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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이동진의 세계영화기행, 쉰들러리스트

향기男 피스톨金 2006. 2. 23. 21:04

 

                      폴란드

 

             이동진의 세계영화기행 

 

                  쉰들러리스트


아우슈비츠 수용소 철문엔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나치의 글귀가 그대로
 

[조선일보 이동진 기자]

 

비극의 도시는 고요했다. ‘쉰들러 리스트’의 자취를 좇는 폴란드 천년고도(千年古都) 크라쿠프 여행은 곳곳에 안개처럼 서린 슬픔을 촉감으로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중세 도시 위엄을 그대로 간직한 크라쿠프는 무심한 세월의 힘을 빌어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사건의 여진에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다. 슬픔에도 면역이 필요했다.

 

영화 진행 순서 그대로 참극의 전조(前兆)를 확인하는 데서 시작해 마지막에 집단 수용소의 학살 현장을 방문하는 게 충격을 줄일 방법이었다.

먼저 크라쿠프 기차역에 갔다. 영화 도입부에서 독일군 명령으로 각지에서 옮겨온 유태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곳이다.

 

미래에 닥칠 참변을 미처 감지하지 못한 그들이 줄 서서 ‘등록’하던 플랫폼의 눈(雪)에 젖은 바닥은 긴 꼬리를 남기는 석양에 피빛으로 물들어 번들거렸다.

 

간간이 기차가 도착할 때만 잠시 붐볐을 뿐, 플랫폼을 내내 지배한 것은 정적이었다. 일부러 다가가 말을 걸어도 폴란드인들은 한결같이 과묵했다. 침묵은 크라쿠프가 슬픔을 간직해온 방식이었다.

역의 지하도에는 헌책방 수십개가 자리잡고 있었다.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두드러지게 놓였는가 하면, 체 게바라 전기와 악명 높은 성애 소설 ‘O의 이야기’가 나란히 전시되어 있기도 했다.

 

오래된 혁명의 누린내와 낡은 성애의 비린내가 빛바랜 책의 곰팡내에 섞여 기묘한 냄새를 빚었다. 크라쿠프에서는 시간도 냄새를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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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둘러본 구시가지에는 1차 세계대전 이전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간밤에 새로 내린 눈으로 시 전체가 아름다웠다. 잠시 들른 여행객은 예쁜 설경에 잠시 가슴 설레면 그만이었지만,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눈 치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른 폴란드 도시들과 달리 크라쿠프는 기적적으로 2차 세계대전의 전화(戰禍)를 입지 않았다. 유구한 도시는 아무런 외상을 입지 않았는데 그곳에 잠시 머물렀던 사람들은 몰사했다니.

 

유태인 대학살을 목도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하던 건물들이 그 모든 인간사의 어리석은 참극을 다 보고나서도 묵묵히 버티고 서서 또다른 사람들 삶의 터전이 되고 있었다. 세월이 비극을 치장하는 도구는 역설이었다.


유태인들이 모여 살았던 크라쿠프 남쪽 게토 지역은 을씨년스러웠다. 스필버그가 유태인 추방 장면을 찍은 요제파 거리의 건물 벽은 검게 그을린 채 ‘빌어먹을 경찰’ 같은 스프레이 낙서가 쓰여 있었다.

 

영화 속 집단거주지에서 강제수용소로 옮겨지기 직전 유태인들이 모여있던 즈고디 광장 한가운데에는 일인용 나무 의자들 수십개가 도열하듯 줄 맞춰 전시되어 있었다. 죽음을 향해 유태인들이 떠나간 광장을 의자로 채운 아이디어는 누구의 것일까. 빈 의자만큼 참극을 웅변할 수 있는 오브제(objet)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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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명의 유태인을 고용함으로써 살려낸 쉰들러의 공장은 리포바 스트리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굳게 닫힌 철문 앞에서 서성대니 관리인이 나와서 영화 때문에 왔냐고 물었다.

 

내부를 보고 싶다고 부탁했더니 선뜻 안내를 해줬다. 내부 수리중인 공장 건물 2층의 쉰들러 집무실은 생각보다 작았다. 쉰들러 이름이 적힌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문자들이 각국어로 소감을 남긴 두꺼운 비망록이 눈에 들어왔다. 뭐라고 쓸까 잠시 생각하다 아도르노의 문장 ‘전체는 거짓이다’를 적어 넣었다.

이제 남은 것은 독일어 아우슈비츠로도 불리는 도시 오시비엥침 여행 뿐이었다. 크라쿠프 서쪽으로 한 시간 쯤 차를 타고 갔다. 2차 대전 당시 오시비엥침에는 두 개의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가 있었는데, ‘쉰들러 리스트’ 후반은 비르케나우를 무대로 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철문에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란 나치의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 학살하기 전에 등뼈가 휘는 강제 노동을 시키고도 미사여구 명분까지 늘어놓고야 마는 미친 권력의 자기 확신에 분노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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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건물 전체를 박물관으로 바꾼 아우슈비츠 수용소보다 훨씬 더 비극을 실감시켰던 것은 비르케나우 수용소였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두 줄 철로가 ‘죽음의 문’으로 불렸던 정문 건물의 반원형 입구를 지나 안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눈으로 뒤덮인 황량한 벌판 한 가운데 버티고 서서 일직선 철로를 삼킨 채 입을 벌린 ‘죽음의 아가리’를 바라보자니 막막한 공포가 밀려왔다. 크라쿠프에서 실려온 유태인들이 저 문을 지날 때 느꼈을 절망의 부피가 시야를 짓눌렀다.

입구를 지나니 언덕 하나 없이 거대한 평지에 수없이 늘어선 막사와 굴뚝 터가 압도적이었다. ‘쉰들러 리스트’를 보면서 “왜 유태인들은 처형 순간을 아무 저항도 없이 순순히 맞았을까”

 

의문을 가졌던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그곳 비르케나우에는 주름 하나 없이 광막한 자신의 영토를 의기양양하게 내려다보았을 죽음의 눈 앞에서 희망이 숨쉴 장소는 없었다.


애초 52필의 말을 집어넣기 위해 만들었다는 막사마다 인간 400명이 수용됐다. 아무 전시물도 없는 막사들의 내부를 퀭한 눈으로 둘러보다가 구석에 놓인 꽃다발을 발견했다.

 

오시비엥침을 방문한 자는 누구나 증언해야 할 순간을 사명처럼 맞게 된다. 상념을 적어두려 필기구를 꺼냈지만 추위 때문에 글씨가 나오지 않았다. 어떤 느낌은 수첩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야 한다.

크라쿠프로 돌아오는 밤길에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도로가 얼어붙어 차가 끝없이 밀리는 가운데, 언덕 길에선 바퀴가 헛돌아 내려서 밀기까지 했다. 지루해진 운전사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선 오래된 팝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그 노래 중엔 핑크 플로이드의 처연한 곡 ‘Wish you were here’가 있었다. 당신이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 당신이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 슬픈 말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 입 밖으로 내뱉은 슬픔은 부메랑이 되어 더 큰 슬픔을 몰고 귀환한다. 요동치는 역사에서 안온한 현재로 귀환하는 길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크라쿠프[폴란드]=이동진기자 [ djlee.chosun.com])

 

[조선일보 2006-02-22 16:12]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다지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