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Travel)이야기들/재밋는 동남아

캄보디아,앙코르행 비행기 무서운 아줌마들

향기男 피스톨金 2006. 3. 10. 23:43

 

                     캄보디아,

 

      앙코르행 비행기 무서운 아줌마들

 
▲ 오전 9시경 햇살을 등진 앙코르 와트의 자태
ⓒ2006 박경
앙코르를 향해

안개가 걷히는가 싶더니 다시 덮이고 있었다. 아침 9시에 이륙해야 할 비행기는 인천공항에 잔뜩 낀 안개 때문에 오전이 다 가도록 탑승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여행이 무산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울산에서 김포까지 비행기 값부터 시작해서, 앙코르 전세기를 예약하기까지 지난한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앙코르 와트에 가야지 하는 그 순간부터 고민은 시작되었다. 타이로 가서 육로를 통해 국경을 통과할 것인가, 시간을 아껴 시엠립 직항기를 탈 것인가. 서울까지 가서 비행기를 탈 것인가, 가까운 김해 공항에서 바로 탈 것인가. 패키지로 한번 가볼까, 아니 입맛에 딱 맞는 일정이 없으니 그냥 자유로 갈까…….

이래저래 재고 계산하는 사이 이미 항공편은 마감이 되어버렸다. 마음으로 이미 반은 떠나버린 여행, 흙을 덮고 다져 꾹꾹 눌러 놓았다.

1월이 다 갈 무렵 벌써 봄을 감지했는지, 이미 뿌려진 씨앗이 뽀록뽀록 싹을 틔워 힘차게 뚫고 올라오는데 감당할 길 없었다.

타이든 씨엠립이든 항공편을 대기예약해 놓고, 딸 봄방학에 맞추어 남편 휴가부터 잡아 놓았다.

어렵게 휴가를 잡아놓았는데, 항공권이 생길 기미가 없자 조바심이 났다.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동남아 전문 여행사에서 항공권과 숙소만 예약해주는 3박 5일짜리 자유여행 상품이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 여행기간이 너무 짧아 아쉬웠지만 예약했다.

룰루랄라 드디어 가는가 싶어 인터넷 뒤져 책 뒤져 일정 점검하고 툭툭 기사와 약속까지 잡아놓았는데, 어라? 이번엔 남편이 제동을 걸었다. 중요한 학회가 잡혀 도저히 빠질 수가 없단다.

얼러보고(당신도 지쳤다, 휴식이 필요하다) 달래보고(그 멋진 걸 어찌 나만 보냐) 협박도(가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보았지만, 결정적으로, 공부하겠다는 남편 앞길 막는 무식한 여편네가 될 수는 없어, 딸과 둘이서만 여행길에 올랐다.

그렇게 말은 씨가 되어 버렸다. 여행 가서까지 가족 뒤치다꺼리하기 싫다던 말. 커다란 슈트 케이스에 갈아입을 옷 잔뜩 우겨넣고 나서겠다고 지난번 여행기에서 외쳤던 말.

▲ 앙코르 와트의 해자
ⓒ2006 박경

아줌마가 무서운 이유

낮 1시가 되어 겨우 탑승을 했는데도 우리의 원동항공은 2시가 다 되도록 이륙하지 않았다. 새벽잠을 설쳤을 여행객들 모두 배가 고플 터였다. 탑승객은 거의 단체여행이었고 50대 아줌마들이 많았다. 아줌마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왜 안 뜨는 거야 다른 비행기는 다 떴구만, 다들 여행사에 전화해서 항의해, 오늘 하루 공쳤잖아, 이것들이 엉망이네, 말이 통해야 뭐라고 하지….'

좀 시끄럽다 싶다.

급기야 아줌마 하나, 지나가는 스튜어디스 옷자락을 붙들었다.

'아임 헝구리!' 나는 픽 웃음이 새나왔지만, 동료 아줌마들은 모두 진지한 얼굴로 대답을 종용하듯 스튜어디스를 올려다보았다(아줌마들의 놀라운 투쟁력!).

이후 아줌마들의 뻔뻔함(?)은 비행기 안에서 계속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살만 해진 아줌마들은 비행기 복도에 줄을 서서 뱃살운동 시범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소화를 시켜야 한답시고 양쪽 팔을 벌리고 서서 뱃살과 엉덩이를 밸리 댄스 추듯이 마구 떨어댔다(아줌마의 놀라운 적응력!).

이쯤 되니 솔직히 눈살이 찌푸려졌다. 비행기 전세 냈나 싶기도 하고. 하긴 성수기 때만 운행하는 앙코르 전세기이긴 하다.

아줌마들은 마침내 현지어까지 도전하기 시작했다. 여행사에서 나누어준 프린트물을 보면서, 크메르어를 요란스럽게 익히기 시작한다. 감사합니다-어꾼, 안녕하세요-수어 쓰데이, 괜찮습니다-엇 아이 떠, 얼마예요-틀라이 뽄 만, 깎아 주세요-크념 아잇 떠 틀라이 반 떼….

아무래도 다 외우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하나씩 나누어서 외우자는 요령을 제안하고 각자 맡은 한마디씩 열심히 외우기 시작했다(아줌마들의 무서운 조직력!).

이쯤 되니 아줌마들 제법이다 싶다. 몰려다니면서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한 사람씩 나서서 한마디씩 쓰면 현지인들에게 훨씬 친근하게 다가설 듯도 싶고.

그러던 아줌마들, 다른 팀 아줌마들과 교류까지 하게 된다. 서울 아줌마들과 청주 아줌마들은 몇 마디 주고받은 수다에, 다들 맏며느리들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더니 단박에 친구가 되어 다음 약속까지 잡는다. 두 달에 한 번씩 청주와 서울 번갈아 가며 만나자느니 하면서. 여기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놀라운 아줌마들의 친화력!

대만의 카오슝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시 기내식을 먹을 때에는, 한 사람 건너인 나한테까지 말을 걸어왔다. 언니, 먹어봐 칼칼해.

다져서 양념한 고추를 내게 내미는 것이었다. 나는 감사하게 받아 밥에 비벼 먹었다. 안 그래도 밍밍한 고기덮밥에 속이 안 좋았는데, 된장, 고추장에 버무린 맵싸한 고추 반찬이 아주 그만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이 아줌마들만 따라다니면 손해 볼 게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든 게. 왠지 든든한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단체 여행객인 아줌마들과는 앙코르에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잠시 다시 만날 뿐이었다.

앙코르 전세기에는 대부분 단체 여행객이었고, 아마도 개별 여행자는 나와 딸을 포함해 단 네 명뿐이었던 걸로 짐작한다. 사람들은 나와 내 딸을 볼 때마다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둘이서만 여행을 가느냐, 용감하다, 안 무섭냐는 둥….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 사람 사는 덴데 뭐가 무서워요.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줌마가 무서울 게 뭐 있나요!

▲ 앙코르 와트 앞의 연못
ⓒ2006 박경
[오마이뉴스 2006-03-10 15:14]    
[오마이뉴스 박경 기자]


덧붙이는 글
2006년 2월 21일부터 25일까지 3박 5일간 앙코르 와트 여행기입니다.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다지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