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 자녀에게 - 시험 치르느라 애쓴 아이에게 샴페인 한잔
늘 어린아이 같았던 아이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렀다. 결과야 어쨌든, 이제 성인의 초입에 서 있는 아이들과 1년을 돌아보며 샴페인을 한잔하자. 윈스턴 처칠은 “샴페인은 승자뿐 아니라 패자를 위해서도 준비되어야 한다”고 했다. 바로 샴페인만이 가진 ‘분위기 메이커’ 역할 때문이다.
샴페인은 흔히 축하의 의미가 강하지만 낙담한 사람들을 위해 ‘톡톡’ 터지는 기포처럼 ‘씩씩’하라고 건투를 비는 의미도 있다. 시험을 잘 본 아이와는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지만 예상보다 성적이 좋지 않아 자녀가 낙담해 있다면 ‘크뤼그 그랑퀴베 샴페인’(프랑스산·사진)으로 위로해 보자.
이 샴페인에는 ‘시간에 대한 존경(The respect for time)’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샴페인은 보통 3년을 숙성시키는데 크뤼그는 6∼8년을 어둡고 습한 지하 창고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비로소 출하된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배어있어 맛이 깊고 다양하다.
√ 남편에게 - 은근한 맛과 향의 시라즈 “작업 한번 걸까”
(알고 보면) 약한 자! 그대 이름은 ‘남편’이다. 나 역시 정작 와인 전문가로 와인과 함께 15년을 보냈지만 정작 호젓하게 남편과 마주 앉아 와인을 마셔본 날이 몇 번 안 된다.
부부가 함께 멋진 시간을 갖고 싶다면, 호주산 ‘투 핸즈 에인절스 셰어’(사진)를 추천하고 싶다.
와인의 장점은 은근히 취하면서 계속 마시고 싶어지는 것인데 이 와인이 바로 그렇다. 흔히 알코올 도수가 높으면 알코올만 홀로 툭 튀어나와 뜨거운 열감만이 느껴지고, 숙성이 덜 되면 타닌이 많아 거친 맛이 나고, 신맛이 강하면 혀끝이 불편하다. 하지만 이 와인은 알콜 도수가 15%로 조금 높으면서도 맛의 조화와 균형이 워낙 잘 이루어져 있어 어느 것 하나 모난 구석이 없다.
호주 시라즈 품종 특유의 달콤하고 농익은 자두와 블랙베리의 풍미, 입안 가득 퍼지는 그윽한 커피와 다크 초콜릿향이 한겨울 계피와 초콜릿 가루를 잔뜩 뿌려놓은 따끈한 한잔의 카푸치노처럼 환상적이다.
오늘밤 이 와인으로 남편에게 작업을 걸어 보시라.
√ 아내에게 - 언 포도 따서 만든 달짝지근 아이스와인
아이들과 남편 뒷바라지로, 지겨운 집안일로 시달린 아내. 문득 아내의 얼굴에서도 세월이 느껴진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든든한 아내 같은 와인, 바로 아이스와인이다. 아이스와인은 꿀물처럼 달다.
섭씨 8도 이하의 추운 날씨에 언 포도를 직접 하나하나 손으로 따서 만든다. 그래서 양은 적지만 연중 오랫동안 햇볕을 받아 당도가 높아진다.
가장 추운 날씨까지 견디고도 단맛을 내 375mL 작은 한 병에 담아내어지는 귀한 와인이다. 그 자체가 긴긴 인생여정에서 온갖 고난, 슬픔을 모두 견뎌낸 사랑과 인내의 상징인 아내와 어울린다.
양보다는 질로 마시는 와인이므로, 알코올 도수도 낮고 맛도 달아 술에 약한 아내에게 제격이다. 비교적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캐나다산 ‘랭 리슬링 아이스와인’(사진)이나 뉴질랜드산 ‘링컨 아이스와인’을 권한다. 남편들이여, 와인을 마시며 아내의 두 손을 꼭 잡아 주며 1년 반성문(?)도 쓰면서 마음을 전하면 다음 날 분명 풍성한 아침상을 받을 것이다.
√ 스승에게 - 긴 숙성기간 깊은 여운의 오래된 와인
스승은 학교선생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이가 한참 어린 친구가 스승이 될 수도 있고, 일면식도 없었지만 보고 들은 그 사람의 행적만으로 스승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한 해를 보내며 인생의 스승 혹은 멘터에게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다면 와인만큼 의미와 빛을 발하는 선물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포도나무는 보통 3년 정도의 수령을 가지면 와인으로 생산되는데 어린 포도로 만든 와인은 맛과 개성이 약할 수밖에 없다. 반면 30년 이상 오래된 나무에서 나온 와인은 그 뿌리가 더 깊게 지층에 닿아 있어 다양하고 복합적인 맛과 향을 내는 와인을 만들어낸다.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산 ‘테레자스 알토 말벡’이 있다.
안데스 고원에서 45년 이상 된 오래된 포도나무에서 생산되는 이 와인은 자두와 블랙체리의 맛과 과일, 바닐라, 캐러멜향이 복합적으로 잘 어우러진 맛을 내는데 숙성되면 맛은 더 부드러워진다.
또한 샤토 네프 뒤 파프 블랑(프랑스 와인·사진)은 80년 고목에서 생산된 화이트 와인으로 풍부한 과일향에 꿀 같은 달콤함이 느껴지는데 긴 여운이 특징이다.
√ 친구에게 - 편한 사람들과 ‘이지 와인’으로 즐거운 자리를
편하고 즐거운 친구들과의 술자리는 언제나 우리를 맘 편안하고 정겹게 만든다. 너무 비싸거나 유명한 와인이어서 맛에 대한 품평을 한마디해 주어야 체면이 설 것 같은 ‘지식 과시형’ 와인은 이런 자리에선 안 어울린다.
호주산 시라즈로 만들어진 와인들은 편한 친구들과의 자리에 딱 맞는다. 맛과 향에 있어 씩씩하면서도 대하기 쉬운 친구 같은 이미지를 풍기는데, 마치 퇴근길 어깨가 축 처진 동료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CF의 최민식 같은 느낌이다.
이 품종은 스파이시(매운)한 맛이 특징으로 맵고 짠 한국음식과 가장 잘 어울린다. 호주산 시라즈 와인들은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게 많다. 그중에서도 ‘옐로 테일 시라즈’(사진)는 생동감 있는 노란색 레이블과 쉽고 약간은 장난스러운 이름, 그리고 풍부한 과일향과 달짝지근한 부드러움으로 술술 넘어가는 이지(easy)와인이다.
김기재 와인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