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들/재밋는 잡동사니

서동요,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는 역사만 애달퍼라!

향기男 피스톨金 2006. 3. 28. 22:31

 

        서동요,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는

 

                 역사만 애달퍼라!

 

 21세기 서동의 설화는 지난 21일 서동(백제 무왕)과 선화공주가 결혼하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습니다. 서동과 선화의 사랑에 많은 시청자들은 때로는 안도하고 때로는 안타까워하면서, 먼 역사의 뒤안길에 감추어져 있던 백제와 신라를 만났고 역사의 숨결을 고르며 함께 호흡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잊혀진 백제의 향기를 느끼는 즐거움에 푹 빠져 지난 일곱 달을 살았습니다.

아쉬움과 서운함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 주말(25일)에 <서동요> 오픈세트장을 찾았습니다. 드라마는 끝이 났지만 오픈세트장을 테마파크로 조성하여 야간 개장을 한다는 소문이 기자의 귀를 솔깃하게 했기 때문이지요.
 
역사가 숨쉬는 곳으로의 여행은 아이들과 부모세대를 연결해주는 귀한 경험이자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을 선사합니다. 그런 까닭에 촬영지로서의 볼거리는 여행지를 선택하는 데 그리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지요.

오픈세트장은 백제왕조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부여(사비성)에서도 궁벽한 시골인 충화면의 가화리 송정낚시터 주변에 세워져 있습니다. 약 4100평의 대지 위에 백제 왕궁과 신라왕궁, 태학사 식구들의 신라 피난처였던 하늘재 등으로 꾸며져 지난 날의 영화를 대변하기도,
 
 패망의 슬픈 역사에 눈물짓기도, 여전히 고단했던 지난 시대 민초들의 한숨 소리를 들려주는 듯 앉아 있답니다. 기자가 찾았던 날에는 패망의 한이 서러웠던지 황량한 바람이 궁궐의 처마 밑과 저자거리의 비좁은 흙길을 돌아 초가의 문풍지에서 오래도록 울고 있었습니다.

▲ 서동요 오픈세트장 전경
ⓒ2006 임흥재

▲ 저자거리 입구
ⓒ2006 임흥재
서동의 노래

주말을 맞아 제법 인파로 북적이는 입구를 지나면서 우리는 백제와 만나고 서동의 노래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서동요'는 삼국유사 백제무왕편에 나오는 설화에서 비롯된 4구체 향가입니다.
 
제가 중학시절 배웠던 기억으로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향가(아마 14수일 것입니다) 중 최초로 그 작자가 전해져 내려오는 향가입니다. 백제 무왕의 특이한 신분내력에 적국인 신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흔치 않은 사연을 노래는 들려줍니다.

善化公主主隱(선화 공주니믄) - 선화 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남 그스지 얼어두고) - 남몰래 (맛둥을)사귀어두고
薯童房乙(맛둥바을) - 맛둥 도령을
夜矣卯抱古去如(바매 몰 안고가다) - 밤에 몰래 만나러 간다네

양주동님이 해석한 '서동요'의 원문입니다. 맛둥(서동)은 백제말기 백제의 어느 고을에서 용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는 선화공주가 아름다운 재녀라는 소문을 듣고 몰래 신라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위의 노래를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는 것이지요. 마를 주고 재미난 노래까지 일러주는 그의 노래는 삽시간에 신라의 귀족과 왕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고 진노한 왕은 선화공주를 귀양보냅니다. 서동의 각본대로 일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귀양가는 불쌍한 선화를 위해 어머니(신라왕비)가 내어준 패물을 노린 도둑들은 귀양가는 선화공주를 약탈하려 합니다. 이때 서동은 정의의 사자처럼 등장하여 도둑을 물리치고 선화공주를 구합니다. 자신의 집으로 선화를 데리고 가는 도중에 서동은 고백합니다. 자신이 바로 그 음흉한 노래를 퍼뜨린 죄인인 것을요.

▲ 실루엣 처리되어 보이는 서동과 선화공주
ⓒ2006 임흥재
그러나 그것은 선화공주를 연모한 탓인 까닭에 선화공주는 그를 용서하고 마침내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그런 설화이지요.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은 서동은 그후로 학문과 무예를 갈고 닦는데 열심히 정진하고 인정을 베풀어 법왕이 죽자 백성들의 인심을 얻어 30대 무왕의 자리에 오른다는 참으로 신화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역사의 진실이야 어떠하든 <서동요>는 하나의 노래요 당대의 문학작품입니다. 스탕달이나 졸라의 소설에서 보이는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는 혁명적 상상력이 이미 삼국시대에 보인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선화공주는 (성골출신 왕으로서는 마지막 세대에 해당하는) 선덕여왕의 동생입니다. 골품제도에 의한 신분의 벽이 두텁게 존재했던 신라에서 당시에는 진골조차 감히 왕위를 꿈꿀 수 없었습니다.

진골인 김유신이 이미 김춘추의 아이를 밴 여동생을 시집보내기 위해 가짜 화형식을 치러야 했던 사연을 떠올려보면, 그 신분의 벽은 뛰어넘기 힘든 사회적 제약이었을 것입니다.
 
하물며 백제 평민 출신의 서동과 공주의 혼인이라니요?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니 신라왕이 아니라 백제왕에게 시집보내는 것으로 슬쩍 바꿔치기한 지은이의 의뭉스러움에 고소를 짓게 되는 것이지요.

서동이 용의 아들이라는 것 역시 문학적 상상력 안에서 현실의 신분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기제로 작용합니다. 거의 모든 설화와 신화가 탄생의 신비 혹은 신격화된 출신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현실을 뛰어넘기 위한 초월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거리와 주막과 궁궐세트를 지나 하늘재에 이르니 물가를 넘어 불어오는 바람이 바로 그 서동의 노래처럼 귓가를 간지럽힙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룻배의 돛에서는 서동과 선화의 사랑얘기가 흔들리며 춤을 추는 듯합니다.

▲ 왕궁의 후면, 신화들이 이동하던 장면에서 많이 본 곳
ⓒ2006 임흥재

▲ 태학사 전경
ⓒ2006 임흥재
격물치지 - 드라마 '서동요'의 아쉬움

<서동요>가 첫 전파를 타면서 제작진은 서동과 선화의 사랑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백제시대의 역사를 오늘에 재현하겠다는 당찬 의도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태학사를 비롯한 목라수 박사 기술공 '장'(곧 서동이자 무왕)의 설정은 바로 그런 제작의도가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통한 치국의 원리를 그림과 동시에 당시의 앞선 과학의 수준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었지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의도는 그리 성공한 것 같지 않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내내 아쉬웠던 부분이지요. 백제시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사라진 까닭으로 고증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 이해하면서도 온돌과 쌀농사 저수지의 축조 등으로 체면치례를 한 '백제신기'는 부족한 2%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격물치지. 대학에 나오는 격물, 치지,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8조목으로 된 내용 중 앞의 두 조목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 두 조목은 본래의 뜻이 밝혀지지 않아 후세 분분한 학설을 낳았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해석이 주자학파와 양명학파의 그것입니다.

주자는 '격을 이룬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앎에 이른다는 성즉리설(性卽理設)을 주장했고, 양명학파의 창시자인 왕양명은 사람의 참다운 양지(良知)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물욕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격을 물리친다'하여 심즉리설(心卽理設)의 입장에 섰습니다. 주자의 격물치지가 지식을 위주로 한데 반해 왕양명의 격물치지는 도덕적 실천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태학사의 가마터 촬영세트장
ⓒ2006 임흥재

▲ 실루엣으로 보이는 서동과 선화 공주의 연모
ⓒ2006 임흥재

▲ 실루엣으로 보이는 그림자, 아마 목라수 박사를 연모한 '모진' 기술사인 듯
ⓒ2006 임흥재
아마도 드라마 <서동요>의 격물치지는 주자의 격물치지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대상(物)에 대한 지식의 탐구나 기술의 개발은 곧 과학의 영역이요 이를 치세의 근간으로 삼고자 했던 백제인의 정신, 나아가서는 무왕의 선견과 명철한 정치를 강조하고자 애초부터 기획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늘재의 공방과 도자기를 굽는 가마터 등을 돌아보면서 내내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지는 세트장에는 조명이 하나 둘 불을 밝히며 궁궐을 중심으로 비추기 시작합니다.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서동과 선화의 방안에서는 사랑이 깊어갑니다. 외로운 밤을 밝혀야 하는 모진의 실루엣에서는 목라수를 향한 그녀의 절절한 사랑이 아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창호지문 밖으로 새어나오는 희미한 초가의 불빛은 불안한 민초들의 삶처럼 흔들립니다. '테마'와 야간개장을 내세웠던 소문과는 달리 너무나 초라한 볼거리에 부아가 치밀 법도 합니다. 멀리에서 오직 오픈세트장을 보러 왔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우여를 아시나요 - 갓개포구 우여축제

부여로의 여행을 계획하신다면 오픈세트장만이 역사의 숨결을 들려줄리 만무합니다. 부여시내에 자리한 국립부여박물관과 부소산성(옛 백제의 도읍성으로 삼천궁녀의 원혼이 깃든 낙화암이며 고란사 등이 있는)과 궁남지(여름에 피는 연꽃이 장관입니다),
 
구드레 조각공원과 백마강 유람선이 더욱 여러분을 백제의 역사 속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사비시대 이전의 도읍지였던 웅진(공주시) 또한 지척에서 여러분의 발길을 기다립니다.

부여의 구드레 조각공원 앞에서 맛볼 수 있는 쌈밥과 백제교 건너 수북정 앞의 장어구이는 별미입니다. 그럼에도 부여에서 특별히 맛보고 가실 음식은 봄철에 그 맛이 최고인 '우여회'입니다.
 
우여는 학명이 웅어인 민물고기입니다. 보통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곳에서 5~7월 사이에 산란하는 우여는 그 맛이 탁월하여 조선시대에는 궁중요리를 관장하는 시옹원에서 특별히 위어소를 두어, 초봄에 우여를 잡아 왕가에 진상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백제시대에는 갓개포구에서 잡은 우여를 의자왕이 즐겨 먹었다고 전해지는 백제시대 최고의 보양식이지요. 아직 뼈(가시)가 제대로 생기기 전에 잡은 우여에다 갖은 야채와 새콤한 초고추장을 알맞게 버무려 먹는 우여회는 봄철에 제격이요, 미식가의 구미를 동하게 하고도 남습니다. 곁들이는 탁배기 혹은 모주 한잔은 부여로의 여행을 유혹하기에 충분합니다.

그 우여회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제3회 갓개포구 우여축제'가 3월 28일부터 4월 2일까지 부여군 양화면 잎포리 금강변에서 문을 엽니다. 서동요 오픈세트장에서 불과 20여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입니다. 가까운 곳에 젓갈시장으로 유명한 강경포구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쇠락한 도시이지만 젓갈시장은 전국의 으뜸을 자랑합니다. 꽃을 찾아 남도로 떠나는 행락의 계절에 조용한 역사의 울림이 노래 가락에 실려 봄을 피워내는 곳으로의 여행 또한 가족 간의 사랑과 전설을 되새겨볼 수 있는 의미 깊은 시간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 아이들이 형틀에 앉아 주리를 트는 장면을 흉내내며 즐거워하고 있다
ⓒ2006 임흥재

찾아가시는 길

 

 

 

 


* 대전 지역에서 갈 경우에는 논산 - 부여 - 홍산 - 충화

혹은 호남고속도로 논산 - 강경 - 양화 - 충화
/ 임흥재
[오마이뉴스 2006-03-27 17:28]    
[오마이뉴스 임흥재 기자]

 

 

 

 

 

 

***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다지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