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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에서 만난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

향기男 피스톨金 2006. 7. 18. 12:34

                 홋카이도에서 만난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


“홋카이도는 여름에 가야 한다”고 말해 준 사람은 가오루였다.

북해도(北海道)의 눈과 겨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에게, 도쿄에서 직장을 다니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가 봐요. 겨울은 오직 겨울 뿐이지만, 홋카이도의 여름은 여름만이 아니야.


 

새하얀 눈과 연보라 라벤더꽃, 그리고 봄·가을이 함께 있는 곳이 여름의 홋카이도니까.”

 


홋카이도 최대의 관광지,

 

 

도오야(洞爺) 호수는 여름이었다. 도 남서부에 위치한 둘레 43㎞의 칼데라호. 백두산의 천지처럼, 화산활동으로 생긴 호수다. 호수라기보다는 작은 바다에 가까운 거대함. 코발트블루 수면에서 남프랑스의 여름 해변이 떠올랐다.


 

오전 9시에 출발하는 유람선 에스푸아르(espoir·희망)에 올랐던 건, 호수가 품은 낭만적 전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호수 중앙의 무인도 오오시마. 초입에는 ‘신목’(神木)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뿌리 두 그루의 아름드리 계수나무가 자웅동체처럼 서로를 포개고 있었다.

 

 

500년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절, 전쟁에서 다리 하나를 잃고 고향 도오야로 돌아온 사내는 “죽었다”고 거짓 소문을 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자신을 잊고, 몸 성한 남자 만나 결혼하라는 배려였다. 하지만 여자는 삶의 희망을 잃고, 호수 아래로 몸을 던졌다.

 

 

밤낮으로 울던 사내가 뒤따라 몸을 던진 것은 며칠 뒤. 마을 사람들이 건져 올린 건, 시신이 아니라 가락지 한 쌍이었다. 사람들은 섬 초입에 가락지를 묻었고, 그 자리에서 계수나무가 솟아 올랐다. 500년 뒤 그들은 섬 위에서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겨우 자동차로 30분 지척인데, 무로란(室蘭)의 지큐미사키(地球岬)는 겨울이었다. 태평양을 마주하고 있는 홋카이도 남쪽 말단. 살을 에는 듯 된바람이 불어왔다. 체감온도는 이미 영하였다.

 

 

멀리 양의 발굽을 닮았다는 요오테이잔(羊蹄山)의 만년설이 보였다. “지구의 끝”이라는 별명의 이 곶(岬) 전망대에서, 수평선은 신기하게도 직선이 아니라 완만한 곡선이었다.

 

 

홋카이도가 자랑하는 이 특이한 지형에서 자신의 몸을 360도 회전하면, 수평선도 따라 원의 궤적을 그렸다. 전망대 한 쪽에는 지구의(地球儀)를 본 딴 ‘행복의 종’이 설치되어 있었다. 치는 사람에게 행복이 찾아온다는 행운의 종. 반신반의하며 종을 울리려다, 실수로 발을 헛디뎠다. 무릇 믿는 자에게 복 있을진저.


 


도오야에서 도(道) 북쪽으로 두 시간을 달리면, 후라노(富良野)다. 일본의 북유럽으로 불리는 홋카이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지역. 봄의 따뜻함과 가을의 풍성함을 더불어 느낄 수 있는 은총의 마을이다.

 

 

도로 양쪽으로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덤블링할 것 같은 초원이 끝없이 이어졌다. 후라노에서 가장 이름난 관광지 중 하나는 라벤더꽃 농원인 팜 토미타(Farm Tomita·www.farm-tomita.co.jp). 6월 중순의 라벤더는 아직 시시했다.

 

 

7, 8월이 정점이라고 했다. 대신 250엔(약 2100원)을 주고 연보라빛 강렬한 라벤더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입술까지 보라색이 되어 버렸다.

사계를 하루에 왕복하는 홋카이도 특유의 체험은, 도오야호 텐쇼(天翔)파크 호텔의 온천에서도 반복됐다. 호수 전경이 훤하게 내다보이는 투명 유리창을 제외하면, 사실 한국의 실내 온천과 시설 면에서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열탕 냉탕 온탕을 가로지르며, 피로를 풀고 피부를 달랜다. 구태여 “칼슘, 마그네슘, 나트륨, 칼륨, 탄산, 수소, 황산 등의 혼합천으로 피로회복과 피부질환에 좋다”는 안내문이 아니더라도,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편안해졌다.

 

 

푸근한 탕 속에서 의식을 잃고 있다가, 뒤늦게 나선형으로 되어있는 실내 계단을 발견했다. 9층 옥상 야외 온천에 이르는 통로다. 계단을 따라 오르다, 반 투명 출입문 앞에서 멈췄다. “35m야외 풀과 실외 온천탕.

 

 

수영복 착용 요망. 밤 9시까지 운영”이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지금 시간은 오후 8시30분. 하지만 수영복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유리창 밖의 어둠은 짙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질주를 시작했다. 호수의 짙은 물안개가 부끄러움을 덮었다.


 

여행수첩

 

●홋카이도, 넓다. 인구 560만에, 대략 강원도 뺀 대한민국 전체와 비슷한 규모의 땅덩이. 덕분에 인구 제1, 2의 도시인 삿포로(180만)와 아사히카와(36만)를 제외하면, 사람과 자동차 둘 다 만나기 힘들다.

 

 

6월부터 아시아나가 아사히카와 공항에, 대한항공이 하코다테에 주 3회 정기 취항을 시작했다.


 

도오야 호수, 지큐미사키, 후라노 등을 포함하는 북해도 패키지상품을 모두투어에서 판매한다. www. modetour.co.kr (02)755-1844

 

 


 

●도(道) 중앙에 자리잡은 소도시 유바리에서 이 곳 특산품 메론에 두 번 놀랐다. 최상품이라지만, 겨우 작은 수박만한 메론 한 개에 무려 8000엔(6만8000원)을 받고 팔고 있었던 것.

 

 

하지만 마지막날 숙박지였던 유바리 마운트레이시 호텔에서 안도의 한숨. 저녁 부페식사에서 그 값비싼 유바리 메론을 무한대로 리필하고 있었다. 비결은 인근 메론 농장에서 표면에 흠집이 있는 상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한다는 것.

 

 

하지만 맛은 시식할 때 먹어본 최상품과 거의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달았다. (모두투어 패키지상품에 포함된 숙소).

www.yubari-wv.com/stay /racy/index.html. (81)0123-52-2211.


 

 

●삿포로 맥주 박물관을 놓칠 수 없다.

 

 

2년 전 개관한 이 맥주박물관은 홋카이도 도민 전체의 보물을 의미하는 ‘홋카이도 유산’으로 지정됐다. 메이지(明治)시대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벽돌 건물 안에는 붉은 별을 상징으로 1876년 시작한 이 맥주회사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물론 120엔(약 1000원)에 시음할 수 있는 삿포로 맥주가 더 반갑기는 하지만. 입장은 무료다. www.sapporobeer.jp (81)0123-32-5811.


 

●홋카이도의 호텔 온천은 매일 새벽 2시~3시쯤

   남탕과 여탕을 뒤바꾼다.

 

서로 다른 양식으로 지어 놓은 내부 구조를 골고루 이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란다. 도오야호 텐쇼파크호텔. 잠에 취한 새벽, 전날 밤 이용했던 남탕 탈의실로 들어갔다가 경악해서 뛰어나왔다. 여자들이 유카타를 벗고 있었다.

www. toyatensyo.co.jp/top (0142)75-4343

 


 



 


[조선일보 2006-07-06 11:02]    

(홋카이도=어수웅기자 [ jan10.chosun.com])

 

 

      

        홋카이도① 여름에 뭘 보겠다고 갈까

 
생명의 보고인 구시로 습원

일본 북단의 섬인 홋카이도에 간다고 했을 때 대부분은 '여름에도 눈이 내리느냐'는 반응을 보였고 조금 안다는 식자는 '도대체 여름에 뭘 보겠다고 가느냐'며 궁금해 했다. 그때마다 '겨울에 가봤으니까 여름에도'라는 궁색한 답변으로 적당히 넘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에겐 '홋카이도'하면 대지를 새하얗게 뒤덮는 눈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듯하다. 그러나 가오리처럼 생긴 거대한 섬의 진가는 짧지만 화려한 여름날에 나타난다. 생물이 약동하고 번창하는 계절은 어느 곳에서나 소중하고 고혹적이다.

 

물론 고정관념으로 깊이 박혀있는, 눈발이 휘날리는 겨울의 홋카이도 역시 충분히 아름답다. 아오모리(靑森)에서 삿포로(札幌)로 향하던 밤기차에서 창밖으로 해가 뜨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흰색을 뒤집어 쓴 아득한 평지에 발갛고 동그란 불덩이가 서서히 치솟고 있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눈에 질리고 말았다.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어딜 가도 눈이다 보니 식상해져 버린 것이다. 백의(白衣)를 벗은 맨살의 섬과 교감하고 싶었다.

 

태고적 자연을 간직한 순수의 땅, 구시로

 

구시로는 홋카이도 동부의 관문이자 주변의 습원과 호수, 온천 관람의 출발점이다. 보통은 구시로 역에 잠시 들렀다가 바로 람사조약에 가입한 구시로 습원을 보러 떠난다.

 

일본에서 가장 광대하다는 습원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차로 국립공원 둘레를 돌았다. 좁은 시내를 빠져나오자 잿빛 건물은 완전히 사라졌다. 사위가 온통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표면만 보고서는 넓은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법이다. 도로 이곳저곳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습원은 뿌옇게 내려앉은 안개 탓인지 불투명하고 희미했다. 연둣빛이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광막한 습원은 답답함을 일거에 해소시켜줄 만큼 시원했다. 키가 낮은 풀 사이에 돋아난 관목은 군데군데 진한 녹색의 얼룩을 묻혀 놓았다.

 

대략 도쿄돔 야구장이 5천500개 정도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굉장하다. 습원의 끝을 눈으로 추적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빌딩에 막히고 사람에 부딪혀 가까운 곳만 쳐다보던 도시인에겐 아스라이 멀게만 느껴졌다.

 

산정에 올라 장엄한 산세를 굽어보거나 모래사장에 앉아 대양을 접할 때만 경험할 수 있었던 일이다. 구시로 습원은 들판도 한없이 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알려주었다.

 

반대편의 전망대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렸다. 호소오카(細岡) 전망대는 구시로에서 연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장소로 습원을 물들이는 일몰이 매우 아름답다. 해가 아직 하늘에 걸쳐 있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5분도 안 되는 자연의 선물을 받기 위해 군집했다.

 

구시로 습원을 여행하는 방법은 산책, 기차, 카누, 열기구 등 다양하다


꾸물거리는 뱀의 형상을 한 구시로가와(釧路川)가 습원을 관통하는 모습은 웅혼하고 역동적이었으나, 들려오는 소리가 없어 숙연하고 잠잠했다. 인간 무리도 습원과 동화돼 침묵 속에서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석양은 좁은 강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더니 이내 구름 아래로 침잠했다. 잠깐 동안 붉은 빛을 미약하게 내뿜던 해는 암흑 속으로 들어가 내일을 준비했다. 태양과 습원의 짤막하고 뜨거운 데이트는 이렇게 끝을 고했다.

 

자연의 보고, 구시로 습원

 

다음날 숲만 보고 귀환할 수는 없기에, '나무'를 관찰하러 습원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수목이 빽빽한 평범한 산길을 지나쳐 온네나이(溫根內) 비지터 센터에 닿으면 목책로가 눈에 띄고 산책이 시작된다.

 

센터 내부의 지도에는 두루미나 다람쥐를 발견했다는 메시지가 빼곡이 기록돼 있다. 특히 두루미는 세인의 관심을 온몸에 받고 있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절멸 위기에 놓였던 새가 마지막까지 생존한 곳이 바로 구시로 습원이다. 그래서인지 철새인 두루미가 홋카이도에서는 번식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텃새라고 한다.

 

다양한 풀들이 밀림을 이룬 습원에서는 억새 같은 기다란 풀과 들꽃이 곧게 난 길을 호위했다. 같은 듯하지만 서로 다른 식물들이 연속해서 나타났다. 식물에 문외한인지라, 가치를 측정할 순 없었지만 고귀함만은 느껴졌다. 개발의 광풍에 시달리지 않고 본디의 성질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땅이 얼마나 되겠는가.

 

산책로 아래에는 흙이나 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 출렁였다. 3m 길이의 막대를 넣어도 스펀지처럼 쑥 들어가는 습지는 3천 년 전까지 구시로와 접한 바다였으나, 세월의 흔적이 쌓여 현재에 이르렀다. 마구잡이로 자라 정돈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러운' 습지에 작은 식물들이 어떻게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어찌 보면 인간이 침입할 수 없었기에, 지금까지 수많은 생명들이 상처를 입지 않고 공생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습원은 하늘과 접했다. 지금은 싱그러운 풀색이지만 가을엔 황색으로, 겨울엔 흰색으로 둔갑해 천공을 떠안는다.

 

▲ 여행정보 =

 

현재 대한항공이 삿포로와 하코다테로, 아시아나항공이 아사히카와로 직항을 운행하고 있다. 항공료는 다른 일본 지역보다 비싸다. 7월의 평균기온이 21℃로 서울보다 3~4℃ 정도 낮다.

 

한여름에도 아침, 저녁에는 선선하므로 긴 소매 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으며, 특히 구시로 습원에서는 긴 소매 상의와 긴 바지를 입어야 한다.

 

홋카이도에서 도시 간을 이동할 때는 기차가 가장 유용하다. 레일 패스를 구입하면 저렴한 가격으로 원하는 스케줄에 맞춰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사진/김병만 기자(kimb01@yna.co.kr)ㆍ글/박상현 기자(psh59@yna.co.kr)

 

다양한 풀과 수목이 빽빽한 산길

 

 

                        홋카이도

 

  ② 칼데라 호수가 토해내는 물안개의 '환상'

 
칼데라 호수인 마슈코

(연합르페르)

습원을 천천히 달리는 관광열차 '노롯코' 호를 타고 종점인 도로(塘路) 역에 도착한 뒤 북쪽으로 1시간 정도 떨어진 마슈코로 향했다. 가는 길은 온화한 산세가 모나게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의 성질과 닮아 있었다.

 

숲 속에는 태풍의 피해로 뿌리가 꺾인 나무가 처량하게 누워 있다. 인근의 또 다른 호수인 아칸코(阿寒湖)와 갈라지는 분기점을 지나서 오르막길을 가면 곧 마슈코 전망대다.

 

백두산 천지(天池)와 같은 칼데라 호수인 마슈코는 '신비의 호수'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안개 뒤로 숨어서 좀체 본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데다 물이 빠지는 강과 흘러드는 강이 없어서 고여 있음에도 최고의 투명도를 유지하는 탓이다.

 

운 좋게도 안개가 비켜나서 남색이 감도는 담수가 하얀 구름과 조화를 이뤘다. 흘러간 유행가의 제목에 차용된 적도 있어서인지, 나이가 지긋하신 노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가 기념사진을 찍고는 돌아가기도 했다. '울고 넘는 박달재'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쯤 되는 듯했다.

 

호수는 전망대 이상의 접근은 용납하지 않았다. 경사가 워낙 심해서 내려가지 못한다고 했다. 중앙에 볼록 튀어나온 섬에 가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오랫동안 차를 타고 도달했지만 손닿을 수 없는 마슈코는 멋지고 또한 허무했다.

 

아직도 화산의 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이오잔(硫黃山)에서는 유황의 연기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유황의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는 산에는 폭탄이라도 터질 것처럼 거센 파열음이 요동쳤다. 돌무더기 산은 유황의 세례를 얼마나 오래 받았는지, 노란색과 살구색으로 염색돼 있었다.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수증기와 연기로 후끈한 산에는 계란장수들 천지였다. 자연의 부산물에 어떻게 해서든 무임승차하려는 심산이다. 그래도 갈색으로 익은 계란은 따뜻하고 촉촉했다.

 

유황 연기가 무수히 피어오르는 아오잔. 주변에 좋은 온천이 많다.


 

 

화산의 열기로 익힌 계란은 별미다.

 

                        홋카이도

 

    ③ 라벤더 향과 목가적인 풍경의 조화

[연합르페르 2006-07-13 10:43]
보라빛 라벤더의 향이 코를 즐겁게 하는 후라노의 팜 도미타.

가랑비는 뿌리지 않았으나 구름이 주위의 영봉을 집어삼킬 듯 낮게 포복하고 있었다. 나쁘다고 할 순 없었지만 그다지 좋은 날씨도 아니었다. .

 

융단처럼 깔린 보랏빛 라벤더는 '후라노'라는 지명을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그림이다. 7월 하순 정점에 올라 시내 곳곳을 허브 향기로 채운다는 라벤더 꽃은 홋카이도로 놀라오라며 유혹하는 포스터의 일순위 모델이기도 하다.

 

후라노에는 라벤더가 피는 곳이 많지만 유독 '팜 도미타(ファ―ム富田)'로만 방문객이 몰린다. 라벤더를 지켜낸 '원조'이기 때문이다.

 

1955년경 프랑스 남부 지방과 비슷한 기후를 가진 이곳에서 향료를 채취하기 위해 라벤더를 재배하는 농가가 생겨났지만 별다른 수익이 나지 않아 철수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최후의 도전자였던 팜 도미타가 엉뚱한 곳에서 뜻밖의 열매를 얻게 됐다. 한 사진작가가 농장의 라벤더 사진을 잡지에 게재한 뒤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가 급증한 것. 간발의 차이가 벽촌 후라노의 관광자원을 살려냈다.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라벤더의 물결은 마음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다. 검푸른 보라색이 완숙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라벤더 옆으로는 빨강, 주황, 노랑의 원색 백합과 이름을 하나하나 챙기지도 못할 만큼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행진하듯 긴 띠를 이뤘다. 눈이 시리고 어지러웠다.

 

'예쁘고 환상적이다'는 가치판단만이 어슴푸레 남을 때쯤 동화 속 나라처럼 꾸며진 상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팜 도미타의 입장료가 없는 것은 라벤더로 제작된 각종 상품을 많이들 구입하라고 유도하기 위한 묘수였던 모양이다.

 

아이스크림부터 비누, 방향제, 샴푸까지 진열대에 나열된 것은 모두 보라색으로 치장했다. 은은한 라벤더 향이 풍기는 향기카드를 손에 든 손님들은 꿈같은 화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예술가의 혼을 앗아가는 곳

 

평평한 분지 지형은 후라노의 북쪽에 위치한 비에이까지 이어진다. 넉넉히 시간을 두고 자전거 하이킹을 즐기기 좋은 비에이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아름다움보다는 자연스럽고 목가적인 풍경이 인상적이다.

 

늘씬하게 빠진 옥수수,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 해를 쫓아 고개를 돌린 해바라기 등이 네모꼴로 구획된 땅에 순서를 바꿔가며 얼굴을 내밀었다. 하늘의 무지개를 직선으로 곧게 편 뒤 양옆으로 늘린 것처럼 다채로운 경관이 계속됐고, 드넓게 펼쳐진 초록빛 구릉지대가 흡사 유럽의 면모를 풍겼다.

 

비에이의 비바우시 초등학교.


평야가 모자라기는 우리와 매한가지인 일본에서 쉽사리 볼 수 없는 풍광이기에, 몇몇 예술가들은 이곳을 제재로 삼아 창작열을 불태우기도 한다.

 

거대한 화폭에 일본 전통기법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고토 스미오(後藤純男)의 미술관으로 진로를 틀었다. 그 역시 홋카이도의 자연에 반해 아틀리에를 설치하고, 후라노 동쪽의 산악지대인 도카치다케(十勝岳)와 소운쿄(層雲峽) 등을 작품으로 남겼다.

 

여백의 미를 살려 담박하고 산뜻한 한국화와는 다르게 일본화는 정교하고 세밀해서 서양화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일본화에서는 물감이나 캔버스를 사용하지 않고, 색색의 천연재료를 곱게 빻아 만든 가루와 아교로 쓰는 동물의 연골, 전통종이만을 이용한다.

 

산호나 크리스털, 호박 같은 보석이 분말의 원료가 되므로 작품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순금을 바르기도 하는데 호사스럽기는 하나 이쯤 되면 그림이 아니라 보물이라고 불러야 하겠다.

 

그는 주로 한 곳에 머물며 계절마다 변화하는 자연의 멋스러움을 관찰한 듯했다. 벚꽃, 녹음, 단풍, 설경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일본의 사계가 대가의 영감을 자극한 것이리라.

 

멀찌감치 떨어져야 한눈에 들어오는 그림들은 웅장하고 영묘했다. 특히 작가가 봄날의 화무(花舞)에서 받은 감동을 표현하기 위해, 만개한 벚꽃과 벚나무를 제외한 모든 공간을 금니(金泥)로 덮은 '앵화정원쌍도'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조명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양태가 충격 그 자체였다. 보물은 보물이되, 이심전심으로 가슴에 파동을 일으키는 명작임에 틀림없다. 그의 화풍은 광활한 홋카이도가 내려준 축복이자 은혜일 것이다.

 

▲ 여행정보 =

 

후라노와 비에이는 하루에 묶어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름이면 삿포로에서 오전 9시 15분에 출발해 오전 11시에 후라노에 도착하는 관광열차가 운행된다. 후라노와 비에이에서는 볼거리들이 멀찍이 떨어져 있으므로 자전거나 자동차를 대여하는 것이 좋다.

 

사진/김병만 기자(kimb01@yna.co.kr)ㆍ글/박상현 기자(psh59@yna.co.kr)

(대한민국 여행정보의 중심 연합르페르, Yonhap Repere)

 

후라노의 고토 스미오 미술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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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우고 또 띄워 보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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