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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 산다!

향기男 피스톨金 2006. 5. 11. 11:21

 

                     오스트리아①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 산다!

 

2006년은 불멸의 천재이자 신이 선택한 예술가로서 기억되는 모차르트가 탄생한 지 250주년이 되는 해다. 전세계 음악계는 '모차르트 열풍'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밤은 골목마다, 건물마다 사랑의 세레나데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간밤에 왈츠를 추던 여신은 미쳐 불도 끄지 못하고 긴 치맛자락을 끌며 사라져버렸다. 짧고 아름다웠던 무도회가 끝나면 고단한 방랑자도 구두축을 꺾고, 바위도시의 귀퉁이에 짐을 푼다. 뮤즈의 옷자락이 너울너울 넘어와 발등을 덮었다.

 

신의 사랑을 받은 악동과 달콤한 입맞춤

 

어느 날 모차르트광장을 지나가던 잘츠부르크 시민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도시의 위대한 아들, 모차르트의 동상이 400여 개의 거대한 쇼핑카트 더미에 파묻혀 가고 있었다. 시민들의 경악은 곧 분노로 바뀌었고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비난이 높아져갔다.

 

1991년 예술가 안톤 투스발트너(Anton Thuswaldner)는 이 작업을 통해 잘츠부르크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차르트에 대한 과장된 우상화와 끝이 보이지 않는 상업화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지만 예정보다 일찍 쇼핑카트를 철수해야 했다.

 

잘츠부르크는 그런 도시다. 음악을 사랑하고 모차르트를 흠숭하는 사람들이 오감으로 모차르트를 만날 수 있는 곳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지나친 상업주의가 모차르트는 물론 도시의 품위마저 앗아가 버린 듯 거부감이 들 때도 있다.

 

어쨌든 모차르트는 25세에 잘츠부르크를 떠나 버렸고, 그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비엔나에서의 가난하고 불행했던 시절에 작곡된 것들이다. 잘츠부르크 사람들은 이에 대한 약간의 섭섭함마저 갖고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의 일상이다.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우스 테오필리우스 모차르트(Johannes Chrisostomus Wolfgangus Theophilius Mozart)라는 긴 이름의 아이가 1756년 1월 27일 게트라이데가세(Getreidegasse) 9번지 집의 4층에서 세상을 향한 첫 울음을 울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250년간 줄곧 그러했다.

 

4살 때 피아노를 연주하고 5살 때 작곡을 한 신동에 대해 고향 사람들이 애정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는가.

 

1842년경에도 이미 잘츠부르크에는 모차르트 파이프, 모차르트 객실, 모차르트 빵, 모차르트 와인 등 모든 것이 모차르트 일색이었다. 당시 잘츠부르크 일간지의 한 기자는 ‘모든 것에 모차르트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매일, 수도 없이, 모든 곳에서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듣게 된다. 모차르트는 매일 매일의 패스워드가 되었다’고 썼다.

 

지금도 이런 풍경은 여전하다. 1996년 모차르트 생가 바로 정면에 '모차르트랜드'라는 쇼핑센터가 문을 열었다. 2층으로 된 가게에서는 초콜릿은 물론, 구두약, 목욕 소금에 이르기까지 '모차르트'라는 이름 하에 5000여 가지의 기념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후 부진한 영업과 비난 여론 속에 문을 닫고 말았지만 아직도 온갖 해괴한 모차르트들이 이곳저곳에서 팔리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모차르트 생가 바로 왼쪽에 'Next to Mozart'라는 이름의 상점이 성업 중이다.

 

모차르트 생가(Mozart Geburtshaus)는 여러 차례 개보수 되면서 건물의 앞면은 고딕양식으로, 뒷면은 로코코 양식으로, 야누스의 얼굴을 갖게 됐다. 내부는 모두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2층부터 다양한 관련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4층 내부에는 모차르트의 친필 편지와 악보, 그가 연주했던 악기들, 사용했던 가구들이 전시돼 있다.

 

 모차르트가 어렸을 때 사용했다는 1746년산 바이올린이 유리상자 안에 국보급 보물처럼 모셔져 있고,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성찬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어린 모차르트가 초상화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다.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1773년까지 살다가 강 건너편의 탄츠마이스터하우스(Dance Master's House)로 이사했다. 이 집은 1944년 폭격을 받아 절반 정도가 무너졌었지만 모차르트 음악실은 용케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89년에 현대적으로 개보수를 마치고 지금은 박물관과 연주회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밖에도 잘츠부르크에는 천재의 실존을 입증하는 생생한 공간이 많이 남아 있다.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는 그가 세례를 받은 성수함과 연주했던 오르간을 볼 수 있다.

 

모차르트는 더 넓은 세상을 찾아 잘츠부르크를 떠났지만 가족들을 일생을 잘츠부르크와 인근 마을에서 마쳤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 장소였을 만큼 아름다운 호숫가 마을 장크트 길겐(St. Gilgen)은 모차르트의 일생에 큰 영향을 주었던 두 여인이 살았던 곳이다.

 

모차르트의 어머니가 이 곳에서 태어났으며 모차르트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녔던 누나 난네를(Nannerl)은 결혼 후 이 마을에 가서 정착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잘츠부르크의 탄츠마이스터하우스에서 생을 마쳤다.

 

1791년 12월 5일 비엔나에서 35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모차르트의 시신은 그 정확한 행방을 찾지 못해 아직까지 사람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모차르트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를 끝내고 나면, 역시 관광객에게는 기념이 될 만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누가 뭐라 해도 모차르트를 체험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온갖 잡동사니 중에는 골프공이나 접시, 샴푸처럼 쓸만한 것도 있지만 모차르트가 사용했던 오리지널 악기로 녹음된 3장의 모차르트 피아노 콘체르토 CD세트 만한 기념품은 어디에도 없다고 봐야 한다. 50유로가 넘는 이 CD를 사고 돈이 남으면 모차르트 초콜릿을 추천한다.

 

달콤한 모차르트 초콜릿은 1890년 파울 피어스트(Paul Fuerst)라는 제과사에 의해 개발됐다. 둥근 초콜릿을 반으로 가르면 지구의 단면처럼 마지판(아몬드를 으깨 설탕과 버무려 만든 과자)과 누가 크림이 드러난다. 모차르트 초콜릿은 금박포장과 은박포장 두 가지가 있다.

 

오리지널 모차르트 초콜릿의 진미는 금이 아닌 은박 포장 속에 숨어있다. 자동화된 공정으로 대량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리지널 조리법을 고집하며 모두 수작업을 거쳤기 때문에 모양은 좀 거칠지만 맛은 일품이다. 모차르트가 이 맛을 보았더라면 자신의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김병만 기자(kimb01@yna.co.kr), 글/천소현(프리랜서)

(대한민국 여행정보의 중심 연합르페르, Yonhap Repere)

(끝)


  

② 잘츠부르크와 사랑에 빠진 에브리맨

 

[연합뉴스 2006-05-10 11:42]

 


(연합르페르)

부유한 한 남자가 어느날 사신(死神)의 부름을 받게 된다. 아직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우기는 그에게 사신은 동행할 친구 하나를 허락한다. 하지만 기꺼이 도와주리라 생각했던 '우정'이나 '의리' 등은 모두 그와의 동행을 거절한다.

 

남자가 가장 크게 의지했던 재산도 그를 외면했고, 힘과 아름다움, 지혜 등도 마지막 순간까지는 함께 해 주지 않았다. 대신 관계가 소원했던 '선행'만이 그와 마지막 동행이 되어 주었다.

 

이 남자, '예더만(Yederman)'은 오스트리아 극작가 휴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이 중세에 유행했던 영국의 도덕극 '에브리맨(Everyman)'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이 연극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공동 프로듀서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에 의해 1920년 잘츠부르크 대성당 앞 돔광장에서 공연됐고, 80년이 넘게 페스티벌의 고정 레퍼토리가 되고 있다.

 

그래서 '예더만'은 매년 잘츠부르크를 찾아온다.

예더만이 그랬듯 잘츠부르크를 직접 방문한 장삼이사(張三李四), 갑남을녀(甲男乙女)들은 누구나 도시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고딕과 바로크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그 사이를 날씬하게 가로지르는 잘자흐강의 매혹적인 자태가 그림엽서처럼 또렷하다.

 

호엔잘츠부르크(Hohensalzburg) 요새는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오스트리아를 '유럽의 심장'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잘츠부르크를 '심장의 심장'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로 도시를 방문해 보면 그런 찬사에 이견을 달 수 없다.

 

유네스코는 1997년부터 잘츠부르크 올드시티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인구 15만 명의 작은 도시에 해마다 4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이유다.

 

소금과 대리석의 도시

 

잘츠부르크가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백색의 금'이라고 불릴 만큼 가치가 높았던 소금광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는 '소금성'이라는 뜻이며 지금도 전국에 소금을 공급한다. 유럽의 옛 무역로가 이 도시를 통과했으며 지금도 시내를 20~30분만 벗어나면 독일 국경을 쉽게 넘나들 수 있다.

 

잘츠부르크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 재료는 대리석이다. 천연 대리석의 무늬와 색감을 그대로 살린 미라벨 궁전의 바로크풍 대리석홀은 금장식과 어우러져 더욱 황홀하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 아기천사들이 차례로 길을 열어 준다.

 

이 아름다운 장소는 그에 걸맞은 아름다운 이벤트 장소로 사용된다. 막 결혼식을 마치고 나오는 커플, 이제 곧 결혼식을 올릴 커플들이 대리석 계단을 분주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매일 저녁 실내악 연주회가 개최된다.

 

시내 곳곳에서 마주치는 조각상이나 고건축에서도 당대의 부와 미적 감각을 읽어낼 수 있다. 레지덴츠 광장의 대리석 분수도 놀라운 장관이다. 말이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듯한 15m 높이의 분수조각은 알프스 이북에서 최대의 규모를 가진 걸작이다.

 

대주교의 별장과 연회장으로 사용됐던 헬브룬 궁전은 개보수로 인한 예술양식의 혼재 없이 르네상스 시대의 순수 혈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잘츠부르크 대성당 내부에는 6천 개의 파이프로 된 유럽 최대의 파이프 오르간이 있어서 성상들의 웅장함을 압도해 버린다.

 

골목길을 걷는 즐거움도 크다. 작은 돌정원과 통로가 미로처럼 얽혀있는 거리의 풍경은 로마시대의 도시를 되살려 놓은 듯 하다. 건물 사이 통로를 잇는 아치형 입구나 묀히스베르크 터널은 도시의 지반을 구축하는 콩그라마트라는 암반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소극장으로 변신한 승마학교도 거친 바위산을 깎아 만든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각 빌딩의 외부에는 건축된 해와 개보수한 해를 숫자로 표시하고 있어 도시의 오래된 나이를 알 수 있다.

 


잘츠부르크의 또 다른 아이콘은 독특한 모양의 금속 공예 간판들이다. 모차르트의 생가를 중심으로 많은 상점들이 밀집해 있는 게트라이데가세에는 상점마다 고유의 모양으로 제작한 간판이 내걸려 있다. 문맹자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빵, 가위, 물고기 등이 상형문자처럼 사용됐다.

 

맥도날드는 조그만 'M'자를 만들어 내걸었다. 이 거리는 연중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고, 거리의 무명 예술가들이 그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오리인형을 만들어 파는 중년의 아줌마와 바닥에 엎드려 분필화를 그리는 화가는 그들의 청춘을 이 거리에서 보냈다.

 

묀히스베르크(Moenchsberg)에 올라가면 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 곳에는 호엔잘츠부르크 요새와 현대미술관이 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요새는 1077년부터 1681년까지 계속해서 증축돼 지금과 비슷한 규모를 갖추게 됐다. 현존하는 유럽의 요새 중 가장 큰 규모다.

 

이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 작은 도시에는 교회가 무려 42개나 된다. 이 중 40개가 가톨릭교회이고 1개가 개신교 교회, 나머지 하나는 회당이다. 잘츠부르크는 774년 처음으로 주교청이 설치됐고, 1803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도시를 점령할 때까지 1천 년 이상 대주교의 통치를 받는 독립된 공국이었다.

 

잘츠부르크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편입된 것은 불과 1816년의 일이었다. 교회의 발달은 교회음악의 발달을 동반했고 많은 음악가들은 주교의 후원을 받으며 재능을 키울 수 있었다. 그 수혜자 중 하나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였다.

 


 

   오스트리아③ 그곳에는 캥거루가 없다!

[연합뉴스 2006-05-10 11:56]

 

비엔나 St. Peter성당

(연합르페르)

오스트리아는 모차르트, 슈베르트, 카라얀을 배출했고, 아르누보의 대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가버네이터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태어난 곳이며, 오케스트라 연주와 왈츠 무도회를 유럽 전역에 생중계하는 문화의 제국이다.

 

합스부르크 왕가 때부터 예술을 장려하고 수많은 예술가를 탄생시킨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자존심은 오똑하고 단단하다. 하지만 그 자부심을 일순간 무너뜨리는 질문이 하나 있다. "캥거루는 어디에 있나요?"

 

웃기지만, 웃어넘길 일만은 아니다. 오스트리아의 기념품 가게에서는 '오스트리아에는 캥거루가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 당장 지식검색을 해 봐도 알 수 있다.

 

오스트리아라는 이름은 동쪽의 나라를 뜻하는 게르만어에서 왔다. 'Oesterreich'라고 쓰고 '외스터라이히'라고 읽는다. 중국이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스트리아는 프랑크왕국의 동쪽(Ost) 끝에 위치한 땅으로 규정됐다.

 

오스트리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를 걷어내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재론의 여지없이 '문화'다. 너무나 당연한 것 같지만 사실 다민족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는 순수 오스트리아 혈통이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변방의 땅에는 전쟁과 혼돈이 멈추지 않았고 서로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동안 많은 문화가 유입됐다.

 

이웃나라 독일과 언어를 비롯해 대부분의 전통과 풍습을 공유하지만 지역별로는 의사소통이 어려울 정도로 방언이 발달했고 지역색도 강하다.

또 오스트리아인들은 문화적 역량 면에서, 다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에 올라있다.

 

이 역량이란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모두 악기 한두 개쯤은 손쉽게 연주하고, 누구나 댄서 뺨치는 왈츠 솜씨를 지녔다거나, 오페라 가사를 줄줄 외운다는 뜻이 아니다.

 

이들에게 문화란 그렇게 전투적인 것이 아니다. 따뜻한 햇볕을 쬐며 카페에 앉아 몇 시간씩 신문을 읽고, 담소를 즐기는 느긋한 천성이 문화의 텃밭이 되었다. 재능이란 그 재능의 우수성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만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 식별안이 바로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위대한 역량이다. 그래서 대한민국보다도 작은 이 유럽의 중립국은 전 세계 클래식 음악의 고향이자, 모든 예술가들의 성지가 되었다.

사진/김병만 기자(kimb01@yna.co.kr), 글/천소현(프리랜서)

 

 




    오스트리아④ 비엔나를 사랑하는 이유
 
호프부르크궁의 미카엘게이트

(연합르페르)

히틀러는 비엔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국경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조국보다 독일을 더 좋아했다. 게르만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그에게 비엔나는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녹아있는, 그래서 지나치게 국제적인 도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쩌면 예술가가 되려고 했던 그를 두 번이나 낙방시켰던 비엔나 예술대학에 대한 섭섭함과 폭군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히틀러가 그다지도 싫어했던 비엔나의 다양성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를 사랑하는 이유가 됐다. 고딕의 웅장함을 대표하는 슈테판 성당과 바로크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쉔브룬 궁전이 공존하고, 로코코와 아르누보가 조화로운 도시다.

 

쉔브룬 궁전에서 모차르트 콘서트가 열리는 그 시간에 시내의 나이트클럽에서는 펑키 록과 얼터너티브의 사운드가 머리를 쥐어흔드는 곳이 비엔나다.

 

오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자연사 박물관(Museum of Natural History)과 미술박물관(Museum of Fine Arts) 맞은편에는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적인 전시회가 끊이지 않는 뮤지엄쿼터(Museums Quartier)가 들어서 있다.

 

과거와 현대의 공존, 그리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예술적 에너지는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엔나의 독특함이다. 평소 클래식 음악과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도 비엔나에서는 모차르트나 요한 슈트라우스 콘서트를 한 번쯤 감상하고, 커피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도 오후 4시쯤이 되면 커피하우스의 구석 자리에 칩거하게 되는 압도적인 분위기가 있다.

 

그 모든 일상의 순환이 아주 자연스러워졌다면, 당신은 바로 지구상 가장 낭만적인 도시에 살고 있는 비에니즈(Viennese)의 자격이 충분하다.

비엔나는 배낭 하나, 카메라 하나를 들고 거리를 헤매는 관광객들에게 하루 정도에 자기소개를 끝내버린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1857년 성벽을 둘러싸고 있던 해자(垓字)를 메워 링슈트라세(Ring Street)를 만들었고 링 안쪽이 비엔나 제1구다. 비엔나는 총 23구로 이루어져 있지만 오래된 중세 도시의 모습은 대부분 1구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비엔나 제1구의 심장부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슈테판 성당이다. 이 교회는 비엔나의 랜드마크이자 등대와 같다. 높이가 135m나 되는 교회의 첨탑을 보고 방향을 찾으면 된다. 케른트너 슈트라세(Karntner Street), 그라벤 슈트라세(Graben Street)등 유명 쇼핑 거리도 이 곳을 기준으로 사방으로 뻗어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인 호프부르크,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성당 중 하나인 카를 성당도 슈테판 성당에서 도보로 5-10분 거리에 앉아있다.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과 시청, 국회의사당 등 주요 건물도 모두 링슈트라세 주위에 배치되어 도보만으로 여행이 가능하다.

 

여유가 있다면 마차를 한번 타보는 것도 좋다. 마부의 설명을 들으며 거리를 한 바퀴 돌고 있으면 링 안의 승자처럼 어깨가 절로 우쭐해진다.

낯익은 도시의 새로운 표정

 

비엔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오래된 도시의 '고딕'과 '바로크'에서 눈을 떼야 한다. 한 쪽 문을 닫으면 다른 쪽 문이 열리는 것이다. 비엔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양파’에 비교한다. 벗겨도 벗겨도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는 매혹적인 도시라는 뜻이다.

 

비엔나의 어느 곳에도 뼈대만 남은 건물이나 기둥은 없다. 황제가 살던 궁전엔 대통령이 살고, 쉔브룬 궁전에도 사람들이 입주해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과 어울려 복닥거리며 사는 동안 과거는 현재가 되고, 또 미래의 터전이 되어 왔다. 도시는 오밀조밀, 속닥속닥 성장해 왔고 곳곳에 젊은 얼굴을 내세우고 있다.

 

동화책에 등장할 듯 알록달록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aus)는 비엔나의 또 다른 젊은 얼굴이다. 자연을 닮은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는 온통 울퉁불퉁하고 삐뚤빼뚤, 어느 것 하나 직선이 아니다.

 

관광명소가 되어 버린 이 집은 시에서 관리하면서 저소득층에게만 입주권을 주고 있다. 인테리어를 보고 싶다면 훈데르트바서의 또 다른 작품,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 Wien. www.kunsthauswien. com)을 찾아가면 된다.

 

비엔나는 과거를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예술조류를 가장 파격적으로 끌어안는 도시 중 하나다. 합스부르크가의 거주지였던 알베르티나는 현대적인 미술관으로 변신했고 리히텐슈타인 왕자의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는 리히텐슈타인 뮤지엄이 단장을 마치고 문을 열었다. 이번 여행에서도 비엔나는 여전히 변화하고 있었다. 낯익은 도시의 새로운 표정, 내가 비엔나를 사랑하는 이유다.

 


▶Tip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 하나. 비엔나엔 비엔나커피가 없다. 왜 이 정체불명의 커피가 한국에서 엉뚱한 이름값을 하고 있는 것일까. 비엔나는 유럽의 다른 도시와 비교해도 커피 문화가 유난히 잘 발달된 도시다.

 

'모차르트' '카페 센트랄(www.palaisevents.at)'처럼 도심 곳곳에 수백년 역사를 간직한 커피하우스들이 있다. 하얀 거품을 이고 있는 진한 커피 멜랑지(Melange)가 진정한 비에니즈의 커피다.

 

커피하우스의 발달과 함께 자연스레 발달한 것이 제과기술이다. 진한 멜랑지와 어우러지는 다양한 모양의 케이크와 과자, 초콜릿은 강한 중독성을 지녔다. 제과점 데멜(Demel. www.demel.at)은 비엔나 시내에서 가장 이름난 제과점이다.

 

설탕으로 만든 갖가지 모양의 인형이 진열장을 메우고 있다. 자허 호텔(Sacher Hotel)의 카페에서 판매하는 초콜릿 토르테(torte)는 살짝 쓴 맛이 느껴질 정도로 강력하게 달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쉔브룬 궁전

 


오스트리아⑤ 잘츠부르크, 비엔나 여행수첩

[연합뉴스 2006-05-10 11:56]

 


(연합르페르)

유럽의 중앙부에 위치한 오스트리아는 독일, 스위스, 헝가리, 이탈리아, 슬로베니아 등 7개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8만3천㎢가 조금 넘는 영토는 9개의 연방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구 약 800만 명이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공식통화는 유로를 사용하고 있으며 한국과의 시차는 8시간, 한국과 무비자협정을 맺고 있어서 90일간 사증이 면제된다. 작은 나라지만 음악, 미술, 건축, 자연, 와인 등 다양한 테마여행이 가능하다.

 

▲항공편 - 현재 한국과 오스트리아를 연결하는 직항 노선은 없다. 베이징, 상하이, 방콕, 도쿄, 쿠알라룸푸르 등을 경유해 비엔나에 닿는 오스트리아항공을 이용할 수 있다. 편리한 유럽 내 연결노선을 확보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항공은 스타얼라이언스 회원사로 아시아나항공과 마일리지 공유가 가능하다. www.austrian.co.kr 02-3788-0140

 

▲잘츠부르크 카드 - 시내버스 이용은 물론 대부분의 박물관, 갤러리를 입장할 수 있다. 성수기(6~9월) 가격은 24시간 카드가 23유로, 48시간 카드는 29유로, 72시간 카드는 34유로다. 잘츠부르크 플러스카드나 칩이 내장된 손목시계는 시내 호텔과 레스토랑, 주요 관광지와 공연 등에서 현금대신 사용할 수 있다.

 

▲잘자흐강 유람선 - 잘츠부르크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잘자흐강에 '아마데우스' 유람선이 운행되고 있다. 시내의 하누슈플라츠(Hanushplatz)에서 출발해 헬브룬 궁전 근처까지 왕복한다. 배를 타고 알프스의 정경과 도시 외곽의 평화로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올해는 4월 15일부터 10월 22일까지 운행한다.

 

▲비엔나 카드 - 72시간 동안 비엔나 시내의 지하철, 트램, 버스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상점, 레스토랑, 와인 선술집, 관광지 등에서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용안내 브로슈어를 함께 제공한다. 16.90유로.

 

▲CAT - Cat(City Airport Train)은 비엔나 공항과 시내 중심지를 16분 만에 논스톱으로 주파한다. 매 30분마다 운행한다. 빈 미테(Wien Mitte)역에서 출발해 24시간 이내에 항공권 체크인도 마칠 수 있다. 빈 미테역은 슈테판광장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다.

 

▲유용한 사이트 -

 

오스트리아 관광청 www.austria-tourism.co.kr

모차르트 공식 웹사이트 www.mozart2006.net

잘츠부르크 관광국 www.salzburg.info

비엔나 관광국 www.vienna.info

 


사진/김병만 기자(kimb01@yna.co.kr), 글/천소현(프리랜서)

(대한민국 여행정보의 중심 연합르페르, Yonhap Repere)

(끝)

 


 

Merci Cherie - Frank Pourcel (별이 빛나는 밤에)

 

우린 누구나가 각자의 자기만의 시그널을 갖고있다

큐사인과 함께 들어올 수도있지만 소리없이 왔다

바람처럼 그렇게 지나갈수도있다....

아무도 모르게..

 

향기남 그늘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