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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예술기행 29.1% 그 무엇을 향한 열정 혹은 여정

향기男 피스톨金 2006. 1. 8. 11:01

 

 

          정해광의 아프리카 예술기행

 

    29.1% 그 무엇을 향한 열정 혹은 여정


아프리카 사람들이 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신이 지닌 인간적인 그 무엇 즉 사랑을 실천하기 위함이고,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은 개개 구성원에게서 발견되는 그 무엇 즉 희망을 보기 위함이다.
 
사랑을 멀리하지 않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 이는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1%의 가능성을 향한 열정 혹은 여정일지도 모른다.

 

전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2005년 가을, 인천에서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는 시민단체와 경찰의 충돌이 있었다. 대나무 몽둥이를 휘두르는 사람들과 그것을 방패로 막으려는 젊은이들, 그 양편 사이에서 섬뜩한 눈빛들이 오갔다.

 

몽둥이를 피하려는 젊은이는 물론 인간다운 세상을 이루자는 사람들에게도 증오의 눈빛이 보였다. 이데올로기가 무섭다는 생각이 든 순간, 여름에 다녀온 콩고민주공화국이 떠올랐다.

 

1998년에 시작된 콩고의 내전에서 400만명이 죽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또 억울하게 죽어갔다. 전쟁이 끝난 것은 2003년, 가기가 두려웠지만 예전처럼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그냥 길을 떠났다.

 

전쟁이 끝난 지 3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난 그곳에서 살아 있는 자들의 살기를 느낄 수 없었다. 어디를 가도 증오하는 눈빛, 아니 미워하는 눈길조차도 보지 못했다. 우리는 6·25를 끝낸 지 50년이 넘었다.

 

그리고 인간다운 세상을 꿈꾸자던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서서 하늘 높이 양팔을 치켜든 콩고 홀로족의 조각에서 그들이 소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쩌면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신앙의 본질이 어떤 종교라는 이름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갤러리아프리카로 소장〉

그럼에도 사람들은 서로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내모는 자와 내몰리지 않으려는 자들의 헤게모니에서 증오하는 눈빛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맥아더 동상 앞에 모인 사람들의 눈빛에서 알았다. 내가 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아프리카에 가는지 그 분명한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예전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종교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사하라 사막의 북부지역인 이슬람권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람들은 더 이상 창조주나 절대존재에 대해서 제례를 행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마음에 담아둘 뿐, 신 그 자체를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조상신이나 살아 있는 사자(死者)를 섬기는 것도 우리의 제사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어디로부터 비롯되고, 또 누구와 가까운 존재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소박한 마음일 뿐이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신성(神性)은 심성(心性)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프리카에 대하여 가능성을 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신을 현실세계로 끌어내리거나 끌어올리는 행위에서 그 중심에 인간을 세우기 때문이다.

 

이는 예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예술세계를 일상으로 받아들이거나 일상을 미화시키는 데 있어서 그 이면에 언제나 인간의 꿈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런 점에서 어느 한편을 절대화하려는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가 싫다. 인간성을 파괴시킬 수 있는 혹은 인간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게끔 하는 것들도 싫다.

 

예술은 물론 신 앞에서도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고 싶어했던 아프리카 사람들, 그들이 사는 곳으로 알 수 없는 발걸음을 옮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숨겨진 1%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조각이 손을 배 위에 올려놓거나 차려 자세인데 반해 콩고민주공화국의 홀로(Holo)족과 부르키나파소의 로비(Lobi)족에게서 구한 몇몇 조각은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두 손을 하늘 높이 치켜세우고 있는 조각은 신에 대한 소망 혹은 비를 바라는 마음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말리 도곤족의 조각에서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기에….

 

그러나 두 조각에는 다른 점이 있었다. 도곤족의 조각이 무릎을 꿇고 있는 데 반하여 홀로족의 조각은 서서 두 손을 하늘 높이 세우고 있다는 것이 좀 특이했다. 팔을 넓게 벌린 로비족의 조각 역시 예사로운 것이 아닌 듯했다.

 

팔을 벌린 모습에서 자유라는 주제가 떠올랐지만 비단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선 상태에서 팔을 위로 향하거나 팔을 넓게 벌린 모습은 어쩌면 내가 지금껏 몰라 왔던 그 무엇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아더 동상 앞에 모인 사람들의 눈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선 상태로 두 손을 높이 쳐든 조각에서 신이 아닌 신앙이 보였다. 두 팔을 넓게 벌린 조각에서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데아가 보였다.

 

신앙의 본질이 사랑의 실천에 있고, 이데아의 본질이 희망의 추구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놓치고 살았으니 서로를 미워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 무엇의 힘(vital force)을 홀로족과 로비족의 조각에서 보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무엇을 향한 여정

 

◇부르키나파소 로비족의 조각. 골동품 상인은 이 조각이 ‘자유’를 의미한다고 했지만, 아프리카에는 예전에 자유라는 단어가 없었다. 이미 자유로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인의 해석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식민지 하에서 정치적 의미의 자유(freedom)를 고려한 시대적인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갤러리아프리카로 소장〉

피카소는 선을 통하여, 마티스는 색을 통하여 그리고 브랑쿠시는 형태를 통하여 현대미술이 지닌 한계를 넘고자 하였다. 그들은 아프리카 미술에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미학적 견지(intellectual force),

 

즉 주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들은 아프리카 미술이 지닌 개념적인 성격이나 서사적인 내용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를 간파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미술이 지니는 특성(identity)을 놓침으로써 아프리카를 원시주의(Primitivism)라는 문화의 하위개념으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이는 인간다운 세상을 이루고 싶어했던 마르크스의 꿈에 인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우리는 너무 가까이 혹은 너무 멀리 있기에 서로가 같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 혹은 테레사 수녀는 힘들게 사는 사람들 주위에서, 석가 혹은 원효대사는 영혼이 메마른 사람들 주위에서 사랑을 맴돌게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희망이라는 끈을 놓지 않았다. 어쩌면 성자들은 여러 사람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치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하여 여럿이 함께 한 사람에게 다가간 것처럼 아프리카 조각은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사람들 곁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아프리카를 가는 것, 이는 어쩌면 숨겨진 내 존재 이유를 알게 하기 위한 여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철학박사·갤러리아프리카로 대표