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Travel)이야기들/재밋는 아프리카

문명과 반문명의 경계…가슴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향기男 피스톨金 2006. 1. 8. 10:56

 

              문명과 반문명의 경계…

 

          가슴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아프리카는 더 이상 우리와 다르지 않다. 그들의 주머니 속에서도 휴대전화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댄다.
 
인터넷을 통하여 얻은 세상의 정보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아주 먼 곳은 물론 가까이에 있는 친구들과 메일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와 같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 관념의 유희에 사로잡혀

 

◇부르키나파소의 로비족 문. 항상 닫혀 있으면 그것은 문이 아니라 벽이다. 항상 열려 있으면 그것 또한 문이 아니라 통로다. 그렇듯이 우리는 아프리카에 대한 열고 닫음에 익숙해져야 한다. 무엇이 희망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제대로 구별하자는 말이다.
〈부르키나파소 로비족의 문. 갤러리아프리카로 소장〉

2005년 가을, 인사동에서 김귀욱의 아프리카 사진전을 보았다. 문명과 잠시 작별하고픈 작가의 소박한 마음과는 달리 오히려 문명을 좇거나 문명에 내몰리고 있는 아프리카 사람들과 동물들이 보였다.

 

마사이족이 화려한 구슬 장신구를 몸에 치장하기까지, 마사이마라와 세렝게티의 거대한 울타리에 동물들이 갇히기까지, 그들의 눈빛에서 그리고 김귀욱의 사진에서 문명과 반문명 사이의 경계를 본 것이다.

 

케냐의 나이로비는 말할 것도 없이 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콩고의 시골에서도 휴대전화는 이제 더 이상 구경거리가 아니다.

 

인터넷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프리카는 더 이상 순수함 내지는 생명력으로 대변되는 미지의 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을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피카소나 디네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자신의 이성으로 재단한 아프리카에 대하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환상에서 희망은 관념 혹은 유희의 언어가 되어 정체를 꼭꼭 감추는 데도 사람들은 태연히 아주 태연히 아프리카를 노래하고 있다.

 

# 문명을 향해 뜀박질하는

 

케냐의 마사이마라와 탄자니아의 세렝게티는 마사이 랜드라고 불렸던 하나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시절 영국과 독일은 그 지역에 국경선을 만들어 마사이족 사람들을 둘로 나누었고 동물들을 가두어 버렸다.

 

아프리카 하면 떠오르는 사파리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게임을 즐기듯이 사자의 가죽을 벗겼고, 코끼리의 이빨을 뽑아서 그들의 응접실을 장식했다. 사파리는 그런 슬픔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자 가죽과 코끼리 이빨의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약삭빠른 장사꾼들은 마사이족 사람들이 색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거래를 가르쳤다.

 

마사이족 사람들이 가져온 가죽과 상아는 플라스틱 구슬로 바뀌어 문화의 새로운 패턴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수많은 동물들이 죽어가는 것과 비례해 마사이족의 장신구는 머리에서 목으로, 손으로 그리고 발끝까지 내려왔다.

 

오늘도 화려한 구슬 장식을 한 마사이족 사람들은 대지 위를 높이 뛰어오른다.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마음에 욕망을 담아 문명을 향해 힘껏 뜀박질하고 있는 것이다.

 

# 가슴이 아닌 머리로

 

◇콩고의 현대회화. 식민지 시절 서구 화가들의 어깨너머에서 시작된 아프리카의 현대회화는 아프리카 조각에 담겨진 개념적인 성격이나 서사적인 내용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를 회화에 접목시켜 선이나 색 그리고 형태에서 자유로움을 얻고 있다.
〈갤러리아프리카로 소장〉

근래 한국에는 아프리카와 관련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프리카 조각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회화에 관해서는 상당히 인색한 평가를 내린다.

 

어쩌면 피카소나 마티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자신의 관념에 빠져 아프리카 미술에 담겨진 상상력과 메시지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우를 되풀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콩고민주공화국의 루바(Luba)족 화가들만 해도 그렇다. 그들은 이미 아프리카 조각에 담겨진 개념적인 성격이나 서사적인 내용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를 회화에 적용함으로써 아프리카 특유의 선과 색과 형태를 만들어 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작품은 유니세프 엽서에 실리기도 하고, 세계 곳곳에서 전시회가 열리면서 현대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들의 회화를 외면하거나 폄하하고 있다.

 

가슴이 아닌 머리로 재단된 세계는 자신 그 이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현대회화는 아프리카에서 그다지 큰 모티브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새로운 양식의 예술 경향을 만들기 위해서 길은 너무나 멀리 있다는 이야기다.

 

# 희망이라는 사건의 언어

 

아프리카의 색은 참으로 밝다. 붉은색도 밝고 검은 얼굴도 밝게 보인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물을 배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소망한다.

 

그런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화가나 시인이 늘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들의 피부와 닿아도 검은 색이 묻지 않는다는 것을, 포옹을 해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손바닥에 유난히 땀이 많다는 것을….

 

아프리카를 노래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피카소나 마티스가 찾지 못한 존재의 비밀을 풀어내는 것, 아프리카 미술에 담겨진 의미가 내 삶의 주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아프리카를 희망한다.

 

데미안의 아프락사스처럼 희망이란 단어가 결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가장 구체적인 사건의 언어라는 것을….

 

철학박사. 갤러리아프리카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