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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이동진의 세계 영화기행, 글루미 선데이

향기男 피스톨金 2006. 2. 23. 20:59

                       헝가리

 

            이동진의 세계 영화기행

 

                  글루미 선데이


산책로 벽엔 "원숭이는 자유롭다. 당신은?" 낙서가…
 

[조선일보 이동진 기자]

 

부다페스트의 겨울은 맑고도 스산했다. 매서운 날씨가 이어졌는데도 이상하게 늦가을의 공기가 서려 있었다. 역사적 건물이 많은 서쪽 부다와 신시가지가 펼쳐진 동쪽 페스트 지역으로 나뉘는 이 천년고도(千年古都) 한가운데로 두나강(헝가리에서 다뉴브강을 부르는 이름)이 흘렀다.

 

이 강을 무대로 한 유장하고 낭만적인 영화가 있었지. ‘우울한 일요일’을 뜻하는 ‘글루미 선데이’의 부제는 ‘사랑과 죽음의 노래’였다. ‘사랑’과 ‘죽음’과 ‘노래’. 음울하면서 감상적인 멜로 영화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 사랑


 

바티아니 광장 근처 기오르스코시 거리가 이소콜라 거리로 이어지는 삼거리 한쪽엔 아담한 2층 카페 건물이 있다. 카페를 사이에 둔 양측엔 각각 10층 남짓한 건물 두 동이 힘겨루기를 하는 듯 마주 서 있다.

 

연인 일로나의 맘 속에 안드라스가 새로 자리잡기 시작하자 사보는 이 카페 앞에서 두 남자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청한 뒤 돌아서서 걷는다. 안드라스가 반대쪽 길로 사라진 직후였다.

 

곧 그녀가 따라오리라 믿었지만, 사보는 결국 그 길을 혼자 가야 했다. 남자는 어떤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한 그녀와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아니면 행복이 무의미해질 때가 있다.

삼거리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그날 홀로 걸었던 사람의 길이었다. 이소콜라 거리를 남쪽으로 걸으니 프랭클린 거리가 나왔다. 일로나가 안드라스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날 사보는 말한다.

 

“전부 잃느니 한 부분이라도 갖겠어.”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독점하지 않고 사랑하는 기묘한 3각 관계는 프랭클린 밤거리 계단을 오르내리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어졌다. 부다 지구엔 계단 길이 적잖았지만, 프랭클린 거리의 긴 계단은 특히 아름다웠다.

극중 등장하는 대표적 쇼핑가 안드라시 거리를 걷다 서점에 들러 달력을 샀다. 2005년 10월부터 12월까지 세 장이 더 붙어 있었다. 석 달 전 이 달력을 구입했던 사람은 90일을 흘려보내고도 새삼 찾아온 새해 첫달에 다시 맘을 다잡고 새출발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 석 달을 떠나보내고서야 달력을 산 나는 어떨까. 시간을 바꿀 수 없을 때 비로소 여행이 소중해진다. 여행을 통해 공간을 바꾸고서야 새로운 순간을 맞이할 수 있으니까.


 


▶ 죽음


 

삶에서 기둥 줄거리를 짜주는 것은 열정이다. 구체적이고 지루한 전개 과정쯤은 관성과 습관이 알아서 채워준다. 한바탕 열정이 끓어넘친 뒤 사라진 안드라스를 찾아 일로나가 자전거로 누볐던 두나강변은 한산했다.

 

국회의사당이 마주 보이는 산책로에서 영어로 크게 쓰인 “원숭이는 자유롭다. 당신은?”이란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골목길을 누비며 모두들 곡예 운전을 하는 부다페스트의 택시 운전사에게 그 글귀는 어떻게 비쳤을까. 여행을 하면서도 내내 서둘렀던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페스트 지역 동쪽 국립묘지는 안드라스 장례식이 열린 곳이다.

극중 안드라스 묘지가 있었던 곳 바로 옆의 돌무덤 회랑에는 관을 덮은 육중한 석재 뚜껑들이 사열받듯 늘어서 있었다. 무덤을 봉인하면 시간 역시 봉인된다. 전력으로 질주하던 저마다의 시간이 우뚝 멈춰선 곳에서, 겨울바람이 불어와 묵은 낙엽들을 비석 주위로 흩날릴 때 마음은 가라앉았다.


 

얼마 전 떨어진 나뭇잎의 시체가 오래 전 묻힌 인간의 시신 위로 위무하듯 떠다니는 풍경이라니.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이 회랑 옆을 거닐며 독일 장교 한스는 사보에게 탈출시켜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한다. 돈은 수렁에서 벗어날 날개 값을 흥정할 때 가장 더럽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기억할 세체니 다리를 걸어서 네 번 건넜다. 으르렁대는 듯 우는 듯 기묘한 표정의 돌사자상이 입구를 지키는 이 아름다운 다리는 극중 항상 죽음의 모티브와 연결되어 있었다.

 

2차대전이 터지기 전 순진했던 한스는 일로나에게 청혼을 한 뒤 거절당하자 여기서 투신했다 구출되고, 안드라스는 자신이 작곡한 노래 때문에 자살한 사람들을 떠올린 뒤 망연자실 강을 내려다보다 ‘유혹’을 느낀다. 인생에서 한 페이지를 찢어내지 못해 괴로워할 때 어떤 사람들은 책 전체를 불 속에 던지고 싶어한다.

 

차도와 보도가 철저히 분리된 세체니 다리는 걸어서 건널 때 자연스레 그 아래 강을 쳐다보게 한다. 세상과 벽을 쌓고 다리를 건너는 사람에겐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이 갑자기 말 걸어오는 순간이 찾아온다.


 

♬ 노래


 

‘글루미 선데이’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사보가 일로나와 함께 운영하고 안드라스가 피아니스트로 일하는 레스토랑이었다. 세트에서 촬영한 이 레스토랑의 모델은 영웅 광장 인근에 있는 유럽 굴지의 레스토랑 ‘군델’이었다.


 


헝가리를 떠나기 전날 군델에 전화해 저녁 자리를 예약했다. 여행 중이라 정장이 없다고 했더니 빌려준단다. 아직 이른 저녁 시간에 헐렁한 양복을 빌려 입은 채 텅 빈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들의 극진한 시중을 받아가며 영어 안내가 거의 없는 메뉴판을 혼자 뒤적이고 있자니 바늘방석이 따로 없었다.


 

네 가지 와인이 여섯 가지 음식에 딸려 나오는 11만원짜리 ‘가장 저렴한 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사슴고기 햄 요리를 입에 넣고 나니 그제서야 여유가 생겼다.

 

군델은 실내 구조에서 인테리어 색조까지 사보의 레스토랑과 흡사했다. 5인조 악단이 쇼팽과 요한 슈트라우스를 우아하게 연주하는 동안에도 옆자리 미국인 커플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내내 밀어를 주고받았다.

훌륭한 음식과 와인이었다. 그래도 뭔가 부족했다. 디저트를 기다릴 때 바이올리니스트가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며 즉흥 연주를 시작했다. 손을 살짝 들었다. 그가 다가왔다.

 

‘글루미 선데이’를 청했다. 미소를 지은 그가 활을 들었다. 나머지 주자들도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키 작고 머리 벗겨진 늙은 악사가 빤히 바라보며 연주하는 게 민망해 눈을 내리깔았더니 마법이 시작됐다.

 

세 사람을 집어삼킨 영화 속 비극이 추억의 순간들을 빠르게 이어붙이는 장면들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곡조는 여전히 음울했지만 화려한 연주 때문인지 슬프다기보단 달콤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비록 일요일이 우울할지라도 그것은 이틀이나 지난 뒤의 일이다.

 

음악이 흘러가고 침묵이 남았다. 방금 들은 곡은 분명 부다페스트의 선물이었다. 그리고 음악 뒤에 이어진 이 감미로운 침묵 역시 부다페스트의 선물일 것이다.

 

 

(이동진기자 [ djlee.chosun.com])


[조선일보 2006-01-18 09:30]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다지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