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의 눈은 하늘로 내린다. 땅을 향해 억세게 쏟아지는 눈이 아니라 공중을 부유하다 조용히 쌓여가는 솜털 같은 눈이다. 바람과 습기가 적기 때문일까. 추위 가운덴 옷깃을 맴돌다 부서지는 포근한 추위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삿포로의 눈은 홋카이도가 홀로 여행하는 곳이 아니란 사실을 가슴 저리게 알려줬다. 얼음 도시의 일루미네이션(조명등) 속을 흩날리는 눈과 눈길의 뽀득임이, 삿포로의 추위를 몽땅 내 마음속에 불어넣을 줄은 정말 몰랐다.
이래서 도쿄의 지인(知人)이 “홋카이도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지 않으면… 아이징(愛人·애인)이 아니면 ‘모토아이징(元愛人·아내)’이라도”하고 혀를 찼었나. 어렴풋이 뜻을 느끼겠다.
하지만 외로움에 익숙한 한국 아저씨에겐 살 추위든 맘 추위든 방어책은 비슷하다. 일단 뜨끈하고 매운 국물을 먹는 것이다. 역을 나서자마자 라면집 ‘아지노 산페이(味の三平)’를 향했다.
20여분 눈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Central’이라고 쓰인 작은 백화점 빌딩 4층. 오후 2시30분이었는데도 30여명이 줄을 섰다. “미소(된장 라면)로 할까? 가라이(매운 라면)로 할까?” 고민을 덜어 주려는 듯 뚱보 주인이 주문을 받았다. “뭘로 하시겠어요?”
“가라이!” 된장라면에 고추가루와 참기름을 ‘+a’한 것이다. 값은 둘다 850엔. 다시 뚱보 주인의 질문. “매움에 3단계가 있는데요?” “제일 매운 걸로 해주세요.” 하지만 국물 한 모금에 곧장 후회했다.
고추와 참기름이 미소 베이스를 완전히 압도. 그래, 이건 짬뽕이다. 이곳은 57년 전통을 가진, 삿포로에서 제일 유명한, 삿포로를 상징하는 미소라면의 발상지다.
여기서 한국발 매운 맛 붐에 편승한 졸작을 선택하다니…. 흐르는 땀에 맘
추위는 사라졌지만, 귀중한 한끼를 망첬다는 망연자실함이 더 큰 고통일 줄이야.
북쪽 홋카이도는 남쪽 규슈와 더불어 일본 라면문화를 대표한다.
삿포로 외에도 하코다테의 시오(소금)라면, 아사히카와의 돈코츠(돼지뼈)라면, 구시로의 가쓰오(가다랑어)라면 등. 하지만 라면을 먹으러 홋카이도 전체를 누비긴 힘들지 않냐고?
삿포로역 인근 ‘비쿠카메라’ 건물 10층에 위치한 ‘삿포로 라면공화국’에 가면 된다. 홋카이도 라면을 대부분 맛볼 수 있다.
적극 권장하는 라면은 하코다테 유명 라면 가게 ‘아지사이(あじさい)’의
시오라면(650엔). 맑은 소금국이 목젖을 감싼다. 매우 은은하게, 조금 짜릿하게.
라면 한 그릇이 모자란 듯 싶으면, 같은 층 회전 초밥집
‘돗피(とっぴ-)’에서 ‘다라바가니(홋카이도산 왕게) 스시’와 ‘이와시(정어리) 스시’를 먹어볼 것. 고급 어종이 아닌 ‘이와시’를 추천한 것은
어마어마한 생선 크기에 홋카이도의 여유를 번쩍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산페이지루(三平汁)’를 곁들이면 베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