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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新 실크로드를 가다] 8. 터키

향기男 피스톨金 2006. 3. 1. 23:57

 

             新 실크로드를 가다

 

                    8. 터키

터키의 상징인 아야 소피아 성당. 데오도시우스 황제때인 서기 415년 완공된 성당은 세계에서 4번째로 크다. 후대엔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으나 터키의 국부 케말 아타튀르크가 1934년 이슬람과 기독교문명의 공존을 위해 박물관으로 바꿨다.

터키는 역사와 문명이 압축된 땅이다. 히타이트, 프리지아, 우라티아, 리디아와 로마문명,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가 뿌리 내린 종교의 성지. 동양과 서양을 잇는 가교이자 문화의 교집합 지역.

 

그래서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옥외박물관’이라고 표현했다.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다리이기도 했다. 동·서양 문물 교류가 시작된 이후 실크로드 상인들이 서양으로 가려면 반드시 터키를 거쳐야 했다.

 

터키의 아시안하이웨이는 아그리~호라산~에르진잔~시바스~앙카라~볼루~이스탄불로 이어진다. 하이웨이 노선만 2,000㎞가 넘는다. 동부와 서부 아나톨리아 지역을 거치게 되는데 이 일대는 고대 상인들의 옛 실크로드와 비슷하다.

 

캐러밴은 아프간 협곡을 넘어서 터키로 진입하든지 아니면 카라코롬 산맥을 넘어 이란을 지나 터키땅으로 들어왔다.

 

요즘은 그 길을 따라 관광객들이 몰려다닌다. 사실 터키 실크로드의 역사를 따진다면 2,000년이 훌쩍 넘는다. 잘 포장된 도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옛상인들이 머물렀던 고도들이 제법 있다.

 

앙카라에서 3시간 거리인 샤프란 볼루. 실크로드 상인들이 머물던 마을이다. 샤프란은 꽃의 종류이다.

 

1,000개의 씨를 뿌렸을 경우 1개의 꽃이 필 정도로 재배하기 힘들지만 향료로서는 최고급품. 1g에 100달러를 호가한다. 보라색과 빨간색, 노란색 꽃은 염색약으로도 썼다.

 

샤프란을 재배하는 농부 후세인은 “아시안 하이웨이가 완전히 뚫리면 실크로드 시대처럼 앞으로 다시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수백년된 고택들이 모여 있는 볼루 시내는 1994년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실크로드 상인들이 묵었던 집은 겉모양은 유럽식인데 희한하게도 대문은 한국 전통의 문고리처럼 생겼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방들이 미로처럼 퍼져있는데 집주인은 상인들이 물건을 도둑맞지 않도록 일부러 복잡하게 설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인들이 머물던 집은 호텔로 바뀌었다.

하이웨이의 종착점인 이스탄불은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의 접합점이다. 유럽 지구는 3%, 나머지 97%는 아시아지구다.

 

이스탄불의 역사를 보면 동양과 서양을 결코 떼낼 수 없다. 323년부터 동로마제국의 수도, 1453년 비잔틴제국이 무너진후 콘스탄티노플이란 이름은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6세기에 이미 인구가 50만명, 9세기에는 1백만명이 넘었다. 지금은 1천2백만명. 수많은 문화유산이 있는 곳이다보니 관광객도 많다. 지난해 터키 관광객은 2천1백30만명이었다.

 

 


이스탄불은 이슬람 국가의 모습과는 딴판이다. 이란이나 아프간 같은 회교원리주의가 판치지 않는다. 거리에는 차도르를 쓴 여인부터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인까지 보인다.

 

현지인들은 이교도에 대한 관용의 역사는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터키가 일관되게 유지해온 정책이라고 자부심을 나타냈다.

 

“소피아 성당은 당시 유럽기독교의 심장이었죠. 정복자 메흐메드 2세는 성당을 파괴하지 않고 이슬람사원으로 바꿨습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그는 그저 하얀 천으로 벽화를 가렸을 뿐이죠.”

 

십자군 원정대가 콘스탄티노플에 들러 주민들을 학살했지만 이슬람은 오히려 성당을 보호했다니 아이로니컬하다. 실제로 이스탄불은 각종 종교의 성지다.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이 있으며 아르메니아교회도 남아 있다. 유태인도 많이 사는데 15세기 스페인 제국에 의해 쫓겨난 유태인까지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카파도키아 동굴도시. 기독교도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굴을 파고 성당과 수도원 등을 지었다.

동서양 문명이 만나는 곳이라 큰 시장이 발달했다. 대표적인 곳이 그랑바자르. 역사는 500년. 현재 무려 4,500개의 상점들이 몰려있는데 연간 방문자만 2억명이 넘는다고 한다.

 

‘지중해기행’을 쓴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콘스탄티노플에 가면 꼭 그랑바자르를 보고 와야 한다. 이 도시의 심장부가 거기 있다”고까지 했다. 보석가게, 골동품가게 등 독특한 상가가 많다.

 

수많은 상가 중에서도 바자르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것은 카펫 가게. 낡고 오래된 카펫이 더 비싸고 인기가 높았다. 최고급 헤레케 카펫은 1억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다. 어른 몸을 겨우 덮을 만한 카펫이 4천만~5천만원이나 한다.

 

요즘 터키 정부는 철의 실크로드로 불리는 철도로 아시아와 연결하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과거 동서양 가교역할을 하면서 국부를 쌓았던 터키는 아시안 하이웨이가 개통될 경우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다른 나라보다 확실히 알고 있는 것 같다.

 

〈최병준기자 bj@kyunghyang.com

 

 

실크로드 상인들이 묵었던 건축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볼루.

터키 먹자골목인 치체크 파사지. 오스만시대의 건물을 개조한 레스토랑이 많다.

 

                [新 실크로드를 가다]

 

      “혈맹 韓-터키 관광·투자 확대로 발전”

 

 

[경향신문 2006-03-01 18:21]    

“터키는 한국전에 참여했으며 많은 병사들이 희생을 치렀습니다. 이런 토대 위에 마련된 양국의 우호는 55년이 지난 지금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터키를 찾는 한국 여행객들이 급증하고 있죠.”

일한 오우즈 터키 문화관광부 동아시아 지역국장은 요즘처럼 양국 관계가 좋은 적이 없다고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붉은악마가 참전국 터키를 응원한 이후 한국을 친구 이상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2002년은 터키를 방문한 한국 여행자들이 급증했던 시기. 2001년 터키 방문객은 2만9천명에 불과했으나 2002년에는 4만1천명으로 뛰었다.

 

2003년엔 5만4백명, 2004년 5만6천명 정도로 주춤했다가, 2005년엔 9만명이나 방문했다. 일본 관광객이 11만명에 불과한 것에 감안하면 놀라운 수치다.

 

그는 올해부터 한국시장에 집중 투자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2001년 주 2회 인천~이스탄불 직항편이 생겼지만 지금도 항공편이 모자라는 편이다. 앞으로 대한항공, 터키항공, 아시아나 등과 협의, 항공편 수를 더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40만달러에 불과했던 한국에 대한 터키홍보 예산도 올해는 1백만달러로 늘리며 한국어 관광관련 책자도 17종이나 낸다. “터키와 한국은 같은 알타이언어권입니다.

 

아시아 대륙에 살던 터키 사람들은 서방의 끝까지 왔고, 한국은 동방의 끝까지 갔습니다. 기질도 서로 비슷합니다.”

 

그는 현재 많은 한국 기업들이 터키에 투자를 하고 있다며 앞으로 한국과 터키의 관계는 한국전쟁때보다 더 돈독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다지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