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Travel)이야기들/재밋는 유럽여행

산티아고,세상의 끝에 서서 외치다 "카르페 디엠!"

향기男 피스톨金 2006. 1. 16. 15:33

 

 

  산티아고,

 

세상의 끝에 서서 외치다 "카르페 디엠!"

▲ 오늘, 길의 끝으로 가고 있는 내 마음도 저 하늘처럼 맑고 푸르다.
ⓒ2005 김남희


2005년 8월 2일 화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장 본 비용 2.81 + 1.21 + 숙박 3 = 7.02유로
오늘 걸은 길 : 산티아고(Santiago) - 네그레이라(Negreira) 20km


눈을 뜨니 6시 50분. 서둘러 짐을 꾸리고 있으려니 나오코도 눈을 뜬다. 나를 끌어안고

 작별 인사를 하던 나오코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운다. 그리고 내게

편지를 건네준다.

 
▲ 알베르게의 정원에서 한 순례자 가족이 하루를 정리하며 쉬고 있다.
ⓒ2005 김남희

"안녕, 남희. 좋은 아침이야.

오늘 기분이 어떠니? 그동안 네가

해준 모든 것에 대해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고,

 

나와 함께 걸어주고, 나와 함께 밥을

 먹어주고, 언제나 좋은 정보들을

나눠준 그 많은 일들에 대해! 나에게

 있어 네가 없는 카미노는 상상할

수가 없어. 이 길 위에서 너는 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었어.

 

정말 정말 너를 무척 그리워하게

될 거야.

하지만 더 아름다운 것들을 보기

위해, 너처럼 좋은 사람들을

또 만나기 위해 나도 내 길을

가야겠지. 부디 몸조심하기를

 

바라. 그리고 너무 지치도록

걷지는 마. 언젠가, 어디에선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사랑을 담아 나오코"

엽서 한 장 쓰지 못한 나는 작은

기념품만 선물로 건네며 "편지

쓸게"라고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짐을 맡기고 숙소를

나서니 7시 반.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지팡이를 짚은 순례자가 산티아고

 광장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인다.

저절로 그에게 미소가 지어졌다.

 저이도 내가 겪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게 될까.

산티아고를 빠져나오니 참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유칼립투스와 참나무가 빽빽한

좁은 흙길. 길이 마음에 든다. 뒤이어 나타난 순례자들의 수다가 귀에 걸려

그들을 먼저 보내고 떨어져 걷는다. 오랜만에 사람들과 떨어져 걷고 있으니

참 좋다.

산티아고에 도착했으니 순례는 끝이 난 셈인데 이렇게 다시 걷는 이유는 '세상의 끝'에

 가기 위해서이다. 대부분 순례자들은 산티아고에서 순례의 끝을 맺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일부는 다시 90km를 걸어 피네스테레(Finesterre)로 향한다. 피네스테레는

그 옛날 로마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던 곳이다.

 

순례자들은 그곳 세상의 끝에서 그동안 신고 온 신발을 태운다고 했다.

나는 지금 길의 끝으로 가고 있다.





11시 반. 폰테 마세이라(Ponte Maceira) 마을 통과. 어여쁜 마을이다. 뒤로는 숲에,

앞으로는 강에 둘러싸여 있고 집들은 주홍색 기와를 얹었다. 마을로 진입하는

돌다리는 14세기에 지어졌다. 그림 속 풍경 같은 마을이라 돌다리 위에 멈춰 서서

한참을 눈을 두었다.

 

▲ 춤추는 발레리나

같이 생긴 꽃

ⓒ2005 김남희

길을 걷는 내내 기분이 복잡한 기분이 나를 휘감고 있다. 산티아고에 도착해 사흘을 머문 후 다시 걷는다는 게 낯설기도 하고, 다시 걸을 수 있어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사흘만 걸으면 끝난다는 생각에 안도가 되기도 하고…. 분명한 건 오늘 걷는 길이 무척 아름다운 길이라는 거다. 급하지 않은 오르막과 내리막, 계속 이어지는 숲길… 압도하지 않는 풍경이 눈과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12시 반. 마침내 오늘의 목적지인 네그레이라(Negreira) 마을이다. 여기 알베르게에는 2층 침대가 아닌 싱글 침대가 각 방에 8개씩, 딱 16개 침대뿐이다. 훌륭한 시설에 박수를 보내고, 마지막 남은 신라면을 끓여 저녁으로 먹었다. 한동안 매운 맛을 잊었던 혀가 놀라고 있다.

숙소에서 로만을 만났다. 쥬느비에브 없이 혼자 걷는 그를 보니 조금은 쓸쓸해 보인다. "혼자 걸으니 외롭니?"라고 물으니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그녀가 몹시 그립지

 

만, 어차피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거였으니까." "지금 주느비에브는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을 거야"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로만.

프랑스의 르푸이에서부터 1500km를 걸어온 로만.

그 길의 대부분을 쥬느비에브와 함께 했으니 산티아고를 떠올릴 때면 그녀의 얼굴도 함께 따라오겠지. 이제 변호사

 

가 아닌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로만. 그토록 원하는 영적인 삶의 길을 그가 끝까지 걸어갈 수 있기를.

2005년 8월 3일 수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차 1.1 + 숙박 3 = 4.1유로
오늘 걸은 길 : 네그레이라(Negreira) - 올베이로아(Olveriroa) 34km


알람 없이도 5시에 절로 눈이 떠졌다. 차와 함께 바게트에 치즈를 얹어서 아침 먹고, 천천히 숙소를 나선다. 6시 반인데도 숲은 아직 어둡다. 무서움을 달래며 걷는다. 도로로 나와 잠시 걷다가 다시 숲으로 들어선다. 다시 그 숲을

빠져나오니 아 페나(A pena) 마을.

▲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길안내를 담당했던 조개껍질이 박힌 표지석
ⓒ2005 김남희

정오 무렵이면 도착하겠거니 싶어 휴식도 없이 계속 걸었는데,

2시 30분에야 올베이로아 마을에 도착했다. 다 같이 모여 호스피탈레로가 요리한

수프와 빵, 과일을 나누는 저녁 식탁에서 왜 그렇게 갑자기 외로워졌을까? 가족,

친구들과 나누던 따뜻한 밥 한 끼가 눈물나도록 그리웠다. 아, 이제는 정말 집에

가고 싶다.

마을에서 케이트와 코엔을 만났다. 함께 펍으로 가 차를 마셨다. 코엔은 12살 때

카미노에 관해 들은 이후 늘 이 길을 걷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거나, 혹은 여자친구의 만류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늘 이렇게 말을 하곤 했다. "나를 두고 혼자서 몇 달씩 떠날 수는 없어.

나중에 나와 함께 같이 가." 그렇게 이십 년이 흘러갔다. 이제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어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케이트를 만났다.

케이트는 대학에서 불어와 스페인어를 전공했다. 어느날 수트케이스 하나에

다 들어가는 짐을 꾸려 스페인 남부로 건너가 살았다. 배낭 하나만 들고 떠나

낯선 곳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은 그녀를 매혹했다.

몇 년 후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아무도 그녀가 겪은 일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다음에 스페인에 돌아갈 때는 걸어서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케이트와 코엔은 만났고, 바로 집 현관문을 나서서 걷기 시작했다.

지난 110일간, 지도에도 없는 길을 만들어가며, 3000km를 걸어왔다.

 

길의 끝에 설 일만을 남겨둔 지금, 여기까지 온 게 꿈처럼 아득하다는 두 사람.

남은 생을 가는 동안 뒤돌아 볼 아름다운 추억을 함께 만든 두 사람이 부럽다.

▲ 폰테 마세이라 마을
ⓒ2005 김남희


2005년 8월 4일 목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차 1.25 + 빵 1.25 + 차 0.9 + 숙박 3 + 저녁 16.4 +팁

0.8 = 23.6유로
오늘 걸은 길 : 올베리오아(Olberioa) - 피네스테레(Finesterre) 30km + 등대

왕복 6km = 36km

딱딱한 빵에 치즈를 얹어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선다. 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길을

 잘못 든 것 같다. 계속 도로를 따라가는 수밖에. 오스피탈 마을의 바에서 뜨거운

핫초콜릿을 마시며 몸을 녹인다. 바람이 얼마나 거세게 부는지 손끝이 시리다.

두 시간쯤 걸었을 무렵, 고개에서 바다가, 피네스테레가, 길의 끝이, 세상의 끝이

보였다. 맞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는 길. 키 낮은 잡목과 풀들이 듬성한 초원을

걸으며 세상의 끝과 끝까지 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바다가

내 안 가득 다가와 안기는 길. 길은 아름답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피네스테레로 가는 바닷가 풍경
ⓒ2005 김남희

숲을 빠져나와 이제는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길. 더위를 참지

못해 카페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쉰다. 해수욕하는 사람들의 팔자가 부럽다.

나도 내일이면 이 고생도 끝이란다. 혼자 중얼거리며 걷는다.

3시. 피네스테레에 들어섰다.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 등대(El faros)에 왔다.

 길의 끝이자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진정한 끝. 한때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던 곳.

▲ 세상의 끝에서 해지는 모습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순례자들
ⓒ2005 김남희

산티아고에 사흘을 머문 후 다시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짚고,

사흘간 90km를 걸어 이곳에 섰다. 바닷가 절벽 위에 하얀 등대가 서 있는 곳.

이곳에서 순례자들은 긴 순례의 끝을 마감하며 신고 온 신발을 태우곤 했다.

 

▲ 이제 길은 끝나고 새로운

삶의 순례가 시작된다.

ⓒ2005 김남희
결국 이렇게 걸어서 또 다른 길의 끝에 다다른 건가. 이렇게 내 삶의 또 한 막이 내려진다. 내일부터는 다시 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디선가 어떤 순례자가 태우는 신발의 고무 냄새가 짠 내음에 묻어 실려 오고 있다.

절벽에서 바다로 지는 해를 바라봤다. 바다는 잔잔하고, 검푸르고, 수평선은 가없이 아득하다. 하루를 영원처럼 마감하는 붉은 해를 바라보며 지금까지 온 길을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길이었고, 그 길 위에서 길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났다.

지금 내 가슴 속에 일렁이는 파도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표현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럴 때 언어는 속수무책이다. 나는 지금 가득 차 있고, 텅 비어 있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 더 이상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내 생을 사랑하고, 그 생에 감사한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을 즐겨라)

2005년 8월 5일 금요일 맑음

한 때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던 곳에 왔다.
'끝'과 '끝까지 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다


- 알베르게에 남긴 글

▲ 알베르게의 방명록에 한 순례자가 길 위에서 만난 다른 순례자들의

그림을 그려놓았다(왼쪽). 순례자들이 알베르게에 남겨 놓고 간

지팡이들(오른쪽).

ⓒ2005 김남희


 



덧붙이는 글


기자소개 : '이렇게 죽을 수도, 이렇게 살 수도 없는 나이' 서른넷에 방 빼고,

적금 깨 배낭을 꾸렸다. 인생의 전반전 마흔까지는 유목민으로 살겠다며

낯선 길 위에서 헤매고 있다. '진심으로 지극한 것들은 다른 길을 걷더라도

같은 길에서 만나게 되는 법'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인연에 매이지 않는

 

법을 배우는 중. 아직도 격문에 고양되는 나이인지라 요즘의 좌우명은

폴 엘뤼아르의 '실수에 살고, 향기에 살고'이다. 인디언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는 모진 꿈을 꾸며, 버리지 못한 것들로 가득 찬 배낭을

짊어지고 오늘도 끙끙거리며 길 위에 서있다.

 

 www.skywaywalker.com을 집주소로 쓴다.

- ⓒ 2005 오마이뉴스, -

***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다지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