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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②전쟁속에서도 문명과 예술 간직한 도시들

향기男 피스톨金 2006. 2. 18. 00:53

 

 

                     크로아티아

 

②전쟁속에서도 문명과 예술 간직한 도시들

 

 

크로아티아는 긴 역사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문명의 상징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로마가 살아 숨쉬는 도시 ‘스플릿’과 독일군도 찾지 못한 ‘자다르’의 보물들을 만나면 두근거리는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우리에게 아직은 낯선 나라 크로아티아. 그곳의 이름 높은 도시들을 만나본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지상 낙원 ‘두브로닉’

 

1991년 유고 연방이 해체되면서 ‘유럽의 화약고’로 불리던 발칸반도가 다시 전쟁에 휩싸였다. 3년 동안 30만 명이 죽어간 전쟁 통에 아드리아해 연안의 한 도시가 세르비아 연합군으로부터 폭격을 받았다.

 

이에 놀란 세계 각국의 지성인들은 범선을 띄우고 시위를 벌였다. 장도르 메송 프랑스 학술원장은 “유럽문명과 예술의 상징이 불타고 있는데도 유럽선진국들은 팔짱만 끼고 있다”며 “비록 총알받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 도시를 지켜야 한다”고 세계에 외쳤다.

 

이 도시가 바로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닉이다. 크로아티아(Croatia)는 한국인 여행자에겐 아직도 생소하다. 크로아티아가 신흥 축구 강호로 떠오르면서 나라 이름은 익숙해졌지만 여행지로 크로아티아를 찾는 사람은 아직도 드물다.

 

유고연방에 묶여 있던 91년까지는 공산권국가라 함부로 여행할 수도 없었고,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뒤에는 세르비아의 공격을 받아 94년까지 치열한 내전을 치렀다. 하지만 전쟁 전엔 유럽에선 이름난 관광지였다.

 

휴양도시 두브로닉은 연간 1백만 명이 다녀갔으며 항구도시인 스플릿과 자다르도 로마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보통사람들은 크로아티아란 나라가 어디쯤 있는지도 잘 모를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아드리아해를 건너면 크로아티아다. 마치 집게처럼 생겼다.

 

아드리아 해변에 놓인 1,500km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끝머리에 두브로닉이 앉아 있다. 2000년 처음 두브로닉을 찾았을 때의 감동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밤길을 달려 한밤중에 도착한 고성. 성곽은 희미한 가로등에도 눈처럼 하얗고, 그 너머 붉은 지붕이 빼곡히 차 있었다. 한밤중에 행여 성문이나 열었을까? 산책이나 할 겸 성을 찾았다.

 

꽃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붙었다는 플로체 게이트. 돌다리를 건너 성 안에 들어갔을 땐 깜짝 놀랐다.

 

대단치 않은 ‘못난이 귀족’의 빛바랜 초상화나 걸려 있고, 곰팡이 냄새가 깊이 스며든 ‘박제된 박물관’이겠거니 생각했던 고성에 대한 선입견은 완전히 깨졌다.

 

중세 건축물들이 늘어선 거리 한가운데에 밤늦도록 연인들이 웃음과 맥주, 그리고 키스를 나누는 노천카페가 늘어서 있었다.

 

노천카페에 앉아 마시는 쌉싸래한 토속 맥주 ‘오즈예스코’ 한잔. 어린아이의 살결만큼이나 부드러운 바람도 여행객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뒷골목에서 들려오는 퍼쿠션과 첼로, 기타 소리에 이끌려 ‘트루바도’라는 대성당 뒤의 작은 카페를 찾았더니 보스니아 청년이 한국인을 처음 만났다며 담배를 권했다. 이곳에 동양인이라고는 일본인들이 1년에 2,000명 정도 올 뿐이라고 했다.

 

두브로닉은 내 심장을 펄떡펄떡 뛰게 했다. 거긴 처음 도시가 세워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었다.

 

둘레가 2km 정도. 성내의 주민은 4,000여 명. 중심가인 스트라툰에는 베네치아 시대에 지어졌다는 네오고딕 양식의 학교, 베네치아 스타일의 수도원, 바로크 시대의 대성당….

 

모든 건물마다 세월의 깊이가 새겨져 있다. 뒷골목에는 자그마한 식당가와 영국식 펍이 있고, 성벽 쪽으로는 서민들의 집이 있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 공존한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지상 낙원을 찾으려거든 두브로닉으로 가라”고 했을 정도. 1950년대에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자본주의의 때가 묻지 않은 순박한 사람들

 

두브로닉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7세기. 바로 고갯길 하나 너머쯤에 옛도시가 있었는데 슬라브족이 침입하자 이곳으로 피난해 터를 잡았다.

 

훈족의 침입으로 피난처를 찾아 수상도시를 만들었던 베네치아와 닮은꼴이다. 성곽이 제 모습을 갖춘 것은 베네치아 시대인 13세기쯤이다.

 

두브로닉의 역사는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다. 고대에는 그리스에 이어 로마제국, 중세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식민지였다. 나폴레옹 점령시대를 거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정치가들은 뛰어난 처세술로 주변의 강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유지했다. 전쟁보다는 협상을 통해 실리를 챙겼을 정도로 합리적이었던 이들은 베네치아 시대엔 부패를 없애기 위해 통치자를 성에 가뒀다.

 

통치권자의 임기는 고작 한 달이었다. 지금도 2층에는 집무실, 1층에는 감옥이었던 통치자의 초라한 공관이 남아 있다.

 

시계탑은 지금도 정시마다 울리는데 3분 뒤에 다시 한 번 울린다. ‘기다리는 것도 3분뿐’이라는 베네치아 타임이라고 한다.

 

성곽에 오르면 아드리아해와 성내의 건축물이 한눈에 보인다. 성곽을 한 번 둘러보는 데 꼬박 1시간이 걸린다. 벽은 허름하지만 지붕은 붉은색이다.

 

30년 관광 가이드를 했다는 블랑코가 붉은 지붕에 얽힌 사연을 들려줬다. 크로아티아는 유고연방이 깨진 뒤 1990년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1991년부터 2년 동안 세르비아인들이 침공을 해왔다. 일종의 종교전쟁. 이곳은 지중해와 아드리아해가 만나는 요충지인데다가 인접국가들의 종교가 저마다 다르다.

 

두브로닉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교도인데 세르비아인은 세르비아 정교도, 보스니아는 회교도와 가톨릭교도가 섞여 있다.

 

보스니아는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다. 가이드 블랑코는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못마땅하게 여긴 세르비아의 공격으로 어린아이를 포함해 270명이 죽었으며 크로아티아 전체로는 30만 명이나 희생됐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292m의 두브로닉 고성 메인거리 스트라툰에만 49개의 포탄이 떨어졌다고 한다. 파편을 맞지 않은 집이 없었을 정도. 원래 지붕은 노란 색과 빛바랜 붉은색이었는데 모두 새로 보수를 해서 붉은 지붕이 됐다.

 

서유럽에서는 꽤 이름난 관광지이지만 아직도 자본주의의 때가 묻지 않아 사람들은 너무나 순박하다. 식사 때마다 허브를 넣어 만든 브랜디를 내놓는다.

 

이 브랜디는 전쟁 통에 남편이 죽은 과부들이 만드는 것이란다. 대성당 앞 광장 노천시장에는 말린 무화과나 야채를 팔러 나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뒷골목 이발소엔 텁수룩한 수염의 이발사가 깨진 유리창을 테이프로 붙여놓은 채 졸고 있을 정도로 여유롭다. 두브로닉에 가면 언제나 살아 있는 역사를 만난다. 이미 수백 년 동안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이니까.

 

 

 

 

로마의 역사가 숨쉬는 도시 ‘스플릿’

 

 

두브로닉이 베네치아 시대의 도시라면 스플릿은 로마제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도시다. 처음 스플릿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부둣가 상가의 허름한 벽이 1,700년 전 성곽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백열등이 깜빡거리는 어두운 지하실 같은 입구. 빛이 보이는 계단을 오르니 그곳에 고도가 숨어 있다.

 

이 고성은 AD 4세기에 로마황제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11년 동안 은거하다가 AD 360년에 숨진 곳이다.

 

1,700년 동안 내려온 로마황제의 별궁. 스플릿은 아드리아해 한가운데 있어 로마와 교류하기도 쉬운 곳이었다. 성곽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너른 광장을 제외하고 골목길의 벽에 새로 집을 지은 것은 두브로닉과 똑같다.

 

 스플릿성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180m인 정사각형이다. 성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8각형 모양의 옥타고나와 종탑이 눈에 들어온다. 옥타고나 앞에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스핑크스가 서 있다.

 

옥타고나는 지금 교회로 변했지만 예전엔 황제가 거처하는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그 안에 들어서면 황후인 프리스카의 얼굴이 기둥 위에 새겨져 있다. 기둥의 높이는 20m나 된다.

 

황제는 죽어서 그곳에 묻혔다. 그는 로마황제 중에서 가장 심하게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황제였다. 그를 이어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수백여 명의 성인들이 그에 의해 처형됐다.

 

그가 죽고 난 뒤 순교자들도 다시 교회로 옮겨져 황제와 함께 묻혔다니 아이러니컬하다.

 

 

옥타고나는 지금도 스플릿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인 성소이다. 91년 내전이 발발하자 교황이 두 번이나 이 곳에 와서 ‘인종전쟁’을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니 그럴 만도 하다.

 

 성의 윤곽을 보려면 종탑에 오르면 된다. 종탑은 모두 183계단. 60m 높이다.

 

종탑에 오르면 4각형의 성을 빼곡하게 메운 서민주택을 볼 수 있다. 지금도 성에는 3,000여 명이 살고 있다.

 

사람들은 로마제국 당시에 만든 석관을 상수도로 사용하고 있다. 반대쪽은 로마황제가 태양신 제우스에게 제사를 드렸던 곳이다.

 

후대에는 세례의식을 거행하는 기독교의 성소로 바뀌었지만 옛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다. 벽면에는 태양의 얼굴 같은 모양을 한 조각품 카세타가 새겨져 있다.

 

이탈리아의 패션 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의 문양과도 비슷하다. 가이드는 베르사체가 이곳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뒤쪽으로는 골든게이트.

 

19세기말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유명했던 조각가 이반 매스트로비치가 조각한 작품이 성문 밖에 서 있다. 골목길마다 분위기 있는 카페가 숨어 있다.

 

스플릿에서 관광객을 놀라게 하는 것은 바로 선남선녀들이다. 전 세계에서 패션모델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도시 중 하나다. 밤에 카페거리에 나가보면 여자는 최소 170cm이상, 남자는 190cm 이상이다.

 

 

독일군도 찾지 못한 ‘자다르’의 보물들

 

 

자다르 역시 성곽도시. 옛날 모습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성 안에는 수백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성당이나 수도원이 흩어져 있다. 자다르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첫 번째 유적은 바로 로마포럼.

 

자다르 한가운데 있던 로마포럼은 지금은 흩어진 벽돌조각만 뒹군다. 한때 발굴을 시작했다가 워낙 유적의 규모가 커서 다시 덮었다고 한다. 대신 그 흔적은 또렷하다.

 

사람들이 모여앉아 토론을 벌였음직한 광장의 끝에는 제우스상을 비롯해 로마인들이 모셨던 3명의 신상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가축을 잡아 제단에 올렸다고 한다.

 

그 건너편에는 베네딕트 수도원이 있다. 수녀들만 거처하는 이 수도원에는 중세의 성물들이 가득하다. 가장 독특한 것은 성자들의 유골을 수습해 금관에 보관한 ‘렐리쿼리’. 불교로 따지면 사리함이라고 보면 된다.

 

정교한 단장을 한 이사도라 성녀의 손뼈를 담은 렐리쿼리를 보면 세심한 장식에 감탄스러울 정도다.

 

이바나 수녀는 “원래 이곳은 2차대전 중 독일군들이 머물렀던 사령부로 한때 이런 보물들을 찾기 위해 건물을 샅샅이 뒤졌지만 1층과 지하 사이의 틈새에 당시의 유물을 25년 동안이나 숨겨놓은 덕택에 지금까지 보존됐다”고 말했다.

 

자다르는 중세에는 로마교황청에서 직접 관장했던 중요한 도시였다. 자다르라는 말은 ‘신의 선물로 드린다’는 뜻. 그래서 거리에는 10개의 교회(church)와 1개의 대성당(cathedral)이 있다. 세르비아 정교회의 교회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로마 가톨릭의 성당이다.

 

거리는 크게 십자로로 나뉘어 있다. 야데르와 카르툼. 야데르는 바다와 평행을 이루는 길. 이 길은 가장 번화한 곳으로 유명한 쇼핑상가와 커피숍들이 몰려 있다.

 

끝머리에 귀족들의 거리인 칼데라 로다 광장이 보인다. 이곳을 돌아서면 서민들을 위한 노천 시장이 나타난다. 카르툼은 로마광장 옆으로 뻗은 수직 통로. 자다르로 들어오는 길목이다.

 

자다르는 크로아티아 최초의 대학이 생겼던 대학도시로 언제나 젊은이들로 북적거린다.

 

 

수도 ‘자그레브’와 살아 있는 호수를 품은 ‘플리트비츠’

 

수도 자그레브는 유럽의 고도와 비슷하다. 원래 발칸은 유럽에서 아시아로 넘어가는 길목 중 하나. 때문에 전쟁이 많았다.

 

러시아, 터키,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등 수많은 나라가 영토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현대에 와선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도 탐을 냈다. 자그레브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 가장 유명한 명소는 자그레브 성당. 성당 주변에는 재래시장이 선다.

 

구시가지에는 크고 작은 고택들이 몰려 있다.

살아 있는 호수로 유명한 플리트비츠는 16개의 호수로 이뤄져 있다. 계단식 논밭처럼 이뤄져 한눈에 16개의 호수가 다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플리트비츠의 차고 맑은 물은 잉크를 탄 듯한 푸른빛이 인상적이다. 갑자기 송어 등의 물고기가 불쑥불쑥 튀어올라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낚시를 할 수 없는 지역이라 물고기가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 마치 잘 키워놓은 비단잉어 같다.

 

플리트비츠에 흐르는 물은 석회물이다. 원래는 강줄기였는데 석회가 쌓여서 둑이 생기자 호수로 변했다.

 

이 둑이 1년에 1~3cm씩 자란다고 한다. 수만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였던 호수가 16개로 많아진 것도 이 때문이다. 호수의 끝자락에는 폭포가 쏟아진다. 폭포의 높이는 161m. 장관이다.

 

 

▶여행 길잡이

 

 

크로아티아는 영어로 크로에이시아다. 관광지는 수도 자그레브보다 아드리아해를 따라 이어져 있다. 가장 유명한 곳이 관광객들은 대부분 유럽인이다.

 

헤르바츠쿠라는 독립언어를 쓰며 유명한 관광지에선 영어도 통용된다. 기온은 겨울철이 평균 9도 정도. 여름은 25도의 지중해성기후이다. 자그레브에서는 유로화도 통용되지만 대부분 현지 화폐인 쿠나를 쓸 수 있다. 현지 호텔에서 대부분 달러를 환전해준다.

 

물가는 한국보다 조금 싸다. 크로아티아에는 직항편이 없다. 보통 프랑크푸르트에서 다시 자그레브행 비행기를 타고 간 뒤 자그레브에서 두브로닉까지는 항공편이나 버스를 이용한다.

 

1 스플릿 고성 종탑에서 내려다본 시내

2 고갯길에서 내려다본 두브로닉 성곽

3 옥타고나 종탑사이로 보이는 아드리아해

4 자다르의 로마유적

5 수도 자그레브

6 전쟁 희생자를 위해 세워놓은 기념탑

7 크로아티아 민속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공연하는 모습

8 두브로닉 성곽

9 크로아티아의 특산품인 면사포를 제작하는 모습

글·사진 / 최병준 기자(경향신문 매거진 X부)

 

[레이디경향 2006-02-16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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