔뿔이 흩어져 있던 한국 기업인들은 韓商대회가 시작되면서 조금씩 뭉치고 있다. 鄭鎭哲 회장은 그 중심에서 한국 기업인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해왔다.
 
 
  중국과 인도네시아에 가발 생산 공장
 
미국 캘리포니아州 산타페 스프링스에 있는 로열 아이멕스 本社.

  미국 캘리포니아州 산타페 스프링스에 있는 로열 아이멕스 본사에서 鄭鎭哲 회장을 만났다. 지난 6년간 세계 韓商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老將(노장)의 덩치는 작았다. 키가 162cm이다. 직접 몰고 나온 벤츠 승용차의 큰 덩치와 비교하니 더욱 작아 보였다. 鄭회장은 회장실로 가기 전에 회사 곳곳을 안내했다.
 
  2층짜리 건물이었지만 무척 넓었다. 사무실 건물과 붙어 있는 물류창고는 미국 전역으로 팔려 나갈 가발 제품들로 꽉 차 있었다.
 
  로열 아이멕스는 중국과 인도네시아에 가발 생산공장이 있다. 중국 공장은 로열 아이멕스가 100% 소유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공장은 50% 지분을 가지고 있다. 미국 본사에 약 70명의 직원이 있으며, 중국과 인도네시아 공장에 각각 2500명, 5000명의 직원이 있다.
 
  그날 마침 미국 동부지역의 헤어숍 주인들이 회사를 방문했다. 鄭회장은 일년에 서너 차례 미국 각 지역의 헤어숍 주인들을 회사로 초청한다. 왕복 항공료와 체재비를 전액 지원한다.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지만, 며칠 동안 같이 식사하며 우리 제품을 써본 헤어숍 주인들은 다른 제품을 안 씁니다. 기존 고객들의 충성도가 올라가는 건 물론이죠. 한국이든 미국이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신뢰를 줘야 기업이 발전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正攻法(정공법)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최선이에요. 많이 만나고, 많이 대화를 해야죠』
 
  鄭鎭哲 회장은 헤어숍 주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후, 회장실로 들어왔다. 회장실은 각종 가발 샘플과 서류들로 어지러웠다. 그는 『방이 정신 없죠. 항상 그래요』 하며 씽긋 웃었다.
 
 
  형과 함께 가발수출업체 「미방」 경영
 
  ―이력서를 봤더니, 대학 졸업 후 미방 무역주식회사에 입사했더군요. 어떤 회사였습니까.
 
  『미방은 제 형님(정진호)이 만든 가발 무역회사였어요. 형님은 「한국 가발업계의 代父」로 불렸어요. 제가 대학을 졸업하던 1966년에는 들어갈 만한 회사가 없었죠. 당시 대한민국의 수출총액이 1억 달러였으니까, 제대로 된 회사가 있었겠어요?
 
  우리나라 수출품은 수산물, 스웨터, 합판, 가발이 전부였어요. 1억 달러 수출하는 데 3400만 달러, 약 34%가 가발이었어요. 나는 가발이 돈이 된다고 생각했고, 다른 생각 없이 형님 회사에 들어갔지요. 말단사원으로 들어가서 무역을 바닥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6개 업체가 수출을 가장 많이 했는데. 서울통상이 약 1200만 달러, YH가 800만 달러 수출했죠. YH 사건 아시죠? 1979년 이 회사 여공들이 야당이었던 신민당 당사에 들어가 파업농성을 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金泳三 前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 이 사건에 연루되었죠.
 
  다나무역이 600만 달러, 반도상사(現 LG상사)가 700만 달러, 우리 회사가 약 400만 달러를 수출했습니다. 미방은 1960년대 우리나라 수출을 이끌었던 주인공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회사 경영이 잘됐겠군요.
 
  『1960년대 말부터 10년간은 잘됐죠. 미국 가발 시장은 유대인들이 좌지우지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경쟁자가 없으니까 높은 가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가발 수출기업이 가발 1개당 1.9달러를 받고 수출하면, 미국에서 약 60달러씩 받고 파는 겁니다.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겠어요.
 
  그래서 한국 이민자 1세대들이 가발 시장에 뛰어들었죠. 당시 이민 1세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대부분 세탁소에서 일하거나 허드렛일을 했는데, 가발 장사에 눈을 돌렸어요. 별 다른 노하우 없이 몸으로 때우면 되니까, 죄다 몰려가서 가발 파는 일에 매달린 거예요. 뉴욕 대도시 거리 노점상부터 시작해서 작은 점포까지 한국인들이 전부 몰려들었죠.
 
  유대인이 25달러에 팔 때 우리는 20달러에 팔고, 20달러에 팔면 15달러에 팔고, 하니 시장이 엉망이 되는 거예요. 다 덤핑이 돼가지고. 당연히 가발 수출기업이나, 무역기업들은 수지가 안 맞았죠. 1977년부터 미방은 가발업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서 국제상사의 가발사업 위탁 경영
 
  형의 회사인 미방은 가발 수출업에서 철수했지만, 그는 회사를 나와 독자적으로 가발 수출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국제상사가 鄭회장에게 가발 수출 업무를 대행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국제상사가 가발 공장을 하나 인수해서 미국에 수출했는데, 장사가 안 돼서 고민이었어요. 내가 가발업계에 전문가로 알려져 있어서 나한테 해결해 달라고 하더군요. 오케이 했죠』
 
  ―원래 하던 일이라 맡으셨나요.
 
  『그렇죠. 자신도 있고 해서 승낙했죠. 은행에 돈이 물려 있어서, 1년 내에 갚아야 된다고 하더군요. 국제상사가 가지고 있는 미국內 유통망을 8개월 동안 찾아다녔어요. 全미국을 거의 다 돌아다녔죠. 애틀랜타, 미시간, 필라델피아, 오하이오, 세인트루이스…. 몇십만 km는 다녔을 겁니다.
 
  일대일로 도매상들과 부딪혀 가며 차에서 자고 햄버거 먹으면서 버텼죠. 다른 가발 수출업자들이 덤핑으로 치고 나오면, 나는 값을 더욱 낮춰서 밀어 냈어요.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8개월 만에 재고 물량을 다 팔았어요. 나중에 계산해 보니 180만 달러 정도 받았더라고요. 100만 달러를 은행에 갚고, 80만 달러 남은 것은 국제상사와 반반씩 나눠 가졌죠』
 
  국제상사의 가발 수출 사업을 대행해 주면서, 鄭鎭哲 회장은 가발사업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 지난 10년간의 경험에 8개월 동안 미국 전역의 가발 도매상을 자신의 고객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1979년 그는 아내와 세 살, 한 살짜리 두 아들을 데리고 미국 LA로 이민을 떠났다. 방 세 개짜리 집 한 채를 사고 가발무역 회사를 차리고 나자, 그의 수중에 남은 돈은 1만5000달러였다. 회사는 차렸지만, 물건을 살 자금이 없었다.
 
 
  『제가 담보입니다』
 
鄭鎭哲 회장이 미국 전역으로 팔려나갈 가발 제품을 쳐다보고 있다.

  『당시 외환은행 LA 현지법인 홍성목 행장을 찾아갔어요. 외환은행 2代 행장이 된 양반이에요. 내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하자, 홍성목 행장은 「담보를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집이 1만5000달러밖에 안 됐는데 그것도 담보가액을 반으로 깎아요. 그럼 7500달러인데, 10만 달러를 빌려야 했어요. 그래서 「제가 담보입니다」 했죠. 「돈 떼먹은 적 없고, 장사 경력이 10년 넘었습니다」 했어요.
 
  홍성목 행장이 저를 물끄러미 보더니 「생각해 보자」고 해서, 이후 몇 번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당신 말이야 인상 때문에 덕 보는 줄 알아. 5만 달러만 줄게」 그러더군요』
 
  어렵게 5만 달러를 대출받았지만, 자금은 충분하지 않았다. 물건을 팔아서 받은 돈으로 다시 물건을 사야 하는 어려움이 계속됐다. 게다가 물건을 한국에 주문해서 되팔아 돈을 받을 때까지 3개월이 넘게 걸렸다. 주문은 몰려드는데 팔 물건이 없는 일이 벌어졌다. 鄭鎭哲 회장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제때 물건을 공급 해 주지 못하면 고객들이 금방 떨어져 나갑니다. 수십만 마일을 돌아다니면서 확보한 고객들인데, 안달이 났습니다. 그래서 서울로 날아갔어요. 10년 동안 가발 수출을 했으니 친한 가발생산 회사들이 많았어요.
 
  그 사람들에게 「외상으로 물건을 달라」 하니까, 안 주더라고요. 서울에 있을 때나 「미방의 鄭鎭哲」이지, 미국에 가서 뭘 하는지 확실하지 않은데 물건을 선뜻 주겠습니까.
 
  그래도 내가 신용을 쌓아 놔서 세 군데 업체에서 외상으로 10만 달러어치 물건을 주더군요. 기존에 외환은행에서 받은 5만 달러를 합쳐서 15만 달러로 겨우 자금을 회전시켜서 장사를 했습니다』
 
  鄭鎭哲 회장이 처음 미국에서 가발무역을 했을 무렵, 이민 온 한국 사람들의 절반 정도가 직·간접적으로 가발업에 종사했다.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이제 막 업계에 뛰어든 鄭회장은 苦戰(고전)을 면치 못했다. 5년 동안 20만 달러 적자가 났다. 鄭회장에게는 벅찬 돈이었다. 그의 회사를 감사하는 미국인 회계사는 그에게 『자본금 20만 달러를 가져올 동업자를 구하지 않으면 회사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경고했다.
 
  『그때 엄청 위기를 느꼈어요. 잘못 되면 마누라, 자식 데리고 어떻게 살겠어요. 회사 문 닫으면 직원들은 젊으니까 갈 곳이 있잖아요. 내 나이에 누가 취직시켜 주겠어요.
 
  내가 망하면 갈 데가 없으니까, 동업자를 구했어요. 그런데 구해지지 않는 거예요. 누가 망해 가는 회사와 동업하겠어요. 결국 중앙高 동창들한테 가서 「2만 달러만 꿔 다오. 은행 이자로 쳐 줄게」 이러면서 돈을 빌렸죠. 두어 놈한테 5만 달러를 꿨어요. 2만 달러, 1만 달러, 2만 달러, 이렇게 5만 달러 메워 놓고, 죽기살기로 뛰었습니다.
 
  조물주가 기회를 양쪽으로 주는 것 같아요. 성공하는 기회 50%, 망하는 기회 50%.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 5년 동안 망하는 기회를 주더니, 열심히 뛰니까 성공하는 기회를 주더군요. 갑자기 기회가 왔어요』
 
 
  준비하고 기다린 자에게 온 기회
 
  가발은 인조 가발과 사람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한국 가발업체들은 당시 대부분 인조 가발을 취급했다. 머리카락 가발은 가격이 비쌀 뿐만 아니라, 「위생상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미국 소비자들 사이에 퍼져 있어서 잘 안 팔렸다. 鄭鎭哲 회장은 한국 업체들 가운데 처음으로 머리카락 가발을 시작했다. 鄭회장이 초반 5년을 고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1986년에 접어들면서, 미국 소비자들이 인조 가발 대신 점점 머리카락 가발을 찾기 시작했다. 인조 가발은 불에 약해서 파마하기가 어렵지만, 머리카락 가발은 타지 않고 수명이 오래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술이 발달하면서 위생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졌다. 1987년 봄부터 미국에서는 머리카락 가발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가발 물량은 우리가 독점하고 있었어요. 소비자들이 머리카락 가발만 찾기 시작하더군요. 이른바 대박이 난 겁니다. 이 커다란 미국 시장에 가발을 갖다 놓으면 바로 없어졌어요』
 
 
  머리카락 가발, 부르는 게 값
 
鄭鎭哲 회장의 가족 사진. 鄭회장 부부는 이민 1세대로 갖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아들 두 명을 스탠포드大와 UCLA에 진학시켰다.

  ―어느 정도 대박이었습니까.
 
  『부르는 게 값이었죠. 10달러에 사면 30달러, 15달러에 사면 35달러 그렇게 높은 가격에 파는 거예요』
 
  ―재무제표상으로 어느 정도 버셨습니까.
 
  『1년 만에 부실의 거의 반 이상 막았어요. 그 다음해에는 순이익이 100만 달러 단위로 올라갔어요. 「돈을 가마니로 번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렇게 벌었다니까. 그렇게 10년을 벌고 나니까요. 궤도에 오르더군요』
 
  ―인생의 기회였군요.
 
  『그렇죠(웃음). 그게 기회라는 겁니다.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느냐, 아니에요. 저는 5~6년 계속 기다렸잖아요. 준비된 사람에게만 기회가 오는 겁니다』
 
  ―머리카락 가발을 만들려면 사람 머리카락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할 텐데, 원재료는 어떻게 구합니까.
 
  『원료는 중국에서 나옵니다. 주로 중국 여성 머리카락을 사용하지요. 인구가 14억 명 정도니까, 여자가 반이라고 치면 7억 명이잖아요. 15세 미만, 60세 이상을 빼도 중간에 한 3억 명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머리카락 잘라서 팔았어요. 隔世之感(격세지감)이죠.
 
  중국인 원모 수입업자들이 머리털을 모아서 공장에 팝니다. 1980년대에는 kg당 50달러, 지금은 150달러까지 올랐습니다』
 
  오전 9시에 시작한 인터뷰가 어느새 점심시간까지 이어졌다. 鄭鎭哲 회장은 낮 12시가 넘어서자, 점심식사를 하자며 회사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는 특별한 날이 아니면 거의 회사 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1층에 있는 식당에는 회사 직원들이 한창 점심식사 중이었다.
 
  미국에서 30년간 회사를 운영했지만, 그는 한국인이었다. 멕시코인과 미국인 직원이 있고, 미국인 바이어들이 자주 들르는 그의 회사지만, 식단은 완전히 한국식이었다. 이날은 콩밥에 진한 된장찌개, 생선구이, 불고기가 나왔다. 배추김치, 장아찌, 나물 등의 밑반찬이 곁들여졌다. 鄭회장을 만나러 오기 전, 일주일간의 멕시코 출장이 있었던 터라 가정식 韓食(한식)이 무척 반가웠다. 허겁지겁 밥 한 그릇을 다 비운 나에게 鄭회장은 몇 번이나 밥을 더 권했다.
 
  식사를 마친 鄭회장과 나는 소화도 시킬 겸, 회사와 붙어 있는 물류창고를 다시 찾았다. 그는 미국 전역으로 팔려 나갈 가발 제품들을 다 키운 자식 바라보듯 쳐다봤다.
 
 
  정직하고 공정한 사회
 
  ―30년 전에 와서 회사를 이만큼 키우셨는데 잘 키운 자식과 회사 중 뭐가 더 자랑스럽습니까.
 
  『당연히 자식 잘 키운 게 더 좋지. 이건 자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家和萬事成(가화만사성)이라고, 우선 뭐 때문에 살겠어요. 돈 벌려고 사는 건 아니잖아요. 가족이 평화롭고, 가족이 잘되기 위해 기업하고 돈 버는 거죠. 돈은 불편하지 않을 정도면 돼요. 그게 사람이에요』
 
  鄭鎭哲 회장은 두 아들을 회사만큼 튼실하게 키웠다. 미국에 건너올 때 세 살이었던 큰아들은 스탠포드大(경제학 전공)를 졸업하고 하버드大에서 MBA를 마쳤다. 다국적 기업에서 마케팅 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둘째는 UCLA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뜻한 바가 있어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목사 수업을 받고 있다.
 
  ―미국에서 자식들을 키워 보니 한국과 다른 점이 있던가요.
 
  『일반화할 수 없지만, 미국화한 사람들은 상당히 예의 바르고 정직해요. 최강대국 미국의 장점이 나오는 것이죠.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한국식으로 교육받아서 여기에 오면 백이면 백 다 질 겁니다. 이길 수 없어요. 왜? 정직하니까요. 한국 애들은 머리가 좋고, 엄청난 경쟁사회이다 보니, 회전이 빠르잖아요. 여기 애들은 그에 비하면 조금 느리고 둔하지만 정정당당해요.
 
  예를 들면 우리 큰아이가 고등학교 전체 학생회장을, 둘째가 반장을 했어요. 둘째 아이가 대학교 원서 쓸 때 「너도 전교 학생회장 했다고 써라」 했더니 「아빠, 회장 안 한 걸 했다고 하라는 거야」 하고 반발하더군요. 여기선 경력을 따로 조회 안 해요. 그래서 나는 한국식으로 「무슨 얘기하는 거야, 남들이 모르니까 그냥 쓰라」고 했다가 아주 크게 망신당했어요』
 
  ―미국이 기회의 나라이고 우리나라보다 더 공정하지만,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미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면서 차별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흑인들도 일단 한국 사람을 무시해요. 하지만 비즈니스에선 좀 덜해요. 저널리즘, 공무원, 교육 쪽에서는 아무래도 차별당하지만, 비즈니스에선 목적이 이윤 창출이고 좋은 물건을 보내면 좋아하기 때문에, 인종차별을 많이 못 느낍니다.
 
  백인을 상대했으면 차별받는다고 많이 느꼈을 텐데, 다행히 흑인을 상대해서 덜 느낀 편이에요. 우리나라도 그렇잖아요. 미국인들이 차별한다고 해도 우리나라가 외국인들 차별하는 것만 못해요. 저 질긴 화교들이 한국에서는 뿌리를 못 내리잖습니까. 미국은 그렇지는 않아요. 미국에는 각종 인종들이 다 모이니까 뭔가 장벽이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공하는 데 심각한 정도는 아니에요』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교포들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우선 흑인들이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흑인 사회가 아니었으면, 이만큼 잘살 수 없어요. 같은 소수민족끼지 과소평가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더불어 살아야 해요.
 
  흑인 커뮤니티에 기부를 하고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백인사회, 메인스트림에 同化(동화)돼야 하고 저변을 넓혀야 합니다. 2세, 3세들이 오로지 변호사·의사만 해서는 안 돼요. 정치인이 많이 나와야 하고, 특히 방송·언론인들이 많아야 합니다. 이들이 한국 커뮤니티를 미국 메인스트림에 잘 알려 줘야 합니다』
 
 
  권병현 대사와 의기투합
 
  鄭鎭哲 회장의 사무실에서 오후 1시부터 다시 인터뷰를 시작했다. 오전에 그의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오후에는 그가 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 상인들의 代父가 된 사연을 들어봤다. 그는 『대부는 무슨 대부냐』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2002년 시작된 세계韓商대회는 6회를 맞았다. 2007년 10월31일 부산에서 6회대회가 열렸다.
 
  鄭鎭哲 회장이 「세계韓商대회」를 만들게 된 계기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1990년 華商대회를 시작해서 2년에 한 번씩 세계華商대회를 열고 있다. 鄭회장은 華商대회를 두려움 반 부러움 반으로 쳐다봤다. 그러다 우리 韓商도 모이자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全세계 華商들이 모이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韓商대회를 만들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2001년 LA에서 무역협회 대회가 열렸어요. 재외동포재단의 두 번째 이사장인 권병현 대사가 중국을 3년 동안 다니면서 華商대회를 본 거예요.
 
  이 양반이 「華商에 대해서 좀 아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안다고 하니, 「우리도 韓商대회를 만드는 것이 어떤가」 제의를 하더군요. 「좋습니다」 했죠. 저도 華商대회를 보면서 「우리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내가 당시 회장으로 있던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회원들에게 의견을 구했어요』
 
  鄭鎭哲 회장의 생각과 달리 회원들은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세계韓商대회를 열면, 자신들이 1981년부터 만든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라는 브랜드가 없어질 것을 우려했다. 몇몇 회원들은 『조국이 뭘 해줬다고 우리가 희생을 해야 하느냐』고 했다.
 
  그는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그는 몇몇 간부들과 「독단적」으로 세계韓商대회 개최를 주도했다.
 
 
  한국기업과 韓商들의 윈윈 게임
 
2006년 부산에서 열린 제5차 세계韓商대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는 鄭鎭哲 회장.

  『韓商대회에 무역협회원들이 빠지면 「앙꼬」(팥소) 없는 찐빵입니다. 말 그대로 韓商대회인데 상인이 빠져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대승적으로 생각하고 제가 표결에 안 붙이고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의 韓商대회 참여를 결정했습니다. 처음에는 욕을 많이 먹었어요(웃음)』
 
  우여곡절 끝에 2002년 서울 롯데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첫 세계韓商대회를 열었다. 鄭鎭哲 회장이 제1회 대회장을 맡았다. 대회를 주도해야 하는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회원들의 참여와 홍보 부족으로 첫 대회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회원이 全세계 48개 나라, 95개 도시, 회원 6000명인데 첫 대회 때 800명밖에 안 왔습니다. 華商대회는 무역인뿐만 아니라, 자장면집 주인, 주유소 주인 등이 모두 모이는데, 우리는 참여가 부족했어요. 실망하지 않고, 우리 무역인·기업인·정치인·교포 사회에 세계韓商대회의 필요성을 알렸죠.
 
  2차 대회를 거쳐, 3차 제주대회 때부터 참여 회원들이 늘더니 2006년 부산에서 열린 5차 대회 때는 2500명이 참석했습니다』
 
  ―세계韓商대회의 목적은 뭡니까.
 
  『장사하는 사람들이 아무 소득 없이 만나겠습니까. 초기에는 우선 서로를 알고 유대를 맺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점차 본국의 기업과 全세계 무역인들이 서로 「윈-윈」해서 돈을 벌자는 것이죠. 한국 기업들의 목적은 수출이잖아요. 우리는 수출을 연결시켜 줄 네트워크가 있습니다. 몇몇 거대 기업은 자체적으로 수출 판로를 만들 수 있지만, 한국 기업의 90%는 자체적으로 판로를 만들지 못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하겠다는 것이죠.
 
  한국의 좋은 기업들과 만나서, 좋은 제품을 우리 인맥으로 파는 것이죠. 중소기업부터 지자체의 농수산물까지 우리를 통하면 수출이 가능하지요. 그래서 지난 3차 대회부터 서서히 MOU(양해각서)를 맺어서 향후 사업을 함께 하자고 합의한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5차 대회까지 회장을 맡으셨습니다.
 
  『예, 연속 5년을 하다 보니 너무 힘들어서 이번에는 재일상공회의소 최종태 회장에게 회장직을 맡아 달라고 했습니다. 대회 개최가 너무 힘들어요. 우선 경제적으로 빠듯합니다. 2006년 대회 전체 예산이 약 30억원이 들었어요. 약 2500명이 모여서 먹고 자면 하루 저녁에 밥값만 10만 달러가 넘게 들어요. 이걸 대회장이 맡아서 해결해 줘야 합니다. 회원들은 등록비 300달러를 내는데 그걸로 호텔비와 식사비를 모두 해결해야 하니 모자라는 부분은 회장이 채워야죠.
 
  각 지역 상인회장, 부회장들에게 5만 달러씩 받고, 무역협회·중소기업중앙회에서 찬조를 받았죠. 1차, 2차 대회 때는 李明博(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에게 부탁하니까 흔쾌히 지원해 주더군요. 본인이 기업가 출신이라서 우리들 입장을 잘 알더군요』
 
  ―세계華商대회는 어떻게 운영됩니까.
 
  『중국 정부에서 모두 부담합니다. 상인들이 자기 돈은 안 써도 돼요. 벌써 15~16년 돼 갑니다. 거기를 보면 리딩CEO포럼이라는 걸 만들어 놨습니다. 35명 정도 들어가 있는데, 최고 華商들이 수뇌부로 들어가서 정부와 함께 대회를 운영하죠. 우리는 안 돼요. 일본의 손정의 회장, 롯데 신격호 회장 등을 초청했는데 답장조차 없어요. 그런 분들이 정부와 주도적으로 韓商대회를 이끌어 줘야 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鄧小平의 혜안
 
  ―정부에 바라는 점이 많습니까.
 
  『우리야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으면서 기업을 해왔기 때문에 정부든 정치인이든 누구에게 징징대지는 않아요.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지식인들이 중국의 사례를 눈여겨봤으면 합니다.
 
  全세계에서 연 10% 이상 성장하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어요. 어떻게 할 수 있느냐. 우리 朴正熙(박정희) 前 대통령 같은 걸출한 지도자인 鄧小平(등소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을 살렸어요. 이분이 「중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화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鄧小平이 「화교들을 모아라. 화교 상권을 만들자」고 한 겁니다. 華商대회는 이분이 만든 겁니다.
 
  鄧小平은 엄청난 인센티브를 華商에게 줬습니다. 대신 투자만 하라는 것이죠. 이익에 밝은 화교들이 왜 투자를 안 하겠어요. 우리 교포도 마찬가지예요. 「1000억 달러 투자하면 2000억 달러 만들어 줄게」 하면 왜 안 하겠어요. 중국은 세제혜택, 자녀 교육, 대학교 입학 등 여러 혜택을 줬어요.
 
  그러니까 화교 자본이 1년에 5000억 달러씩 중국에 들어간 거예요. 외국자본의 75%가 화교 자본이에요. 미국·독일·일본이 투자한 게 25%고. 엄청난 외자 유치를 했는데 어떻게 발전 안 하겠어요. 지금도 연 10%씩 성장합니다. 그런 나라가 全세계에 없어요. 그게 화교 자본 때문입니다』
 
  그는 정체된 한국 경제의 활로는 중국처럼 해외에 있는 韓商들의 투자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朴正熙가 한국을 살렸다』
 
  『미국·중국에 200만 명, 일본에 70만 명, 舊소련에 40만 명 등 해외에 약 650만 명의 韓人동포가 있습니다. 이들이 만든 기업이 한국에 끊임없이 아이디어와 활력을 줄 수 있습니다. 본국의 대기업과 정부, 지자체들은 해외동포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이런 원론적인 얘기만 언제까지 해서는 경쟁에서 뒤처집니다.
 
  중국은 1인당 GDP가 600달러일 때부터 華商들을 활용했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중국에 완전히 당할 겁니다』
 
  그는 나라 발전에 지도자의 역할이 왜 중요한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은 鄧小平이 살렸다면, 한국은 朴正熙 대통령이 살렸습니다. 朴대통령이 1960년대에 고속도로를 만들기 위해 독일로 차관을 받으려고 갔어요. 그때 외화를 벌기 위해 우리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독일에 많이 갔는데, 朴正熙 대통령을 보고 다들 눈물을 흘렸어요.
 
  朴대통령은 독일 대통령 앞에서 그들의 손을 잡으면서 울고, 독일 대통령과 함께 차에 타서도 연신 울었습니다. 70代의 독일 뤼브케 대통령이 울고 있는 朴대통령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봐 젊은 대통령, 내가 차관해 줄 테니 꼭 당신 나라를 잘살게 하라」고 했어요. 이만한 애국자가 어디 있습니까.
 
  대통령이면 강한 나라에 가서 울더라도 실속을 얻어 와야 하는 겁니다. 큰 소리 치고 시끄럽게 군다고 1원 하나 나옵니까. 朴대통령이 잘 못한 부분도 있지요. 하지만 민주주의를 이제 막 시작한 나라가 서구 국가들처럼 민주주의 다 하면 발전을 못 해요. 회사도 처음에는 독재로 하고 사장이 밀어붙여야 발전이 됩니다.
 
  세종대왕, 이순신 다음으로 훌륭한 지도자가 朴正熙 대통령 아닙니까. 젊은 세대들이 지난 시절의 過(과)만 지나치게 부각시키지 말고, 이런 지도자들의 功(공)을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야 어느 조직이든 발전할 수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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